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BC <21세기 대군부인> 관련 이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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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군주의 칭호는 1895년 1월 12일(음 12.17)에 '주상 전하'에서 '대군주 폐하'로 개칭됐다. 대군주 폐하가 된 고종 임금을 보좌하는 비서원의 업무일지에는 이웃 나라들이 조선을 한국으로도 지칭하는 현상이 언급됐다.
이 업무일지인 <비서원일기>에 따르면, 1897년 10월 11일(음 9.16) 고종은 신하들과의 대화에서 '종종 외국 문서에 조선 대신 한(韓)으로 지칭되는 일이 있다'고 지적했다. '삼한'과 더불어 마한·진한·변한을 통칭하는 또 다른 표현인 '한국'이 조선의 별칭처럼 쓰이는 일이 많았던 것이다.
마한·진한·변한은 후대에는 국호로 사용됐지만, 처음에는 왕호(王號)로 쓰였다. 유목민들의 군주가 한(汗)으로 표기되듯이, 고대 한국인들은 자신들의 군주를 한(韓)으로 표기했다. 역사학자 신채호는 <조선상고사>에서 "삼한의 '한'은 가한(可汗)의 '한'과 같이 임금의 칭호"였다고 설명한다.
말한·불한·신한을 한국식 한문인 이두로 표기한 것이 마한·진한·변한이다. 한(韓)을 이 한자의 원래 의미에 맞게 사용한 게 아니라, 단순히 음에 맞춰 사용한 것이었다. 고대 한국인들은 이 글자를 한(汗)과 같은 의미로 활용했다.
마한·진한·변한으로 불리는 세 군주는 고조선의 세 지역을 각각 분점했다. 이 중의 리더는 진한이었다. 신채호는 진한의 주도 하에 마한·변한이 함께 다스리는 시스템이 고조선의 원래 체제였다고 설명한다. 그러나 진한이 약해지면서 마한·변한이 분점을 뛰어넘어 독립을 했고, 이는 삼한의 세 구역이 고조선이 아닌 마한·진한·변한으로 각각 호칭되는 계기가 됐다.
왕호로 쓰였던 마한·진한·변한은 이 때문에 국호로 사용되기 시작했다. 그 뒤로 진한보다 마한의 위상이 더 높아졌다는 것이 신채호의 고증이다. 이 같은 고대의 상고사가 국제적으로 강한 인상을 남겼기에, 삼한이 소멸된 뒤에도 국제사회는 오랫동안 한민족을 한국으로도 지칭했다.
1897년에 고종은 황제 칭호를 사용하고 독자 연호를 채택하는 칭제건원을 선포할 때 국호를 대한으로 개정했다. 이는 '한'에 담긴 위와 같은 역사 때문이었다. 유목지대의 한(汗)과 같은 맥락인 한(韓)은 청나라가 조선에서 쫓겨나고 조선과 중국의 사대관계가 무너진 1894년 이후의 시대 분위기에 부합하는 국호였다.
위에 소개된 <비서원일기>는 대한제국이 선포되기 전날에 고종과 대신들이 회의한 내용을 담은 것이다. 이날 고종이 '국호는 대한으로 한다'는 결론을 내린 것은 이 국호가 황제국 위상에 걸맞다는 판단 때문이었다. 전 영의정 심순택(沈舜澤)의 경우에는, 주변의 역대 황제국들 중에서 대한이라는 칭호를 사용한 국가는 없으니 이 명칭이 좋겠다고 힘을 실어줬다.
황제국 위상을 세우고자 '대한' 국호를 채택했으니 군주의 호칭도 그에 맞춰야 했다. 고종이 칭제를 선언한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MBC <21세기 대군부인> 관련 이미지.MBC
그런데 이때까지의 동아시아 역사에서 황제국과 어울리지 않는 군주 칭호가 있었다. <21세기 대군부인>에 나온 '국왕'이 그것이다.
'왕'이라는 한자는 황제를 포함한 최고 권력자를 지칭할 때도 쓰였지만, 거기에 국(國)을 더한 '국왕'이라는 글자는 그렇지 않았다. '국왕'은 중국이 이웃나라 군주를 자국의 신하국 혹은 제후국 군주로 취급할 때 선택한 글자다. 자국 군주는 황제로 부르고 자국과 동맹한 군주는 국왕 등으로 부르는 것이 중국의 관행이었다.
중국이 조선에 보낸 공식 서한에는 "조선국왕 아무개(朝鮮國王某)" 같은 표현이 많다. 조선 정부 입장에서는 자국 군주를 '아무개'로 호칭하는 것 자체가 기분 나쁠 수밖에 없었다. 그런 폄하적 표현과 함께 수반된 것이 조선국왕이라는 호칭이었다.
더 불쾌한 것은, 음력으로 예종 즉위년 9월 16일자(양력 1468.10.1) <예종실록>에 나오는 "너 조선국왕(爾朝鮮國王)" 같은 표현이었다. 너 조선국왕의 충성을 가상히 여긴다는 내용이 뒤에 이어진다. 국왕이란 글자 자체의 의미는 나쁘지 않지만 중국이 이런 용도로 썼기 때문에, 이웃나라 왕실들의 입장에서는 이 표현이 조심스러울 수밖에 없었다.
조선은 그런 표현을 일본 지도자를 가리킬 때 사용했다. 중국의 용례를 따른 것이었다. 조선과 중국은 천황으로 불리는 명목상의 일본 지도자는 무시하고, 군사정권인 막부를 이끄는 쇼군(將軍)을 일본국왕으로 불렀다. 쇼군을 국제관계상의 일본 대표자로 승인했던 것이다. 일본국왕이라는 이 표현을 통해 조·중은 이 나라가 황제국이 아님을 명확히 했다.
도쿠가와막부(에도막부)가 무너지고 메이지유신이 단행된 이듬해인 1869년에 일본은 천황 명의의 국서를 조선에 보냈다. 천황의 권위가 회복된 새로운 현실을 반영하는 것이었지만, 조선은 이 국서의 수령을 거부했다. 일본의 황제국 지위에 대한 승인을 거부했던 것이다. 이는 일본 군함 운요호(운양호)가 1875년에 강화도 앞바다에 출현해 대포를 쏘는 원인 중 하나가 됐다.
일본은 '국왕의 나라'에서 벗어나 '천황의 나라'로 도약했다는 국제적 승인을 얻고 싶어 했다. 조선은 그런 일본을 국왕의 나라로 묶어두려 했다. '국왕' 표현에 대해 동아시아 왕조들은 이처럼 민감했다. 중국 앞에서는 어쩔 수 없이 국왕을 자처해도, 이렇게 불리는 것을 탐탁해 하지 않았다.
'대한'은 황제국 뉘앙스가 강한 국호다. '왕'은 몰라도 '국왕'은 제후국 군주에 어울렸다. 그래서 두 용어의 조합은 역사적 현실과 배치되는 것이었다. 21세기를 배경으로 한다 할지라도 왕조국가를 다루는 드라마에서 '대한민국 국왕'을 등장시키는 것은 왕조시대의 논리와 정서에 맞지 않다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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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imjongsung.com.시사와역사 출판사(sisahistory.com)대표,제15회 임종국상.유튜브 시사와역사 채널.저서:친일파의 재산,대논쟁 한국사,반일종족주의 무엇이 문제인가,조선상고사,나는 세종이다,역사추리 조선사,당쟁의 한국사,왜 미국은 북한을 이기지못하나,발해고(4권본),한국 중국 일본 그들의 교과서가 가르치지 않는 역사 등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