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상수가 아니었다면 찍지 못했을 영화, 유준상이 전한 촬영 비화

[김성호의 씨네만세 1351] 홍상수 전작전 <다른 나라에서>

이달부터 6월 중순까지 한국영상자료원 시네마테크KOFA에서 홍상수 전작전이 열리고 있다. 말 그대로 홍상수 감독의 필모그래피에 자리한 모든 작품을 적어도 두 차례씩 상영하는 '전 작품 상영회'다. 씨네필이라 불리는 일단의 예술영화애호가들만 자리하던 시네마테크 로비에 사람들이 평소보다 붐비는 건 역시 '홍상수'란 이름 석자가 가진 힘 때문이겠다. 독립영화, 또 예술영화의 세계에서 한국을 넘어 세계로까지 제 존재를 알린 홍상수의 역량과 영향력을 짐작할 만하다.

전작전은 데뷔 30주년을 맞아 진행되는 행사다. 적잖은 이들이 <돼지가 우물에 빠진 날>을 한국 영화사에 길이 남을 훌륭한 데뷔작이라 말한다. 영화가 나온 게 1996년이니 올해로 30주년이 된 것이다. 30년의 시간이 그를 주목받는 젊은 감독에서 세계 영화계가 인정하는 거장으로 빚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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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른 나라에서스틸컷한국영상자료원

독특함을 넘어 특별함에 닿으려는

기실 그리 오랜 시간이 필요한 것도 아니었다. 1998년 두 번째 작품 <강원도의 힘>이 칸영화제가 전 세계 젊은 창작가들을 발굴하는 '주목할만한 시선' 섹션에 진출해 대단한 명성을 얻었던 것이다. 막 세계와 닿기 시작한 한국영화계의 큰 성취로 평가받았고, 한국예술종합학교가 바로 그를 발탁해 교수 자리를 맡기기도 했던 건 유명한 이야기다. 그로부터 30편이 훌쩍 넘는 장·단편을 꾸준히 발표하며 칸과 베를린 국제영화제에서 수차례 수상한 한국을 대표하는 감독으로 자리했다.

<다른 나라에서>는 2011년 발표한 13번째 장편연출작으로, 칸영화제 경쟁부문에 진출해 화제를 모은 작품이다. 3번 째 경쟁부문 초청으로, 임상수의 <돈의 맛>과 함께 진출해 혹시 한국영화가 상을 탈 수 있지 않겠느냔 기대를 모으기도 했다. 물론 대상은 미카엘 하네케의 <아무르>가 만장일치로 가져갔다. 65회 영화제는 여느 때보다 치열했는데, 자크 오디아르의 <러스트 앤 본>, 레오 까락스의 <홀리 모터스>, 토마스 빈터베르그의 <더 헌트>, 켄 로치의 <앤젤스 셰어: 천사를 위한 위스키>, 마테오 가로네의 <리얼리티: 꿈의 미로>, 카를로스 레이가디스의 <어둠 속에 빛이 있으라>, 웨스 앤더슨의 <문라이즈 킹덤>, 크리스티안 문주의 <신의 소녀들> 같은 작품이 한 해에 쏟아진 걸 보자면 상황을 짐작할 수 있겠다.

비록 무관에다 별 주목도 받지 못하고 돌아왔으나 <다른 나라에서>의 가치를 말하는 이가 없지 않았다. 특히 홍상수의 영화가 지닌 분명한 힘, 저만의 작법으로 독자적인 목소리를 이어가는 성실하고 힘찬 자세만큼은 여실히 확인할 수 있었던 때문이겠다. 특히 한국에서만큼은 수많은 비평가들이 앞을 다투어 이 영화의 훌륭함을 역설하기도 했다. 좀 과한 구석이 없지 않다 싶기도 하였느나, 돌이켜보면 세상엔 영화와 보는 이의 수만큼 감각하고 이해하는 방법론의 가짓수 또한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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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른 나라에서스틸컷한국영상자료원

같은 듯 달라지는 홍상수 영화의 매력

<다른 나라에서>는 전라북도 부안 어느 펜션, 모녀가 자리한 발코니에서 시작한다. 모항이라는 바닷가 동네로 쫓기듯 도망 온 듯 보이는 모녀다. 둘이 처한 상황을 알리는 짤막한 대화가 있고, 이어 딸(정유미 분)이 거실로 자리를 옮겨 공책에 무얼 적기 시작한다. 그녀의 목소리로 읊어지는 대사는 딱히 할 일 없는 그녀가 단편영화 시나리오를 쓰고 있음을 확인한다. 주인공이랄까, 주요 등장인물은 언젠가 영화제서 보았다는 프랑스 여성이다. 그로부터 영화는 안느(이자벨 위페르 분)가 등장하는 단막극을 세 차례 이어 펼쳐낸다.

먼저 등장하는 안느는 잘 나가는 영화감독이다. 그녀가 어느 부부의 안내를 받아 동네를 돌아보고 지내는 모습이 채워진다. 실제로 만삭이던 문소리와 그 남편으로 등장하는 권해효는 자못 당혹스런 설정을 무리 없이 연기해낸다. 언젠가 프랑스에서 안느와 나누었던 키스와 구태여 남편을 좇아 안느와의 만남 자리에 나온 만삭의 아내, 이들이 벌이는 좀체 어디로 향하는 지 알 수 없는 이야기를 즐겁게 즐기는 이들도 적잖다. 딱히 목적지랄 게 없는 듯 나아가는 여정은 그저 쉬러 찾은 어느 여행지에서의 계획 없는 일정과도 닮아 있다면 닮아 있는 것이다.

영화는 안느에게 서로 다른 캐릭터를 입혀 비슷한 듯 다른 이야기를 반복한다. 잘 나가는 감독 다음엔 한국남자와 바람을 피우는 프랑스 유부녀가 되고, 그 다음엔 한국여자에게 남편을 빼앗긴 이혼녀가 되어 홀로 모항을 오가는 것이다. 세 명의 안느가 같은 공간에서 비슷한 때를 오가는 과정이 일종의 혼란스런 감각을 일깨운다. 이들이 만나는 이들 또한 같아 보이다가 또 달라지기도 하는데, 이를테면 해수욕장 안전요원으로 등장하는 유준상과의 관계맺음이 그렇고, 문소리나 권해효와 만나는 모습 또한 그러하다. 어느 순간 겹쳐졌다가 또 갈라져나가는 이야기는 홍상수의 영화가 자주 그러하듯 반복과 겹침, 그 사이의 미세한 달라짐으로써 보는 이에게 특별하고 미묘한 감상을 일으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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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른 나라에서스틸컷한국영상자료원

언어가 사라지면 소통 또한 사라질까

<다른 나라에서>가 가진 또 하나 분명한 매력은 제목에서 기대할 수 있듯 언어다. 한국어는 남한과 북한만이 쓰는 우리말이다. 국경을 넘어서면 다른 이들에게 통하지 않는 고립된 언어이기도 하다. 통하는 사람들과 통하지 않는 사람 사이엔 보이지 않는 경계가 있다.

프랑스말을 쓰는 안느와 한국어를 쓰는 한국인 사이에서 빚어지는 다른 언어의 충돌이며 오해, 또 인간적으로 통하는 순간들이 독특한 재미를 내는 순간이 없지 않다. 홍상수와 코드가 맞는 이라면 빵빵 터질 수도 있겠는데, 나는 그와 같은 이를 살며 너덧쯤은 마주한 적이 있는 것이다. 전작전에서 이 영화를 상영한 상영관에서도 그런 이가 몇 있었으니, 홍상수의 영화가 가진 매력을 보다 잘 느낄 수 있는 복된 이들이 부럽기도 하다.

잘 짜인 언어가 사라지면 소통 또한 불가해지는가. 꼭 그렇지는 않다. <다른 나라에서>는 언어가 가로막힌 상황에서 여전히, 혹은 더 흥미로운 소통이 제 멋대로의 방식으로 이뤄질 수 있음을 보인다. 어쩌면 영화적 언어, 전형적인 형식이며 선형적으로 나아가는 통상적인 서사 또한 소통을 틀 안에 가두는 제약일지 모를 일이다. 이 영화가 그 제약을 스스로 해체하고 실험하였다고 적는다면 제법 있어 보이기는 하겠으나 나는 차마 그렇게는 말하지 못하겠다. 다만 보는 이가 한번 쯤 이와 같은 생각을 펼쳐볼 여지를 제공하고 있기는 하다. 여기까지만 적는다면 거짓은 아니겠다.

홍상수 전작전 포스터
홍상수 전작전포스터한국영상자료원

말과 생각이 사라진 사이에 일어나는 것이 있다

언젠가 유준상은 TV 예능프로그램에 출연해 영화 촬영 뒷얘기를 생생하게 전하기도 했다. 촬영이 시작될 때까지 영화 제목조차 없었다고 하고, 안전요원이라는 설정이 정해지며 직접 본인이 필요하지 않을까 싶은 소품으로 텐트며 기타, 랜턴 따위를 챙겨갔다고 했다. 그런데 감독이 언질조차 하지 않았던, 제가 마지막까지 뺄까말까 고민하다 가져간 랜턴이 영화에서 가장 중요한 소품으로 쓰였다는 이야기다. 실제로 영화에서 등대와 랜턴을 연결 짓는 모호하지만, 또 모호한 대로 홍상수 영화풍의 상징으로의 멋을 발하는 소품으로 쓰이니만큼 이 랜턴의 효용이 결코 작지 않았다. 홍상수의 영화, 그중에서도 특히 별 계획이 없어보였던 영화 <다른 나라에서>의 독특한 작법을 이해할 수 있는 대목이다.

여러모로 난감한 영화다. 비슷한 영화를 따로 찾기 어려울 정도로 좋게 말해 독특하다. 영화에 대해 극찬하는 한국 이름난 평론가들의 비평 또한 홍상수 감독의 영화 못잖게 난해하고 난감한 것 투성이다. 그러나 이 영화가 독특한 작법 만큼이나 개성 강한 작품인 건 사실이다. 유달리 꿈과 창작이라는 설정을 전면에 드러내고, 그만큼 자유로이 그려낸 홍상수의 세계가 마치 계획 없이 찾은 휴양지에서 별 목적 없이 쓴 시나리오만큼 부담 없이 읽히는 순간도 분명하다.

그러고 보면 <다른 나라에서>의 가치가 여기 있는 게 아닐까 싶기도 하다. 대단치 않은, 무엇도 바꿔내지 않는 듯 보이는 한 잠 꿈에 기분 좋아지는 순간이 분명히 있지 않은가. 아주 멋진 작품을 보고 끝내주는 음식을 먹고 대단한 사람과 만나는 것만이 최고의 여행이 아니듯이. <다른 나라에서>는 잘 잔 잠, 잘 꾼 꿈, 잘 한 여행의 다른 방식을 잘 만든 영화를 통해 보여준다. 애써 힘 줄 필요는 없다. 때로는 여유와 여백이 그 어려운 '잘'을 이루기도 한다. 그런 태도겠다.
덧붙이는 글 김성호 평론가의 브런치(https://brunch.co.kr/@goldstarsky)에도 함께 실립니다. '김성호의 씨네만세'를 검색하면 더 많은 글을 만날 수 있습니다. goldstarsky@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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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영화평론가.서평가.기자.3급항해사 / '자주 부끄럽고 가끔 행복했습니다' 저자 / 진지한 글 써봐야 알아보는 이 없으니 영화와 책 얘기나 실컷 해보련다. / 인스타 @blly_kim / GV, 강의, 기고청탁은 goldstarsky@naver.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