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한국 사회에서는 뉴스보다 소문이 빠르다는 말을 실감한다. 선거를 앞둔 정치권만의 이야기가 아니다. 문화예술계도 예외는 아니다. 국립 주요 예술기관의 기관장 인사 소식은 공식 발표보다 먼저 온라인을 달군다. 한국예술종합학교 이전 이슈도 그렇다. 누가 온다더라. 이미 정해졌다더라. 확인되지 않은 말들이 먼저 달리고, 사람들의 표정은 그 말에 맞춰 먼저 바뀐다. 말 한마디가 공문보다 빠르게 사람을 움직인다. 누군가는 줄을 서고, 누군가는 침묵하고, 누군가는 분노하며, 누군가는 체념한다. 권력은 늘 실체보다 먼저 도착한다. 이름보다 소문으로, 발표보다 공포로 먼저 온다. 그때 무대 위에서도 같은 말이 들린다.
"감찰관이 온다."
사다리움직임연구소의 연극 <감찰관>은 바로 그 한마디에서 시작된다. 그런데 아직 감찰관은 오지 않았다. 누구인지도 모른다. 감찰관인지 아닌지도 확인되지 않았다. 하지만 마을은 이미 무너진다. 사람들은 허둥대고, 숨기고, 꾸미고, 서로의 눈치를 본다. 니콜라이 고골(1809~1852)의 1836년 희극은 오늘 다시 묻는다.
"우리를 흔드는 것은 실제 권력인가, 아니면 권력을 둘러싼 공포와 소문인가."
<감찰관>은 지난 4월 29일부터 5월 5일까지 서울 아르코예술극장 대극장에서 공연됐다. 한 지방 도시의 우스꽝스러운 착각극처럼 보이지만, 무대가 끝내 관객에게 남기는 질문은 훨씬 크다. 권력 앞에서 사람은 얼마나 빨리 자세를 바꾸는가. 들킬 것이 있는 사람은 왜 아직 오지도 않은 감찰관 앞에서 먼저 무너지는가.
무대는 어둡고 비어 있었다. 검은 여백 뒤로 집의 윤곽처럼 보이는 구조물이 낮게 서 있고, 희미한 불빛 몇 개가 마을의 불안한 밤을 비췄다. 그 앞에 배우들이 등장했다. 얼굴은 모두 하얗게 지워져 있었다. 누군가는 관료 같고, 누군가는 귀족 같고, 누군가는 악사 같았지만, 그들은 모두 하나의 가면을 쓴 사람들처럼 보였다. 현실의 특정 인물을 재현한다기보다, 권력 앞에서 반복적으로 출몰하는 인간의 표정들을 무대 위에 늘어놓은 듯했다.
말보다 먼저 무너지는 몸들
▲연극 <감찰관> 공연 장면
유희정
사다리움직임연구소는 오래전부터 말보다 몸, 설명보다 움직임, 재현보다 감각을 통해 자신들만의 무대 언어를 구축해온 단체다. 이번 <감찰관> 역시 고골 원작의 말맛에만 기대지 않는다. 오히려 말이 상황을 설명하는 동안 인물들의 몸은 더 빠르고 더 정직하게 진실을 누설한다.
무대 위 관료들은 입으로는 체면과 위엄을 말한다. 그러나 '감찰관'이라는 단어가 등장하는 순간, 몸은 곧장 배신한다. 허리는 비굴하게 굽고, 눈동자는 갈 곳을 잃고, 손은 분주해진다. 누군가는 과장되게 웃고, 누군가는 갑자기 목소리를 높인다. 자기 죄를 숨기려다 오히려 더 크게 드러내는 사람도 있다.
긴 나무 책상과 의자는 이 작품에서 중요한 풍경을 만든다. 그것은 행정기관의 회의실 같기도 하고, 심문대 같기도 하며, 우스꽝스러운 광대극의 무대처럼 보인다. 배우들은 책상 뒤에 일렬로 앉아 서로의 눈치를 보고, 의자 위로 올라가 몸을 크게 부풀리며, 한 사람의 말에 동시에 몸을 기울인다. 누군가 위에 서고 누군가 아래에서 바라보는 순간, 권력 관계는 순식간에 만들어진다. 진짜 권력이 있느냐 없느냐는 중요하지 않다. 누군가가 위에 있다는 상상만으로도 사람들은 이미 아래에 선다.
흰 분장을 한 배우들이 한꺼번에 몰려들거나, 갑자기 얼어붙듯 멈추는 장면도 인상적이다. 그들은 말로 회의를 하는 것이 아니라 몸으로 공포를 회람한다. 한 사람이 불안을 꺼내면 다른 사람의 어깨가 먼저 반응하고, 한 사람이 소문을 들으면 여러 사람의 발끝이 동시에 흔들린다. 이 연극에서 소문은 대사로만 전달되지 않는다. 시선과 허리와 손끝과 발걸음으로 번진다.
이것은 단순한 희극적 몸짓이 아니다. 권력 앞에서 인간이 얼마나 빨리 자세를 바꾸는지, 불안 앞에서 신체가 얼마나 먼저 진실을 발설하는지 보여주는 장면들이다. 말은 품위를 가장하지만 몸은 이미 들켜 있다. 이 작품에서 인간의 몸은 말보다 먼저 감찰받는다.
가짜 감찰관은 혼자 만들어지지 않는다
▲연극 <감찰관> 공연 장면
유희정
극의 중심 사건은 단순하다. 마을 사람들은 하급 관리 흘레스타코프를 진짜 감찰관으로 착각한다. 그러나 흘레스타코프는 처음부터 거대한 권력을 가진 인물이 아니었다. 그는 오히려 비어 있는 존재에 가깝다. 그 빈 곳에 권위와 두려움과 욕망을 채워 넣은 것은 마을 사람들이다.
이 지점에서 연극은 갑자기 서늘해진다. 사기꾼은 혼자 탄생하지 않는다. 속고 싶은 사람들이 있어야 사기는 완성된다. 들키고 싶지 않은 죄책감, 권력에 기대고 싶은 욕망, 자기만은 빠져나가고 싶다는 비겁함이 모여 가짜 권력을 만든다. 흘레스타코프가 감찰관이 된 것이 아니라, 사람들이 그를 감찰관으로 만들었다.
무대 위 군중은 자주 한 사람을 가운데 두고 뭉친다. 누군가는 어깨를 붙잡고, 누군가는 뒤에서 밀착하고, 누군가는 불안한 눈으로 주변을 살핀다. 그 모습은 한 사람을 보호하는 듯 보이지만, 동시에 그를 포획하는 것처럼 보인다. 가짜 감찰관은 그렇게 탄생한다. 한 사람의 거짓말 때문이 아니라, 모두의 불안이 그를 감싸고 들어 올린다. 권력은 위에서 내려오는 것 같지만, 때로는 아래에서 떠받들며 만들어진다.
악기들이 등장하는 장면도 흥미롭다. 아코디언, 플루트, 기타, 베이스, 탬버린, 색소폰 같은 악기들이 배우들의 몸과 함께 움직인다. 배우들은 익살스러운 악단처럼 모이고, 불안한 합주단처럼 흩어진다. 마을의 혼란은 비극처럼 폭발하지 않는다. 오히려 흥겨운 소동처럼 연주된다. 그래서 더 무섭다. 부패와 공포가 음악이 되고, 불안이 리듬이 되는 순간, 관객은 웃으면서도 마음 한구석이 서늘해진다.
좋은 풍자는 관객을 안전한 자리에 두지 않는다. <감찰관>이 가진 힘도 거기에 있다. 관객은 부패한 관료들을 내려다보며 웃고 있다고 생각하지만, 어느 순간 연극은 거울을 객석 쪽으로 돌린다. "당신은 지금 무엇을 보고 웃고 있는가." 그 질문이 도착하는 순간, 웃음은 비로소 풍자가 된다.
소문과 공포가 권력을 만든다
▲연극 <감찰관> 공연 장면
유희정
<감찰관>에서 가장 흥미로운 것은 감찰관의 실체가 아니라 감찰관을 둘러싼 반응이다. 권력은 등장하기 전부터 작동한다. 사람들은 아직 아무것도 확인하지 않았지만, 이미 권력 앞에 선 사람처럼 행동한다. 감찰관이 누구인지 모르는 상태에서 감찰관을 두려워하고, 감찰관이 무엇을 알고 있는지 모르는 상태에서 자기 죄를 먼저 짐작한다.
이것은 소문이 작동하는 방식과 닮아 있다. 소문은 사실의 자리를 대신 차지한다. 때로는 사실보다 더 빠르게 사람을 움직인다. 그리고 소문이 강해지는 곳에는 대개 불신이 있다. 제도에 대한 불신, 절차에 대한 불신, 공정성에 대한 불신, 권력의 의도에 대한 불신이다.
▲연극 <감찰관> 공연 사진유희정
무대 위에서도 소문은 보이지 않는 바람처럼 움직인다. 한 사람이 말을 꺼내면 다른 사람들의 몸이 먼저 반응한다. 멀리 떨어져 있던 인물들이 갑자기 한곳으로 몰리고, 누군가는 무대 가장자리에서 엿듣고, 누군가는 편지를 움켜쥔 채 군중 속으로 빨려 들어간다. 말은 작게 시작되지만, 몸들은 크게 흔들린다. 이 연극에서 소문은 대사가 아니라 동선이다. 정보는 입에서 입으로만 이동하지 않는다. 어깨와 시선과 발끝과 구부러진 허리를 통해 번져나간다.
그들이 두려워하는 것은 외부에서 온 감찰관이 아니라 자기 안에 이미 있는 부패다. 소문이 그들의 몸을 흔드는 것은 소문이 강해서가 아니다. 그들이 흔들릴 이유를 이미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 작품은 단순한 관료 풍자에 머물지 않는다. 선거를 앞둔 정치권, 인사 논란 속의 문화예술계, 이전설과 개편론 앞에서 흔들리는 현장 모두에게 질문을 던진다. 감찰받아야 할 것은 권력자뿐인가. 아니면 권력의 냄새를 맡고 먼저 자세를 고치는 우리 자신도 함께 감찰받아야 하는가.
고전이 오래 살아남는 이유는 과거를 잘 보존해서가 아니다. 오늘을 불편하게 건드리기 때문이다. <감찰관>은 1836년에 쓰였지만, 2026년 한국 사회 한복판에서 여전히 묻는다. 누가 감찰관인가. 누가 감찰받아야 하는가. 그리고 우리는 왜 아직 오지도 않은 권력 앞에서 먼저 흔들리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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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여 년간 문화예술계에서 글을 써왔다. 월간지<문화+서울> 편집장(2013~2022)으로, 한겨레신문 필진(2016~2023)으로 취재와 예술가를 인터뷰했다. 현재는 서울 대학로 일대에서 공연&전시 등 다양한 분야의 예술가들을 만나 이아기를 전하며, '서울문화투데이'와 '더프리뷰' 등 매체에 칼럼을 연재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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