전북 부안 바닷가에서 찾은 '홍상수'식 낭만

[김성호의 씨네만세 1353] 홍상수 전작전 <리스트>

2011년 여름, 전라북도 부안 모항해수욕장 앞 펜션에 홍상수 감독과 스태프, 그리고 배우들이 있었다. 홍상수 감독의 13번째 장편영화를 찍기 위해서였다. 윤여정, 정유미, 이자벨 위페르, 권해효, 만삭의 문소리 등이 출연한 영화엔 <다른 나라에서>란 이름이 붙었다. 완성된 작품은 이듬해 65회 칸영화제 경쟁부문에 출품됐다. 한국 개봉서 관객은 3만 명이 넘게 들었다. 여기까지는 잘 알려진 이야기다.

당시 만들어진 영화는 한 편이 아니다. 전북 모항의 바닷가에서 또 한 편의 영화가 있었다. 영화의 도입, 그러니까 윤여정이 연기한 엄마와 정유미가 연기한 딸이 펜션 발코니에서 대화를 나눈다. 빚 때문에 쫓기듯 지방 펜션으로 온 엄마와 딸이다. 시골 마을에서 딱히 할 것도 없는 딸은 무료하기만 하다. 엄마와의 짧은 대화를 끝으로 딸은 거실에서 공책에 무언가를 적어 내린다. 여기까지가 영화 <다른 나라에서>의 도입이다. 그런데 이 도입을 같이 쓰는 다른 작품이 있다. 홍상수의 단편 <리스트>다(관련 기사: 홍상수가 아니었다면 찍지 못했을 영화, 유준상이 전한 촬영 비화
https://omn.kr/2ie66).

이달부터 6월 중순까지 한국영상자료원 시네마테크KOFA에서 '홍상수 전작전: 인트로덕션'이 열린다. 데뷔 30주년을 맞아 홍 감독의 필모그래피에 든 작품 모두를 관객 앞에 소개하는 행사다. 장편 뿐 아니라 다른 곳에서 보기 어려운 단편도 포함돼 영화팬의 관심을 끈다. <리스트>도 그와 같은 관심을 받는 작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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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스트스틸컷한국영상자료원

한 신에서 출발하는 두 영화

하나의 신이 서로 다른 두 영화의 출발이 된다. 프랑스 명배우 이자벨 위페르가 출연하는 <다른 나라에서>와 전혀 다른 작품인 <리스트>는 가깝고도 먼 영화다. 두 영화에 모두 윤여정과 정유미, 유준상이 출연한다. 그러나 앞의 영화는 이자벨 위페르가 주역이 된다면 뒤의 작품에선 조연이던 윤여정, 정유미, 유준상이 주연 자리를 꿰찬다. 똑같은 도입이 갈라지는 건 정유미가 펜션 방에서 메모를 적는 신에서부터다. 앞의 영화에선 단편영화 시나리오이던 것이 뒤의 영화에선 '내일 하고 싶은 일'로 바뀐다. <리스트>는 여기서 출발한다.

<다른 나라에서>는 도입서 딸이 써 내려가는 시나리오가 곧 영화로 펼쳐진다. 관객에겐 딸이든 그 시나리오 속 안나(이자벨 위페르 분)든 모두 영화 속 인물일 뿐이지만, 영화 안에선 딸은 살아 숨 쉬는 진짜이고 안나는 가짜가 된다. 극중극의 액자식 구성이다. 도입에 등장한 인물은 액자 바깥의 이들이다. 영화가 극중극을 전면에 드러내는 동안 액자 바깥, 그러니까 홍상수의 영화를 보는 관객과 영화 안에서 펼쳐지는 이야기 사이의 좁은 공간에 끼여 얼마 조명받지 못한다.

<리스트>는 어떤가. 여기선 딸과 엄마의 이야기가 중심이 된다. 영화 속 딸이 적은 리스트는 그대로 다음날 둘이 할 일정이고 계획표다. 아무렇지 않게 다음 날이 되고, 둘은 그 계획을 함께하려 외출한다. 시작은 동네 구경이다. 엄마와 딸이 동네 여기저기를 구경하러 다니는데 바닷가에서 뜻밖의 만남을 갖게 된다. 말을 걸어온 건 훤칠한 사내(유준상 분)다. 영화과 학생이던 <다른 나라에서>의 설정이 그대로 이어진 걸까. 딸은 단박에 사내를 알아본다. 그가 얼마 전 엄마와 함께 보았다는 영화의 감독이라는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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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스트스틸컷한국영상자료원

천만 영화 감독이라니

사내는 무려 천만영화 감독이란다. 그가 바닷가를 보러 나온 모녀에게 말을 걸었고, 딸은 그를 알아보았고, 다시 사내가 두 사람에게 함께 식사하지 않겠느냐 청한다. 그렇게 세 사람의 이야기가 시작된다. 사내의 청에 응답한 엄마는 은근히 딸에게 남자를 붙여주고 싶은 모양이다. 외출하기 전부터 이제 서른이 다 됐으니 남자를 만나라고 잔소리도 하지 않았던가. 제 일은 제가 알아서 하겠다고 큰소리를 친 딸이지만 자기라고 고민이 없을까. 그런데 딱 이리 괜찮은 남자가 제 앞에 나타나다니.

재미있는 영화가 대개 그러하듯, 문제가 없을 리가 없다. 사내는 이혼남이다. 이혼이 무어 흠이 되겠냐는 듯 초장부터 저를 이혼했다 소개한 사내는 마음이 힘들어서 홀로 바닷가를 찾아왔다고 얘기한다. 그러고는 저돌적으로 제가 딸이 아주 마음에 든다며 괜찮다면 데이트를 할 수 있겠느냐고 엄마에게 허락을 구하는 것이다. 이렇게 다짜고짜 돌입하는 남자의 공세란 일상에선 그리 쉽게 일어나지 않는 일이 아닌가. 당혹스럽지만 딸 좋다고 들이대는 이 남자의 모습에 엄마는 딸에게 다시 한번 만나기를 권하고, 딸 또한 못 이기는 척 그렇게 둘의 일정이 지속된다.

<리스트>는 도입부에 딸이 적은 '목록'을 그대로 뒤따른다. 딸의 계획 중에선 배드민턴을 같이 칠 사람을 구해 함께 치는 일이 들어 있고, 또 다른 몇 가지도 있는 것이다. 영화감독인 사내가 그를 함께 할 이로 선택되니 일들은 무리 없이 이어진다. 두 사람, 아니, 엄마까지 세 사람의 기묘한 동행과 데이트, 곁에서 보기에 흥미진진할 수밖에 없는 하루가 시작된다. 마치 <나는 솔로> 류의 연애 프로그램의 가장 인상적인 관계를 떼어내 그 하루를 곁에서 상영하는 듯하다. 과연 홍상수는 사람들이 좋아할 만한 이야기를 잘 아는 작가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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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스트스틸컷한국영상자료원

홍상수판 구운몽?

전혀 다른 영화들이 맺는 독특한 관계가 있다. 때로는 두 편의 영화가 한 뿌리에서 출발하기도 하고, 곁에 심긴 서로 다른 나무임을 알게 되기도 한다. 왕가위의 대작 <동사서독> 촬영 중 남는 시간과 장비, 배우들을 데리고 <동성서취>가 만들어지고, 다시 홍콩으로 자리를 옮겨 <중경삼림>을 찍었다는 이야기는 유명하다. 그 결과 서로 다른 이야기와 매력을 가진 독자적인 작품으로 남지 않았나.

장선우의 <나쁜 영화>를 찍고 남은 자투리 필름을 가져다 찍은 <패싸움>이란 단편이 있었고, 류승완은 이 영화가 받은 주목으로부터 전설적 데뷔작인 <죽거나 혹은 나쁘거나>를 완성하기도 한다. 특별한 관계성을 가진 여러 짝의 영화들 가운데 <리스트>와 <다른 나라에서>의 자리 또한 있을 수가 있겠다.

<리스트>가 특별히 인상적이 되는 건 사내와 딸 사이의 관계가 진면목을 드러내는 순간부터다. 12개의 리스트 마지막 자리는 '자면서 나의 왕자님을 상상하면서 달콤하게 잠이 든다'였던가. 딸의 꿈은 말 그대로 이뤄지고, 관객들 또한 딸의 꿈을 지켜보게 된다.

홍상수 전작전 포스터
홍상수 전작전포스터한국영상자료원

홍상수 감독의 영화가 자주 그러하듯 어떤 거창한 이야기를 하고 있는 작품은 아니다. 그저 영화 속 인물들이 때로는 너절하고 비루하고 지질하고 그렇고 그런 사내들과 그보다는 나은 여자들이 매번 같은 실수를, 그러니까 더없이 인간적인 잘못들을 반복하며 관계하고 살아가는 것이다.

좋은 곳을 돌며 담배 태우고 술을 마시는 이들의 삶을 영화와 얼마 다르지 않은 일상을 사는 우리가 본다. 관음하는 듯한 비밀스러운 쾌감을 요즈음 유행하는 관찰 예능보다 한발 앞서 담아낸 홍상수다. 그를 두고 사람들은 예술이라 말하니, 과연 예술이란 저 멀리 높고 귀한 자리에만 있는 것은 아니겠다.

누구나 재미있게 볼 법한 영화다. 용기를 갖고 들이대는 사내들과 기꺼이 그를 맞이하는 여자들의 모습이 요 근래의 풍토보다도 훨씬 더 낭만적이다. 어째서 홍상수가 박학한 이들에게보다도 낭만을 아는 이들에게 특히 높이 평가되는지 알겠다.
덧붙이는 글 김성호 평론가의 브런치(https://brunch.co.kr/@goldstarsky)에도 함께 실립니다. '김성호의 씨네만세'를 검색하면 더 많은 글을 만날 수 있습니다. goldstarsky@naver.com
홍상수전작전 한국영상자료원 리스트 홍상수 김성호의씨네만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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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영화평론가.서평가.기자.3급항해사 / '자주 부끄럽고 가끔 행복했습니다' 저자 / 진지한 글 써봐야 알아보는 이 없으니 영화와 책 얘기나 실컷 해보련다. / 인스타 @blly_kim / GV, 강의, 기고청탁은 goldstarsky@naver.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