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 글은 영화의 스포일러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배우 박명훈, 봉준호 감독의 <기생충>을 본 이라면 누구나 기억할 배우다. 이 영화로 일약 스타덤에 오른 이정은이 분한 문광, 그녀의 남편으로 대저택의 지하 세계를 지키는 근세를 바로 이 배우가 연기했다. 2013년부터 본격적인 배우활동을 시작한 박명훈은 2015년 박정범의 <산다>, 2016년 <스틸 플라워> 등으로 조금씩 연기의 폭을 넓혀가기 시작했다. 그가 2017년 작 <재꽃>으로 봉준호의 눈에 들었단 건 영화팬들 사이엔 제법 알려진 이야기다. <재꽃>을 인상 깊게 보았다며 직접 오디오 코멘터리에 참여한 봉준호 감독이 "박명훈 배우는 세계 최고의 술 취한 연기를 하시는 분", "술 취한 연기의 마스터"라고 극찬한 덕분이겠다.
바로 그 영화 <재꽃>이 올해 27회 전주국제영화제서 상영됐다. '특별상영: 전주X마중' 섹션을 통해서다. 폐막식 사회를 맡은 배우 정하담이 직접 골라 전주를 찾은 영화팬들 앞에 내보일 작품으로 이 영화를 꼽은 덕분이다. 10년의 시간을 건너 이 작품을 전주의 상영관 스크린에 걸게 된 건 여러모로 의미 깊은 일이겠다. 1994년 생으로 어느덧 경험 많은 30대가 되었으나, <들꽃>부터 <재꽃>까지 이어지는 '꽃 3부작'을 통해 데뷔할 당시엔 갓 성년이 된 때였다. 꽃 3부작을 통해 배우로서 첫발을 뗀 정하담은 이들 작품을 통해 이전과는 전혀 다른 역량을 지닌 배우가 됐다.
<스틸 플라워>는 꽃 3부작의 허리가 되는 영화다. 배우 박명훈과 정하담 모두에게 중요한 만남이며 도전이 되는 의미 깊은 작품이기도 하다. <들꽃>에 이어 또 한 번 기댈 곳 없는 소녀가 된 하담에게도, 박석영 감독과 첫 만남이 된 박명훈에게도 그러했을 테다. 전작과 마찬가지로 흔들리는 카메라는 하담이 여전히 기댈 만한 터전이 없음을 확인한다. 들판에 핀 꽃은 '여전히 still' 연약한 꽃인 것이다.
▲스틸 플라워스틸컷
인디스토리
기댈 곳 없는 소녀의 세계
그래서일까. 하담은 시작부터 제가 기댈 것은 찾아 나선다. 거친 손놀림으로 트렁크에 짐이랄 것을 싸는 하담의 모습을 거칠게 흔들리는 카메라가 잡아낸다. 전작과 마찬가지로 <스틸 플라워>에서도 여전히 거친 핸드헬드 기법이 유지된다. 카메라가 흔들리는 만큼 꽃이 처한 환경 또한 위태로움을 알도록 한다. 전작 <들꽃>에선 관계랄 것이 있었다. 좋은 쪽이든 나쁜 쪽이든 말이다. 하담 곁에는 그보다 한 살쯤 많아 뵈는 아이들이, 저들 또한 기댈 곳 없는 처지인 건 마찬가지지만 있기는 있었다. 그리고 그 아이들에게도 관계랄 것이 자리했다.
그러나 <스틸 플라워> 속 하담은 혼자다. 낯선 도시 부산에 쓸 만한 것이라곤 없어 뵈는 반쯤 고장 난 트렁크 하나만 끌고 도착한 신세다. 여기저기 돌아보지만 월세는 도저히 감당할 수 없는 수준이다. 가파른 언덕, 좁은 골목을 오르고 오른 끝에 누구도 돌보지 않는 작은 방, 거미줄 그득한 방치된 방을 발견한다. 그래도 그곳이 가장 나았던 것일까. 하담은 그곳에 제 터를 마련한다. <들꽃>에서 세 아이 은수와 수향, 그리고 하담이 머물렀던 재개발을 앞둔 빌라촌 폐허에 터를 잡았던 것과 얼마 다르지 않은 듯한 모양새다.
<들꽃>에서 아이들의 여성성을, 젊음을 탐냈던 세상이 <스틸 플라워>에선 조금은 다른 모양으로 접근한다. 아예 필요조차 없다는 듯 거들떠보지 않는다. 세상은 이미 가진 것들로 충분하고 못 한 것을 돌아볼 마음이 없다. 돈이 필요한 하담이 여기저기 기웃거려보지만 퇴짜를 맞기 일쑤다. 하담은 고용할 만한 평범한 시민이 아니다. 휴대폰이 없고, 그래서 전화번호가 없고, 은행 계좌나 거주지의 주소 또한 없는 것이다. 어디 그뿐일까. 안정된 부모에게서 배운 것도, 학교와 일터에서 배운 것도 없는 아이는 행색뿐 아니라 몸가짐과 눈치, 태도 따위가 하나하나 보통의 평범한 이들과는 다르다. 그 모두가 문턱이 된다.
▲스틸 플라워스틸컷
인디스토리
이 소녀에게 세상은 얼마나 가혹한가
어느 곳에도 받아들여지지 못하는 하담에게 눈을 두는 이들이 있다. <스틸 플라워>의 주된 관심이 바로 여기에 있다. 누군가에겐 있어도 없는 듯한, 하등 필요 없어 관심 두지 않는 하담이 다른 누구에겐 관심 있는 존재가 된다. 그러나 그들의 관심이 얼마나 사악한지.
거리에서 전단을 돌리던 한 여자가 하담을 발견한다. 그녀가 하담에게 다가와 "너 돈 필요하지 않냐"며 제가 하던 일을 권한다. 남은 전단을 뭉텅이 째 안기고는 저는 아이를 데리러 가야 한다며 다 돌리고 여기 기다리라고 한다. 그러나 그녀는 끝끝내 돌아오지 않는다. 물론 하담은 열심히 전단을 돌렸고, 그 노력은 보답받지 못한다. 말하자면 돈을 떼인 것이다.
이런 일의 연속이다. 끝내 일을 찾지 못하고 무너져 울던 하담을 발견하는 이가 있다. 이번에는 남자다. 그는 포구에서 횟집을 운영하는데 하담을 데려다 직원으로 쓰겠다 한다. 손님이 다 빠진 밤 시간대에 와서 상을 치우고 설거지를 하란 것이다. 하담에겐 거절할 수 없는 제안이다. 그런데 일해도 일해도 돈을 주지 않는다. 내일 다시 와, 그렇게만 말할 뿐이다.
▲스틸 플라워스틸컷
인디스토리
어떤 세상의 일면
<스틸 플라워>는 기댈 곳 없는 이에게 손 내밀지 않는 세상을 보이는 한편으로, 꼭 그런 이에게 더욱 가혹하게 대하는 사람들 또한 내보인다. 전작 <들꽃>에서 아이들에게 말 건 여자는 저 스스로도 험한 삶을 살고 있는 게 분명해 보이는 이였다. 어쩌면 이 아이들과 같은 길을 걸었을 수 있는 그녀가 기댈 곳 없는 아이들을 먹잇감 삼아 오늘을 나려는 짐승 같이 굴었다.
<스틸 플라워> 또한 마찬가지다. 전단 돌리는 여자의 삶이 딱히 나아 보이지 않음은 명백하다. 횟집 사장은 그래도 기댈 언덕은 있는 이일 테지만, 그조차 아이로부터 챙길 이득만을 바라본다. 관심 없는 다수 너머에 나쁜 이들이 있고, 또 그 곁에는 비겁한 사람들만 가득해 보인다.
<스틸 플라워>의 목적이 무엇일까. 현실을 재현하거나 희망을 부각하는 건 아니었을 테다. 영화는 분명히 세상의 어떤 단면을 그린다. 그는 실재하는 무엇의 단면일 수 있겠으나, 감독에 의해 취사선택돼 영화 안에 구현된 모습이라 하는 게 더욱 적확하겠다. 세상엔 하담과 같은 이를 돌보고 곁을 내주는 이도 얼마든지 있다. 그러니 영화가 있는 그대로 세상의 반영이라고는 바라볼 수는 없는 일이다.
▲스틸 플라워포스터인디스토리
인간이 인간답게 살기 위해서는
기댈 곳 없는 이에게 더욱 가혹한 상황을 마련하고 그 가운데 하담을 들여 고난을 겪는 모습을 지켜보는 것이 어떤 효과를 불러일으킬까. 전편과 마찬가지로 불안하게 흔들리는 카메라는 있는 그대로 들에 핀 꽃의 위태로움을 보이는 데 성공한다. 그러나 그 너머에 있는, 영화가 향하는 지점이 어디인지는 명확하게 확인하기 어렵다.
춤, 영화 가운데 하담에게 춤에 대한 갈망이 있단 점은 흥미로운 대목이다. 하담은 어느 댄스 교습실에서 나오는 음악과 문 너머 엿보이는 수강생들의 춤에 끌려 자주 그 장소를 찾는다. 어느 순간마다 춤사위라 할 만한 동작을 인상적으로 펼치기도 한다. 춤은 그녀에게 해방구가 될까, 꿈으로서 존재할까, 그저 표현인가 갈고닦아나갈 기술이며 예술일까. 그 사이 어느 지점에 하담의 춤이 있겠으나 그마저도 그녀의 상황을 씻어내리거나 구원하지 못한단 건 의미 있는 대목이다. 해방이라기보단 잠시 잠깐의 일탈, 변화하지 않는 상황의 암울함을 더욱 짙게 하는 장치로 와서 닿는다.
어찌 됐든 영화 속 고난 가운데 하담은 흔들린다. 그 흔들림의 끝에서도 어찌 됐든 살아는 있다. 그녀가 수족관에서 훔친 물고기로 제 배를 채우는 대신 바다에 던져 풀어주는 장면은 꽤나 의미심장하다. 제 삶을 위하는 걸 넘어 다른 누구의 구함에 다가서는 그 행위엔 대체 무엇이 담겨 있는 것일까. 생존과는 상관없는 춤을 추고, 배고픔과는 관련 없는 구함을 이루며 하담은 여전히 꽃으로 피어 흔들린다. 그저 살아가는 것 이상의 삶을 추구하는 인간으로 그렇게 살아가고자 한다. <스틸 플라워>가 그린 하담의 삶으로부터 인간이 인간답게 살기 위해 필요한 것을 살피게 되는 건 이와 같은 설정, 또 선택 때문일 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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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영화평론가.서평가.기자.3급항해사 / '자주 부끄럽고 가끔 행복했습니다' 저자 / 진지한 글 써봐야 알아보는 이 없으니 영화와 책 얘기나 실컷 해보련다. / 인스타 @blly_kim / GV, 강의, 기고청탁은 goldstarsky@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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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댈 곳 없는 소녀에게 세상은 얼마나 가혹했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