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0년 나비 기록한 노학자가 발견한 충격적 진실

[김성호의 씨네만세 1344] 27회 전주국제영화제 '월드시네마' <돌과 나비의 여정>

아는 만큼 보인다. 이 말이 참이라면 대우 또한 참이다. 보이지 않으면 알지 못한다는 것이다. 스스로 알지 못한다는 사실을 반길 이가 없다. 아는 만큼 보인다는 말을 불편해하는 사람이 많은 이유다. 그럼에도 이를 이야기할 밖에 없는 것은, 세상엔 분명히 아는 만큼 보이는 것이 있고, 대부분에게 보이지 않는다고 밀어놓기엔 너무나 가치 있는 것이 또한 있는 때문이다. 27회 전주국제영화제 월드시네마 섹션 상영작 <돌과 나비의 여정>이 꼭 그렇다.

카를리스 베르그스의 87분짜리 장편 다큐멘터리다. 50년이 넘는 학문의 길을 정리하며 은퇴를 눈앞에 둔 곤충학자 아서 M. 샤피로(아트)를 주인공 삼아 그의 일상을 담담히 기록한다. 몸 곳곳에서 심각한 고장의 징후가 나타난다. 스스로 제 삶이 얼마 남지 않았음을 아는 그다. 카테터를 삽입하는 치료를 거부하고 때가 되면 죽겠다 결심한 아트다. 그는 지난 수십 년을 이어온 일을 앞으로도 지속할 셈이다. 제가 사는 곳, 캘리포니아의 계곡과 산맥의 연구지를 따라 걸으며 나비와 온갖 식물들을 기록한다. 그 기록들이 모여 데이터가 된다.

카메라는 아트의 일상을 가만히 뒤따른다. 늙은 몸으로 들판을 천천히 걷는 그 모습은 여느 노인네의 산책과 다르지 않다. 다른 점이라면 작은 메모지 한 장을 손에 쥐고 나비를 볼 때마다 무얼 적는단 것일까. 가끔 특별한, 그러나 내 눈에는 그냥 푸른 잡초일 뿐인 것을 보면 조금 뜯어 봉투에 담고 무엇을 적기도 한다. 나비가 아닌 다른 곤충 가운데서도 관심이 가는 것이 생기면 멈추어 서 들여다본다. 그렇게 시골 언덕과 숲길을 한 바퀴 둘러 다시 집으로 돌아오는 여정을 기록하고 또 기록한다. 특별할 것 얼마 없는 일상이다.

돌과 나비의 여정 스틸컷
돌과 나비의 여정스틸컷전주국제영화제

그래서, "삶의 목적이 뭔데?"

이따금 그 아내의 인터뷰, 또 아트가 UC 데이비스 생물학과에 출강해 강의를 하고 관심이 가는 행사에 참석하는 모습도 담긴다. 중간 중간 누구와 주고받는 메일들이 화면 가운데 떠오르기도 한다. 다방면에 관심 깊은 소양을 드러내는 인용구며 문장들이 빼곡하다. 글 가운데 이런 대목이 나온다. 일 년에 한 번, 혹은 그보다도 잘 보지 않던 아버지와의 이야기다. 노년이 된 아버지가 중년의 학자였던 아트에게 "삶의 목적이 뭐냐"고 물었다고 했다. 아트는 거의 교류가 없던, 심지어 노년에 이르러서 삶의 지혜가 더해졌을 그가 제게 묻는 질문의 의도를 이해할 수 없었다. 아버지가 아트에게 말하기를 '마흔 즈음엔 삶의 목적이 분명했는데, 이제는 전혀 알지 못하겠다'고 하였다고. 어느덧 제가 답할 수 없던 물음을 묻던 아버지의 나이가 된 아트다. 그는 그날도 펜과 메모지를 챙겨 들로 숲으로 나간다.

아트는 슬로우 사이언스의 권위자다. 다윈이 일찍이 발견했듯 자연의 변이는 분명하다. 그러나 인간의 감각으로는 인식할 수 없을 만큼 느리다. 느린 변화는 변화하지 않는 것과 같다고, 우리 인간은 인식한다. 50년짜리, 100년짜리의 변화는 1000년과 1만년을 기준으로 하면 분명히 포착되지만 그보다 짧은 기준점으로는 도무지 잡아낼 수 없다. 인간은 1000년과 1만년보다는 초, 분 단위에 더욱 민감하다. 이 표현조차 민망한 것은, 1000년과 1만년의 단위는 아예 감각하지도 못하는 때문이겠다. 우리는 제 정원을 화사하게 물들이는 계절의 변화조차도 확연한 변화를 인지한 순간에야 뒤늦게 인식한다. 꽃이 피고, 낙엽이 지기 전의 변화를 매 순간 감각하지 못하는 것이다. 하물며 년, 그것도 수십 년의 변화야 어떻게 알겠는가.

슬로우 사이언스는 현대 과학의 실패를 보완하는 방편으로 보다 긴 단위의 연구가 필요하다고 말한다. 아주 오랜 호흡을 두어야만 확인할 수 있는 경향과 패턴이 존재한다는 발상이다. 아트는 50년가량 열 개의 고정된 길을 따라 걸으며 발견한 모든 나비를 분류하고 기록했다. 그 길에 익숙한 이들조차도 알아보지 못하는 분명한 변화가 있다는 사실을 그의 기록이 확인한다. 아주 많은 나비가 사라졌다. 한때는 수십, 수백 마리를 발견할 수 있던 길에서 이제는 단 한 마리도 볼 수 없게 되었다. 어느 시기엔 무려 17종의 나비 개체수가 한꺼번에 급감하기도 했다. 동일한 것처럼 보이는 자연에서 종들이 사라진다. 인간의 눈엔 매년 비슷하게 보이는 자연이 인간의 인지 너머에서 급속하게 변화하고 있는 것이다. 그저 변화만이 아니다. 위기의 징후로 읽어 마땅한 단서가 수두룩하다.

돌과 나비의 여정 스틸컷
돌과 나비의 여정스틸컷전주국제영화제

이 노학자가 나비 표본을 모으는 까닭

아트의 연구가 새로운 건 아니다. 오늘 첨단 생물학의 경향과는 상당히 떨어져 있는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생물학 초기의 모습과는 제법 닮아 있다. 한때 생물학은 인류 지성의 최전선에 자리한 세련된 학문이었다. 오늘의 IT기술과 물리학이 그러하듯이 지식인을 자처하는 이라면 누구도 첨단 생물학적 발견과 지식을 따라잡아야 한다는 열망이 공공연했다. 대항해시대가 막을 내리고 인도를 넘어 동양, 또 아메리카 대륙과 아프리카 대륙, 호주를 포함한 신대륙 개척이 한창 진행되던 18세기부터의 이야기다.

당대 지식인이라면 누구나 박제며 도감 만들기에 열을 올렸다. 당대 귀족과 지식인 사이에선 동식물을 채집하고 박제해 분류하고 전시하는 것이 추앙받는 취미였다. 돈과 시간, 그리고 열정만 있다면 누구나 초기 생물학의 주요 분류인 박물학자가 될 수 있었다. 빅토리아 시대로 대표되는 식민지 기반 유럽 제국주의의 부가 그를 가능케 했다. 각지에서 들여온 진귀한 생물들에 더해 일상에서 채집한 동식물을 분류하고 기록하며 전시하는 것이 과학의 최전선을 이루었다. 그들에게 주변 자연은 곧 학문의 최전선이었다. 현장이었다. 오늘 아트에게 그렇듯이.

칼 폰 린네란 걸출한 학자의 등장은 모든 생명에 제 자리가 있다는 믿음을 확고히 해주었다. 그가 창안한 이명법은 속명 다음에 종명을 적는 기준을 확립해 생물의 계통적 표준이 됐다. '계·문·강·목·과·속·종'으로 분류하는 기준 또한 오늘까지 이어져 온다. 모든 생명엔 제 자리가 있고, 신의 손길로 태어난 모든 생명의 자리를 찾아주는 것이 곧 세계의 진면모를 이해하는 것이란 믿음이 박물학, 나아가 초기 분류학 아래 깔려 있다.

돌과 나비의 여정 스틸컷
돌과 나비의 여정스틸컷전주국제영화제

왜 인간은 진행 중인 대멸종을 보지 못하나

이후 찰스 다윈의 탁월한 발견과 혁명적 착상, 집요한 연구가 있었다. 신의 창조가 아닌 종의 변이가 확고한 경계를 느리지만 분명하게 넘어서고 있음을 알렸다. 종의 기원을 찾는 데는 실패했으나 생명에 대한 이해는 나날이 깊어지던 시절이었다. 모든 지혜로운 이가 제 주변을 열심히 돌아봤고 전보다 훨씬 더 폭넓은 이해로써 자연과 교감했다. 그리고 오늘에 이르러서 우리는 그 지혜를 하나하나 거의 모두 잃었음을 확인한다. 다윈 이후 생물학은 수리분류학, 분자생물학, 분기학 등으로 진화하고 발전한다. 그러나 그 과학의 진보는 대중과 괴리됐고, 그 사이 평범한 인간이 자연을 이해하는 폭은 과거와 비할 바 없이 좁아들었다. 수많은 나비가, 메뚜기가, 파리가, 풀들이 사라진 자리를 알아보는 이가 드물다. 아트가 발견하는 것이 바로 그것이다.

오늘의 생물학은 지구에 6번째 대멸종이 진행 중임을 확인한다. 마지막 빙하기가 끝나고 오늘에 이르는 홀로세(Holocene extinction)에서 인간 등장 이전보다 무려 1000배 정도의 생물종 멸종이 이어지고 있다는 연구가 잇따른다. 앞서 공룡이 사라진 백악기나 지구 역사상 최악의 멸종기였던 페름기 대멸종을 훨씬 상회하는 양과 속도로 대멸종이 이뤄지고 있다는 분석이다. 주범이 인류로 지목되는 가운데, 과학은 명징하게 드러나는 현상을 충실히 파악하는 데도 어려움을 겪고 있다. 슬로우 사이언스가 대두된 게 이로부터다.

<돌과 나비의 여정>은 위의 과학적 맥락과 현상을 충실히 소개하지 않는다. 다만 아트의 일상을 보이고, 그의 입을 빌려 상당히 많은 나비가 사라졌단 사실을 들려줄 뿐이다. 아트가 은퇴한 교수들이 내놓은 중고책을 살피고, 동료 교수들과 거리를 두는 삶을 영위하고, 53년에 이르는 교수직을 내려놓기까지의 시간을 가만히 살핀다. 건강 문제가 분명해지자 찾아오겠다는 아들의 방문을 구태여 만류하며 그럴 필요가 없다 알리는 대목 또한 인상적이다. 아버지와도 그런 관계를 맺었던 아트는 주변 사람들과의 관계에서도 딱히 열정적이지도 불편하지도 않은 선선한 거리를 유지한다. 생의 연장, 교수직이며 명예의 획득, 사랑과 우정 같은 인간적 고리들에 집착 않고서 매일 같은 길을 걷고 마주한 나비를 기록하는 삶이 어딘지 구도적이다.

전주국제영화제 포스터
전주국제영화제포스터전주국제영화제

바위는 통곡하는데, 인간은 듣지 않는다

원제는 'Weeping Rocks', 직역하자면 '우는 바위들'이 되겠다. 연구지를 걷던 그가 물이 흘러내리는 바위를 가리키며 말해준 이름이다. 흐르는 물이 눈물이 되고 마음 없는 바위가 그 눈물을 흘린다. 아트의 연구가 가리키는 심각한 이야기, 평온한 일상으로 대항하는 절멸에의 위기가 이 짧은 제목 안에 담겼다. 나는 차라리 울음 대신 통곡이라고, '통곡하는 바위들'이라 적고 싶다.

다이렉트시네마, 개입하지 않고 관찰하며 진의를 드러내는 다큐의 오랜 방법론을 상당부분 차용한 영화다. 극적 서사를 갖지 못한 다이렉트시네마의 흔한 결점, 나열적이고 산만하며 힘이 없다는 인상이 영화 가운데 두드러진다. 그리하여 생물학의 변천사와 슬로우 사이언스가 현대 과학에서 갖는 위치, 또 홀로세 대멸종과 그에 대응하는 데 실패한 현대과학의 이야기를 알지 못하면 그저 은퇴를 앞둔 노교수가 한가롭게 나비를 좇아 기록하는 과학 최전선에서 좀 떨어진 이야기처럼 읽힐 수가 있겠다.

그러나 그 성겨 보이는 요소들을 가만히 뜯어보자면 대멸종과 자연의 위기, 인류와 과학의 실패, 그에 대항하려는 흔치 않은 인간의 자세까지를 정밀하게 묶어내는 작가의 의도를 발견할 수 있다. 인간의 부족한 지각이 실재하는 자연의 변화를 포착하는 데 실패했듯, 관객의 비좁은 이해 또한 영화가 끌어올린 풍요로운 그물을 성기게만 바라보게 하는 것이다. 이 영화가 세상과 인물을 비추고 드러내는 방식이 꼭 이러해서 나는 일순 예기치 않은 경이로움을 마주했다.
덧붙이는 글 김성호 평론가의 브런치(https://brunch.co.kr/@goldstarsky)에도 함께 실립니다. '김성호의 씨네만세'를 검색하면 더 많은 글을 만날 수 있습니다. goldstarsky@naver.com
전주국제영화제 JIFF 돌과나비의여정 카를리스베르그스 김성호의씨네만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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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영화평론가.서평가.기자.3급항해사 / '자주 부끄럽고 가끔 행복했습니다' 저자 / 진지한 글 써봐야 알아보는 이 없으니 영화와 책 얘기나 실컷 해보련다. / 인스타 @blly_kim / GV, 강의, 기고청탁은 goldstarsky@naver.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