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살사별자 애도 그린 연극, 대학로가 주목하는 작가의 등장

이경헌 작가의 '자살사별자 3부작' 중 두 번째 작품 '감정연습'

감정 연습 포스터 감정 연습 포스터
감정 연습 포스터감정 연습 포스터극단 LAS

대학로가 주목하는 극작가, '글의 힘'으로 무대를 채우다

최근 대학로 연극계에 단연 눈에 띄는 이름이 있다면, 백상예술대상 후보로 지명되었던 <서재 결혼시키기>와 이번 <감정 연습>을 집필한 이경헌 작가일 것이다. 좋은 글을 쓰는 문인은 많지만, 그 글이 무대 위에서 살아 움직이는 '희곡'의 형태로 관객과 온전히 호흡하기란 결코 쉽지 않다. 한국 연극계에서 독창적인 희곡 개발과 극작가에 대한 주목이 다소 아쉬웠던 만큼, 이경헌이라는 극작가의 등장은 무척 반가운 징조다.

극단 LAS가 선보인 연극 <감정 연습>은 전작 <서재 결혼시키기>와 마찬가지로 대본의 매력이 극대화된 작품이다. 텍스트 자체가 가진 힘이 워낙 강력해, 인물들이 뱉어내는 대사 하나하나가 관객의 마음에 깊숙이 와닿는다.

이번 작품은 이 작가가 선보이는 '자살사별자 3부작' 중 두 번째 파트다. 전작과 마찬가지로 '갑작스러운 아내의 자살로 상심에 빠진 성주'와 '생애 마지막 독서 동아리를 완성하려는 여작'의 이야기를 다루며 같은 사건을 공유한다. 그러나 반드시 전작을 봐야만 이해할 수 있는 구조는 아니다. 오히려 독립된 하나의 작품으로 마주하되, 두 작품을 연결해 볼 때 자살사별자가 느끼는 감정의 깊이가 한층 더 입체적으로 다가오는 묘미가 있다.

성인 남성 둘이 주고받는 160분, 대사와 여백이 만든 몰입감

<감정 연습>은 드라마 연극의 정수를 보여준다. 인물들의 내면에 현미경을 들이대듯 깊게 집중하며, 길게 이어지는 서사의 호흡을 교과서적으로 완벽하게 끌고 간다. 단 두 명의 배우가 퇴장 없이 160분이라는 긴 러닝타임을 가득 채우는 것은 창작자에게도, 연기자에게도 커다란 도전이다. 자칫 관객의 집중력이 흐려지거나 시간의 압박을 느끼기 쉬운 조건이다. 그럼에도 이 작품은 무서운 몰입감을 선사한다. 성인 남성 두 명이 주고받는 대화 속에 무거운 삶의 사유가 촘촘히 박혀있기 때문이다. 무라카미 하루키에 대한 고찰부터 죽은 아내 '해원'에 대한 기억, 사소한 커피 취향, 그리고 죽음 이후의 삶에 대한 치열한 논쟁은 관객으로 하여금 끊임없이 질문을 던지게 만든다.

특히 연극의 첫 장면은 연출적 실수가 아닌가 싶을 정도로 긴 호흡의 정적으로 시작된다. 아내를 잃고 멈춰버린 성주의 답답한 심경을 대변하듯, 극장은 조용히 숨을 죽인다. 암전의 활용이나 두 배우 사이의 긴 침묵 등 극 곳곳에 배치된 여백들은 성주의 고통을 시각적, 감각적으로 전달한다. 때로는 그 호흡이 답답하게 다가오기도 하지만, 이미 인물의 서사에 깊이 동화된 관객에게는 그조차 안타깝고 먹먹한 위로의 시간으로 치환된다.

"왜 죽었을까"와 "어떻게 기억할까"... 애도하는 방식의 차이

극 중 '여작'은 끊임없이 성주에게 해원의 이야기를 꺼내며 그를 자극한다. 남겨진 이에게 자살한 아내를 언급하는 모습은 언뜻 무심하고 잔인해 보이기까지 한다. 하지만 여작은 먼발치에서 성주의 무너진 삶을 관찰해 온 인물이며, 성주에게 해원의 진짜 이야기를 들려주고 싶어 한다.

성주는 상처를 회피하려 하지만 결국 여작의 입을 통해 해원의 조각들을 마주한다. 그러나 여작이 전한 해원의 모습은 지극히 일상적인 이야기뿐이다. 죽음의 명확한 '이유'를 기대했던 성주는 격분하지만, 여작이 숨겨둔 진심은 다른 데 있었다. 그저 슬프다면 슬픔을 온전히 인정하고, 꽁꽁 싸맨 아픔을 밖으로 덜어내기를 바란 것이다. 결국 성주는 여작을 이해하게 되고, 그와도 담담하고 건조한 이별을 맞이한다.

두 인물은 한 사람의 죽음을 전혀 다른 방식으로 애도한다. 자신을 배신했다며 원망하면서도 아내의 죽음을 필사적으로 이해하고 싶어 하는 성주, 그리고 그녀가 잊히지 않도록 존재를 계속해서 말해주는 여작. 작품은 이들의 대비를 통해 '남겨진 자의 애도'에 대해 깊은 화두를 던진다. 어쩌면 절대 해결할 수 없는 의문을 평생 품고 살아야 하는 사별자가 할 수 있는 최선과, 그를 곁에서 지켜보는 이가 건넬 수 있는 가장 속 깊은 위로의 방식을 보여주는 듯하다.

사각의 어둠을 깨고 보존서고 밖으로 나갈 우리들에게

오늘날 자살률은 여전히 증가하고 있으며, 그 뒤에 남겨진 자살사별자들의 수 역시 늘어가고 있다. 죽음의 이유를 알지 못한 채 평생을 죄책감과 부채감 속에서 살아가는 이들이 또 다른 극단적 선택을 하지 않기를 바라는 창작자의 시선이 대본 전반에 따뜻하게 흐른다. 극의 마지막까지 해원이 왜 죽었는지는 밝혀지지 않는다. 여작의 삶 역시 끝을 향해 가고, 성주는 다시 홀로 남겨진다. 그럼에도 연극의 끝에서 성주는 마침내 어둡고 사각진 보존서고의 문을 열고 밖으로 나간다. 캄캄한 공간에서 멍하니 과거에 갇혀 지내던 그가 비로소 세상 밖으로 나갈 준비가 되었음을 보여주는 뭉클한 엔딩이다.

공연 중 방대한 대사량으로 인해 배우들이 간혹 대사를 매끄럽게 처리하지 못하는 아쉬운 순간들이 스치기도 했다. 2인극이 가진 무게감을 고려하면 충분히 참작 가능한 범위지만, 텍스트의 정교함이 워낙 훌륭한 작품이기에 옥에 티로 남는다. 그럼에도 전체적인 몰입도를 방해할 수준은 아니다. 상처를 대면하는 대담한 시선과 연극적 사유가 빛나는 <감정 연습>은 오는 17일을 끝으로 대학로에서 막을 내렸다. 자살사별자라는 무거운 주제를 이토록 사려 깊게 안아주는 대본과 무대를 만나는 것은 흔치 않은 경험이다.

앞으로 극단 LAS와 이경헌 작가가 걸어갈 창작의 궤적이 더욱 기대되는 이유다.

<감정 연습> / 작 이경헌 / 연출 신명민 / 제작 창작집단 LAS /서울연극 창작센터 서울씨어터 2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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