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대 여성은 왜 남태령으로 갔나, 전대미문 시위의 탄생

[독립예술영화 개봉신상 리뷰] <남태령>

서울 서초구 방배동 남태령 고개는 조선 시대부터 한양 남쪽 출입구로 현재도 서울과 과천을 연결하는 주요 도로라 24시간 교통체증에 시달리는 곳이다.

하지만 이곳이 전국적으로 유명해진 건 2024년 12월의 전국농민회총연맹(이하 '전농') 트랙터 행진. 이른바 '남태령 대첩' 이후다. <어른 김장하>를 연출한 MBC경남 김현지 PD의 <남태령>은 바로 남태령 대첩에 관한 종합 아카이브 기록이다.

21세기 '우금치', 28시간 후 승리의 서사

 <남태령> 스틸
<남태령> 스틸㈜시네마 달

 <남태령> 스틸
<남태령> 스틸㈜시네마 달

2024년 12월 16일, 12.3 계엄 심판과 윤석열 정권 농정 실패를 알리기 위해 전국농민회총연맹(이하 '전농') '전봉준투쟁단'이 전남 무안과 경남 진주에서 트랙터로 출발해 한남동 대통령 관저까지 행진을 예고했다. 평화 시위로 진행되며 서울 초입 남태령에 닿은 21일 정오부터 경찰 봉쇄가 시작됐다. 전농은 SNS에 상황을 알리고 지지와 연대를 호소했다. 물론 상대적으로 생소한 농민 투쟁에 달려올 것이란 기대보단 막연한 홍보에 가까웠다.

하지만 12.3 계엄으로 촉발된 새로운 '광장'이 예전과 꽤 다른 양상을 보인 것처럼 오랜 세월 대정부 투쟁에 이골이 난 농민 활동가들의 선입견을 초월하는 상황이 벌어졌다. 광화문과 여의도 광장에 참여하던 이들이 X(구 트위터)나 유튜브에 올라온 현장 속보를 확인한 후 자석에 끌리듯 대거 모인 것. 경찰 의도대로 차량 통행량은 많지만, 인적 드문 남태령 주변에서 포위 고립될 운명에 처한 투쟁단에겐 천군만마나 다름없는 구원의 손길이었다.

그러나 하필 이날은 1년 중 가장 밤이 길다는 동짓날이었다. 밤이 되자 체감 날씨는 영하 10도 이하로 떨어진다. 말 그대로 엄동설한에 막차 시간이 다가왔다. 중과부적으로 끝날 예감이 들 만했다. 그런데 연대하러 온 '동지'들이 집에 갈 생각을 하지 않았다. 멀리 지방에서 상경한 이들은 예약한 차편을 취소하고, 퇴근 후 소식을 듣고 개별적으로 도착하는 이들이 속속 당도했다. 단단한 경찰 차벽에 봉쇄된 투쟁 현장으로 향하기 위해 온갖 지략이 발휘됐다.

몸은 갈 수 없어도 마음이나마 보태고자 후원 물품이 속속 당도했다. 현장에 참여한 이들은 물론 온라인 라이브로 상황을 살피던 이들은 1인 미디어가 되어 정부와 보수언론의 왜곡에 대항하는 손가락 투쟁을 감행했다. 2만 명 이상 실시간 접속해 속보를 공유하고 주변에 퍼 날랐다. 전대미문 새로운 시위가 이 순간 탄생했다. 영화는 단순 내용 서술에 그치지 않고 화면 구성과 인터뷰 대상 각각에 개성을 부여해 내용의 풍성함을 고스란히 시각화했다.

21세기 정보화 시대 & 조직과 단체가 아닌 자발적 개인의 주체화가 어우러진 남태령 현장은 28시간 대치 끝에 경찰이 차선을 열며 '대첩'으로 기록됐다. 진압 경찰에 의해 트랙터가 파손되거나, 주변 차량 진입을 가로막아 아찔한 상황이 속출했음에도 다행히 큰 인명사고는 없었다. 언론은 남태령을 대서특필했고, 12.3 계엄으로 촉발된 탄핵 광장과 무수한 시위를 상징하는 기념비로 남았다. 영화는 그날의 긴박한 상황, 경이로운 연대의 풍경을 온전히 압축했다.

남태령에 모여든 이들은 대체 누구인가?

 <남태령> 스틸
<남태령> 스틸㈜시네마 달

여기까지면 역사의 극적 현장을 충실히 담은 기록영화의 정석적 형태다. 누구나 영화를 보기 전 예측 가능한 범위이기도 하다. 그러나 제작진은 남태령 대첩의 승전보에 도취하기보단, 전대미문의 사건이 어떻게 구성되는지 심층에 다가설 것을 결심한다. 시위와 사회운동 참여 좀 해봤다는 기성세대의 고정관념으론 도무지 예측할 수 없던 일이 일어났기 때문이다. 물론 '다시 만난 세계'가 민중가요로 변신하는 시절이라지만 남태령은 그걸 감안해도 많이 나갔다.

감독은 수소문에 나섰다. 열심히 자료를 취합하고 조사해보니 낯선 이름들이 쏟아졌다. 남태령 관련 검색하면 숱하게 노출되지만, 예전엔 들어본 적 없던 이들이다. 마치 거대한 비밀에 다가가기 위해 차례로 단계를 밟듯이, 카메라는 어렵게 찾아낸 미지의 주역들을 찾았다. 그들이 들려주는 증언과 회고는 제작진과 마찬가지로 의아함을 품던 관객에게 남태령 대첩의 전모를 생생하게 들려주기 시작했다. 선입견은 일순간에 무너지고 경이로움이 밀려들었다.

그나마 과수원에서 만난 10년차 여성 농민은 이해하기 어렵지 않다. 현장에서 휴대전화로 실황 중계를 하다 보니 공식 채널이 되어버린 '향연'은 길고 긴 혹한의 밤을 회고하며, 물리적 고난을 연대의 힘으로 어떻게 돌파할 수 있었는지 가이드처럼 해설했다. 전국 각지는 물론, 해외 동포까지 십시일반 보탠 음식과 난방용품, 심지어 임시 피난소 역할의 '난방 버스'까지 속속 당도하던 감격을 마치 방금 일인 듯 증언하는 표정을 보고 있자면 저절로 뭉클해졌다.

남태령을 주목하는 건, 가장 '올드타입' 운동권이라 할 전농 투쟁에 일면식 없는 20대 여성이 주력이었다는 점. 영화 역시 해당 지점을 주요하게 분석했다. 농업 문제에 관해 접할 일 없던, 되려 농민들의 투쟁을 시대착오적이라거나 집단이기주의 치부하기 일쑤던 그들의 변화와 참여는 어떻게 가능했을까? 그것도 어떤 조직적 연계나 유명인의 호소도 없이 말이다. 개인주의와 SNS에 중독된 걸로 취급받던 이들은 어떻게 투쟁의 주체로 변신했는가? 영화는 기존의 '승리한 투쟁'을 기록한 작업 가운데 독자적 영역으로 돌출하기 시작했다.

소외되고 고통받는 이들의 연대에 주목하다

 <남태령> 스틸
<남태령> 스틸㈜시네마 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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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태령> 스틸㈜시네마 달

1987년 6월 항쟁 역시 그랬다. 학생과 노동, 빈민, 농민운동이 가혹한 탄압에 시달리며 맹아를 형성한 덕분에 가능했던 투쟁인데도 직선제 요구 위주로만 흐르며 연속된 노동자 대투쟁 등과는 자연스레 분리된다. 2016 ~ 2017년 박근혜 탄핵 광장에선 예전과 달리 다양한 부문과 계층의 요구가 분출했으나 곳곳에서 구호가 충돌하거나 기존 사회운동 단체의 깃발에 대한 반감이 표출되며 진통을 겪기도 했었다.

그러나 2024 ~ 2025년의 광장은 제법 달랐다. 이미 윤석열 정권 3년의 실정이 극단적 지지자 집단을 제외하면 넌더리가 날 지경으로 각계 각층을 실망케 한 탓도 있지만, 광장의 시위가 기성 정당과 조직에 의해 통제되기보단, 자율적으로 판단하고 행동하는 개별 시민과 다양한 미디어와 경로를 통한 쌍방향 소통에 힘입어 순식간에 생성되는 쪽으로 중심 이동이 이뤄진 측면이 크다. 남태령은 새로운 변화의 상징이다.

남태령에 모인 이들의 증언은 이를 구체화한다. 광장의 상징으로 떠오른 '아이돌 응원봉'을 손에 쥐고 '키세스'란 애칭이 붙게 된 계기인 은박 담요를 두른 채 겨울 밤을 샌 이들은 20대 여성과 성 소수자가 다수를 이뤘다. 물론 시민사회단체와 진보정당 활동가들도 있었다. 서로 거리감을 느끼던 다양한 연령대와 활동 반경의 사람들이 '동지'로 호칭하며 뜻밖의 만남을 잇는다. 다른 데서 만났다면 피하거나 날 선 공방이 오갈 법한데 남태령에선 좀 달랐던 것.

더 낮게, 더 아래로, 등잔 밑까지 빛이 있으라

 <남태령> 스틸
<남태령> 스틸㈜시네마 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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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장을 무지개 빛깔로 물들인 주역들은 남태령만 집중한 게 아니다. 기존 단체와 별 인연이 없던 분절된 개인이 사회적 연대의 맛을 보자 '말벌 동지'로 진화했다. 이들은 농민의 고통을 체감하자 각지의 외로운 투쟁 현장을 찾아 나섰다. 고립된 '섬'과 '섬'을 잇는 네트워크가 생성됐다. 전통적 민중 투쟁과 '광장'에 모인 '일반 시민'이 상호 대립적으로 사고되던 것과 비교하면 코페르니쿠스적 변화가 일어난 셈이다. 집단지성이란 이런 걸까?

페미니즘에 거부감을 느끼던 늙은 농민과 '논바이너리, 젠더 퀴어' 성 소수자가 서로를 이해하려는 첫걸음을 옮겼다. 세종호텔, 구미 옵티칼 하이테크, '거·통·고(거제-통영-고성)' 조선하청, 대구 태경산업 노동자들의 외로운 투쟁에 평소와 달리 낯선 이들이 우루루 모였다. 투쟁에 지친 노동자들은 뜻밖의 손님들을 반기며 감격에 겹다. 그저 집회 머릿수 채우기 한숨 돌리는 게 아니라 쌍방의 변화를 촉진하는 '진화' 과정이다.

이런 시야는 제작진이 서울의 광장과 동떨어진 사각, 보수 아성이라 욕먹는 영남권 지역 방송사에서 수십 년간 활동한 애환 덕이다. 다들 서울 큰 집회에 주목할 때, 화려하지도 많이 모이지 않아도 각자 역할을 해내며 꿋꿋하게 지역과 부문을 지키는 이들만이 공감할 수 있는 대목이다. 다양한 이들의 목소리가 공존하며 교차하는 '광장(들)'이 화면에 구현됐다. 오프라인뿐 아니라 트위터에 형성되던 온라인 공간 역시 또 하나의 '광장'으로 화면에 새겨진다.

광장에 모인 수많은 촛불이 품은 변화의 열망은 울퉁불퉁할 수밖에 없다. 이 다양성을 대패질해 누구나 동의하는 최소치로 관철하는 게 그간 사회운동 법칙이라면, 이제 더 낮게, 더 아래로 시선을 돌려 소외된 약자들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는 게 미래의 운동일 테다. <남태령>은 그런 시대정신을 최대한 온전히 압축하는 데 성공한 건 물론, 영화를 보게 될 이에게 광장의 기억에서 반드시 간직하고 성찰해야 할 주제를 전하는 간절한 메아리로 손색없는 결정체다.

<작품정보>

남태령
The Longest Night: Namtaeryeong
2026|한국|디지털 아카이브 다큐멘터리
2026.05.20. 개봉|114분|12세 관람가
감독 김현지
출연 김후주(향연), 내향인 깃발 기수, 전주환, 황승유(유기체 아저씨),
에스텔 외 광장을 메운 트위터리안과 동지들
제작 MBC경남
배급 ㈜시네마 달

2026 27회 전주국제영화제 폐막작
남태령 김현지감독 MBC경남 트위터리안 전봉준투쟁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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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사회복지영화제 프로그래머. 돈은 안되지만 즐거울 것 같거나 어쩌면 해야할 것 같은 일들을 이것저것 궁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