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 장면 이후 우리 사회는] 영화, 방송, 책등 작품 속 한 장면을 통해, 오늘의 사회적 장면과 감정의 흐름을 살펴봅니다.[기자말] |
(* 이 글은 영화의 스포일러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피를 토하는 고통을 겪었지. 그래서 내 말에는 힘이 있는 거야."
이 말을 처음 들었을 때, 쉽게 반박할 수 없었다. 틀린 말이 아니기 때문이다. 호소키 카즈코(토다 에리카)는 실제로 고통받았다. 1946년 패전 직후, 잿더미 속에서 굶주리는 동생들을 위해 불상 앞의 빵을 훔쳤고 자신은 울면서 지렁이를 먹었다. 유흥업계의 착취를 견뎠고, 야쿠자의 지배 아래서 살아남았다. 그 고통은 꾸며낸 것이 아니었다. 진짜였다.
그래서 더 위험하다. 우리는 거짓말보다 진짜 고통 앞에서 더 쉽게 속는다. 진짜 고통이 거짓 권위의 근거가 될 때, 우리는 어디서 멈춰야 하는지 모른다. 의심해야 할 순간에도 쉽게 의심하지 못한다. 검증해야 할 말 앞에서 잠시 머뭇거린다. 그 사람이 실제로 견뎌낸 고통을 떠올리는 순간, 반박은 잔인함처럼 느껴져서다.
넷플릭스 〈지옥에 떨어집니다〉는 바로 그 멈칫하는 순간을 집요하게 파고든다. 2000년대 초반 일본 황금시간대를 10년 가까이 지배한 독설 점술가의 일대기. 그러나 이 드라마가 진짜 묻는 것은 호소키 개인의 선악이 아니다. 우리는 왜 진짜 고통 앞에서 이렇게 쉽게 무장해제 되는가.
단호한 목소리
▲지옥에 떨어집니다공식예고편
넷플릭스
드라마는 카즈코의 열일곱 살부터 시작한다. 패전 직후의 일본, 굶주림과 폐허 속에서 그녀는 살아남는 법을 배웠다. 유흥업계에 발을 들였고, 야쿠자에게 착취당했고, 그 모든 것을 견디며 올라왔다.
"그 지렁이의 맛은 죽을 때까지 잊지 않을 거야."
훗날 그녀는 말한다. 이 문장이 드라마 전체의 열쇠다. 토하고 싶었을 것이다. 당장 뱉어내고 싶었을 것이다. 그러나 눈앞에는 허기에 지친 동생들이 있었다. 카즈코는 눈을 질끈 감고, 지렁이를 목구멍 아래로 밀어 넣었다. 지렁이가 넘어가는 감각은 마치 굴욕 그 자체가 식도를 타고 내려가는 것 같았다. 지렁이보다 견디기 힘들었던 것은, 그 굴욕을 삼켜야 했던 현실이었을 것이다.
"지옥에 떨어집니다"라고 선고하는 여자가 이미 지옥을 살아낸 사람이었다. 그리고 바로 그 사실이 그녀의 말에 설명하기 어려운 무게를 부여한다.
우리는 살아남은 사람의 말을 특별하게 받아들이는 경향이 있다. 그 사람이 겪은 밑바닥이 우리보다 깊었다면, 우리보다 더 많은 진실을 알고 있을 것이라 믿는다. 살아남았다는 사실 자체가 어느 순간 통찰의 증명이 된다. 고통의 이력이 판단의 권위로 번져가는 것이다.
한국 사회에서도 익숙한 풍경이다. "저는 바닥까지 가봤습니다"로 시작하는 성공 서사는 내용이 검증되기 전에 먼저 신뢰를 얻는다. 한때 파산 직전까지 갔다는 투자 멘토, 실패와 좌절 끝에 성공했다는 자기 계발 강사의 고백은 숫자와 데이터보다 더 강한 설득력이 있다.
경험의 진정성이 주장 전체의 정당성으로 확장되는 순간이다. 우리는 그 사람이 실제로 겪었다는 고통 앞에서, 정작 그가 지금 하는 말의 타당성을 검증하는 일을 자주 멈춘다. 그가 겪었다는 고통은 사실 여부를 증명할 뿐, 지금 그의 말까지 진실로 만들지는 않는다. 그러나 우리는 자주 그 둘을 혼동한다. "나는 고통받았다. 그러므로 나는 옳다." 호소키의 말이 위험한 이유는 그것이 완전히 거짓이 아니기 때문이다.
사람을 속이는 가장 강력한 자격증은, 때로 그 사람이 실제로 겪은 고통이다.
속은 자와 구원받은 자
▲지옥에 떨어집니다공식예고편
넷플릭스
드라마에는 두 명의 상담자가 등장한다. 한 사람은 얼굴에 피멍이 든 노인이다. 아들의 폭력이 심해졌지만, 조상 공양이 부족하다는 호소키의 말을 믿고 계속 돈을 갖다 바친다. "반드시 좋아질 거라고 믿어요. 호소키 선생님이 그러셨으니까요. 아주 유명한 분 말씀이잖아요."
다른 한 사람 리츠코는 호소키의 조언대로 불륜을 정리한 뒤 좋은 남편을 만나고 전국에 주얼리 매장 10개를 열었다. "저한테 호소키 선생님은 신 같은 분이에요."
한 사람은 무너졌고, 다른 한 사람은 구원받았다. 그러나 둘 다 같은 사람을 믿는다. 이 장면이 불편한 이유는 리츠코의 존재 때문이다. 그녀의 삶은 실제로 달라졌다. 그것이 점술의 힘이었는지, 스스로 내린 결단의 결과였는지는 알 수 없다. 하지만 누군가가 실제로 변화했다는 사실은 다른 누군가의 의심을 멈추게 만든다.
이 구조 역시 낯설지 않다. 폐쇄적 종교 공동체에서든, 고수익을 약속하는 투자 모임에서든 비슷한 장면은 반복된다. 특정 집단 안에서 실제로 외로움이 해소된 사람, 실제로 삶의 방향을 찾은 사람들이 존재한다. 그 사람들의 존재가 착취당하는 사람들을 붙잡아두는 가장 강력한 이유가 된다.
속은 자와 구원받은 자가 같은 공간 안에 있을 때, 판단은 유예된다. 사기꾼이면서 동시에 누군가를 구원할 수 있다는 것. 거짓 믿음 위에서도 진짜 인생이 바뀔 수 있다는 것. 이 역설이 우리를 가장 오래 붙잡아둔다.
우리는 왜 멈추지 못했는가
▲지옥에 떨어집니다공식예고편넷플릭스
드라마 후반부에서, 우오즈미 미노리(이토 사이리) 작가는 호소키 카즈코에 대한 소설을 완성한 후 가장 먼저 호소키 카즈코에게 보여준다. 카즈코는 그 소설을 읽고 홀로 눈물을 흘린다. 그 눈물이 무엇인지는 설명되지 않는다. 후회인지, 안도인지, 체념인지 알 수 없다. 드라마는 끝내 그 눈물의 의미를 해석해 주지 않는다. 대신 시청자의 시선을 한 개인의 내면에서, 그런 인물을 필요로 했던 시대 전체로 돌려놓는다.
2000년대 초반 일본은 장기 불황과 취업 빙하기 속에서 미래를 확신할 수 없는 사회였다. 한국 사회의 지금도 크게 다르지 않다. 고금리와 불안정한 노동시장, 예측 불가능한 자산 시장 속에서 사람들은 여전히 더 단호한 목소리를 찾는다. 복잡한 현실을 설명해 주는 분석보다, 단번에 방향을 단정해 주는 예언이 더 쉽게 소비된다. 불확실한 내일보다 차라리 확실한 경고가 견디기 쉬울 때가 있다. 그래서 "지옥에 떨어집니다"라는 선고조차 위로가 된다.
드라마는 끝에서 담담하게 말한다. 호소키 카즈코는 원하는 것을 모두 손에 넣었다. 스캔들로 방송에서 퇴출된 뒤에도 더 큰돈을 벌었고, 평온한 말년을 보냈다.
마지막 장면에서 그녀는 웃고 있다. 그 웃음 앞에서 불편해지는 이유는, 우리가 그녀의 말보다 그녀의 고통을 먼저 믿었음을 인정하게 되기 때문이다. 어쩌면 우리는 거짓을 믿은 것이 아니다. 그 고통만큼은 진짜라고 믿었을 뿐이다.
저작권자(c) 오마이뉴스(시민기자),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오탈자 신고
생각하는 대로 살지 않으면 사는 대로 생각하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