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주영화제가 삼고초려, 켄트 존스의 특별한 개막작

[김성호의 씨네만세 1340] 27회 전주국제영화제 개막작 <나의 사적인 예술가>

봄을 알리는 영화제, 27회 전주국제영화제에서 처음 본 작품은 개막작 <나의 사적인 예술가>다. 원제는 'Late Fame', 직역하면 '뒤늦은 명성' 쯤이 될까. 이야기는 원제 그대로다. 뒤늦게 찾아온 명성에 들뜬 어느 시인이 있다. 저 유명한 명우 윌렘 데포가 연기한 그는 정말로 뉴욕 어느 구석에서 살아가는 이름 모를 우체국 직원이 시대가 몰라준 위대한 시인일 수 있겠다는 설렘을 안게 한다. 그러니까 이 영화 <나의 사적인 예술가>에서 마주하게 되는 첫 감정은 설렘이다. 날 좋은 봄, 전주까지 걸음해 이 영화제가 가려 뽑은 개막작과 마주한 예술 애호가들에게 영화는, 영화제는 설렘을 안긴다.

감독 켄트 존스는 비평가로 영화경력을 시작했다. 같은 영화를 여러 번 보고, 비평가가 되고, 아예 직접 영화를 만드는 단계로 올라섰다. 그가 감독이 되기까진 적지 않은 시간이 필요했으나, 그건 마땅한 시간이기도 했다. 이 영화는 그로부터 얻어진 이야기이기도 하다.

설렘으로부터 출발한 영화는 설렘에서 끝나지 않는다. 그 설렘을 무참히 즈려 밟아 기대한 모든 것이 이뤄지지 않음을 말한다. 한 편의 영화로부터 가장 마주하고 싶지 않은 것이 있다면 이런 것이 아닐까, 그런 생각을 하는 이도 있을 수가 있겠다. 개막작 기자시사가 끝나고 감독 스스로가 말한 바, 영화는 매력적인 꿈을 팍팍한 현실 가운데 비추어 보이지만 그것이 완전히 깨어져 나가는 모습으로 귀결된다. 존스는 영화가 '새드엔딩처럼' 끝난다고 말했다. 주요한 두 인물 중 하나는 깨어졌고, 다른 하나는 원상복귀일 뿐이라고. 그러니까 기대한 비상은 이뤄지지 않는다고 말이다. 그렇다면 이 영화 <나의 사적인 예술가>는 우울하고 실망 가득한 영화인 것일까.

나의 사적인 예술가 켄트 존스 감독
나의 사적인 예술가켄트 존스 감독전주국제영화제

고단한 삶을 나고 있을 동료들에게 부치는 응원

27회 전주국제영화제 개막작 <나의 사적인 예술가>를 보고서 나는 이 영화가 진짜에 다가선 작품이라 느꼈다. 그 진짜에 다가서는 과정이, 또 메시지를 전하는 태도가 때로는 아름답게까지 여겨지기도 했다. 이 영화가 동료 영화인, 비평가, 나아가 예술가들에게 전하는 일종의 응원처럼 느껴졌다. 예술계에 만연한 꿈과 허상을 철저하게 걷어내고 깨어버림으로써 진실을 드러내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전진할 밖에 없을 한 줌의 진짜 예술가들에게 격려를 전하는 작품이라고 말이다.

에드(윌렘 데포 분)는 뉴욕 우체국 직원이다. 근속연수가 30년쯤은 돼 보이는 나이든 사내다. 아마도 오랫동안 그는 같은 방식의 삶을 고수한 것으로 보인다. 요즘 표현으로 치면 '집-회사-술집-집-회사-술집'을 반복하는 그렇고 그런 아재랄까. 직장 동료들과 술을 마시고 농담 따먹기를 하고 당구를 치고 미식축구를 보는 일상이 거의 전부인 것처럼 보인다. 가족은 없고 아마도 꽤 오래 전 가까이 사귀었던 여자에게 차인 듯하다. 대단히 잘 난 것도 없지만 빠질 것도 없다. 그는 그렇게 살아가고 있다.

에드의 일상이 바뀌는 건 어느 불청객의 방문부터다. 여느 날처럼 집에 돌아와보니 마치 빅토리아 시대를 사는 듯한 차림의 젊은 사내 하나가 오래 기다리고 있었다는 것이다. 에드의 팬이라 자청하는 그는 에드가 오래 전 낸 시집을 읽었다며 "당신은 걸작을 썼다"고 말한다.

나의 사적인 예술가 스틸컷
나의 사적인 예술가스틸컷전주국제영화제

30년 만에 나타난 팬... 뒤늦은 명성이 가져온 일

그러니까 에드에게도 왕년이랄 게 있었단 이야기다. 누군가는 십팔 대 일로 붙어 이겼고, 누구는 양다리를 넘어 세 다리 네 다리를 걸칠 때도 있었으며, 또 누구는 동네 제일의 수재라고 떠받들어 졌던 때가 있었듯이 그에게도 앞길 창창했던 시절이 있었던 것이다. 아마도 30년쯤 전 이야기다. 그러니까 시를 읽는 이도, 쓰는 이도, 심지어는 낭독회라 할 것도 남아 있기는 했던 때다. 지난 시대의 위대한 시인들이 실제로 살아 있었고, 그들과 교우했던 다음 세대의 젊은 시인들이 추앙받던 때. 시, 예술을 좇아 뉴욕으로 흘러든 청년 에드는 그들 가운데 가장 어린 이였다. 그러나 이제는 다 끝나버린 이야기다.

에드에게 인생은 우체국 직원으로 살며 친구들과 만나 즐기는 일일 뿐이다. 시는 그 삶에서 방을 빼어 나간 지 오래다. 주변엔 시는커녕 글을 쓰는 이도 남아 있지 않다. 그런 그 앞에 나타난 윌슨 마이어스(에드문드 도노반 분)는 조금씩, 마침내 그 삶을 온통 헤집어버린다. 과거의 열정을, 욕망을, 허영을 되살린다. 그리고는 마침내 좌절감과 허망함까지를 맛보게 한다.

마이어스는 '열정주의자 모임'이란 동호회의 일원이다. 여기엔 창작하는 이들, 소위 예술가들이 가득하다. 극작가, 에세이스트, 온갖 펜 쥔 이들이 창작하며 교류한다. 마이어스는 이들이 모두 에드의 대단한 팬이라고 말한다. 우연히 중고서점에서 발견한 에드의 책을 읽고 감명받았다고, 마치 삼류시인 에드워드 피츠제럴드가 오마르 하이얌을 발견했을 때, 아니면 프리드리히 니체가 헌책방에서 <의지와 표상으로서의 세계> 후반부를 읽었을 때처럼 열광한다. 적어도 백 년 전까지는 세계 문학사 곳곳에서 이런 일이 일어났다. 그중 가장 유명한 것들은 전설적인 런던의 채링크로스 가, 헌책방들 즐비한 그 거리에서 이뤄졌다. 마이어스가 바로 그 거리 어느 서점에서 에드의 책을 발견했다고 말할 때, 반가움과 찜찜함을 동시에 느낀 이라면 그야말로 <나의 사적인 예술가>를 제대로 이해할 준비가 된 관객일 테다.

나의 사적인 예술가 개막식
나의 사적인 예술가개막식전주국제영화제

허세와 인정욕구를 빼면 무엇이 남지?

영화는 에드가 이 모임에 들어갔다가 나오기까지의 이야기다. 주요한 사건이라곤 에드의 시 낭독을 중심으로 한 일종의 문학제다. 모임이 주최한 문학제에서 구성원들은 제가 지은 글을 참석자들 앞에 발표한다. 그 자리를 위해 모임이 발굴한 전대의 시인 에드는 새로 시를 쓸 것을 요구받는다. 연극배우라는 글로리아(그레타 리 분)가 그를 읽을 것이라 한다.

글로리아는 이 모임의 주역이다. 마치 파리의 카페 드 플로르 가장 열띤 테이블에 시몬느 드 보부아르가, 바이런과 퍼시 비시 셸리의 곁에 메리 셸리가, 블룸즈버리 그룹의 중심에는 버지니아 울프가 있었던 것처럼 그녀가 있어 이 모임은 활기를 띤다. 만인의 연인이고 뮤즈인 매력적 예술가, 실제로 빼어난 외모에다 예술적 감수성, 신비한 이력까지 갖췄단 점에서 많고 많은 예술가 모임의 여주인 자격을 꼭 맞춘 듯하다.

이 모임에서 일어난 많고 많은 일들을 일일이 적을 필요는 없겠다. 흥미롭고 매력적인 이야기 중 일부는 여느 예술가들이 모인 모임에서 숱하게 일어났을 법한 것들이다. 그러나 그보다 훨씬 더 많은 부분은 다른 곳을 향한다. 이들이 찐이 아닌 짭이란 것, 그 미묘한 차이를 섬세하게 부각한다. '기술이 뇌를 망가뜨린다'는 건 이들에겐 강령처럼 통용되는 주장이다.

적어도 예술 부문에선 얼마쯤 사실과 맞닿는 이야기지만, 이들의 삶과 연계하여 바라보자면 진실이 슬며시 고개를 추켜든다. 휴대폰을 보지 않고, SNS를 쓰지 않고, 기술과 거리를 두는 것이 곧 예술적 위대함일까. 현란한 기술적 자극이 사고하고 관념을 닦으며 사상을 세우는 일을 방해한단 건 사실이다. 그러나 그 역은 사실일 수 없다. 관념을 닦고 사상을 세우는 일이 오로지 현란한 기술적 자극을 배제함으로써 달성되지 않는다. 관념을 닦고 사상을 세우며 표현으로써 그를 드러내는 작업을 이뤄야만 한다. 전자는 쉽고 후자는 어렵다. 그래서 짭들은 쉬운 것을 택해 어려운 것을 이룬 척 한다.

전주국제영화제 포스터
전주국제영화제포스터전주국제영화제

"재능은 부분일 뿐"

영화는 이들 사이에서 마치 옛 예술가들의 시대가 부활한 듯한 감격을 느끼는 에드의 모습을 비춘다. 그리고 그 눈에 거듭 밟히는 거짓과 허영의 흔적들을 또한 포착한다. 믿고 싶은 마음과, 온전히 믿을 수 없는 부실한 현실의 괴리 사이에서 에드가 겪는 일들이 따갑다. 영화는 열정주의자 모임 가운데 누가 진짜고 누가 가짜인지를 가려내는 데는 관심이 없다. 자연히 그 사실이 드러나긴 하지만, 영화가 집중하는 건 어디까지나 에드의 행방이다. 그가 교류하고 진짜임을 확인하게 되는 단 한 명의 인물이 맞이하는 결말이 곧 영화의 결말처럼 보이기도 한다.

감독은 그래서 이 영화를 '새드엔딩처럼' 보인다고 말했다. 그러나 새드엔딩처럼이란 말은 온전히 새드엔딩은 아니란 뜻이기도 하다. 딱 한 장면만 언급하기로 하자.

도저히 이 모임에 있을 수가 없어 뛰쳐나온 에드를 따라 이 모임서 가장 어린 이가 따라 나온다. 그가 에드에게 제 글을 보아달라고, 제게 재능이 있는지를 알려달라고 부탁한다. 걸작을 쓴 천재니까 제 재능쯤을 판별해줄 수 있지 않느냐며. 그때 에드가 답하는 말, 그것이 나는 이 영화의 진짜 이야기라 여긴다. 에드와 다른 이가 맞이하는 새드엔딩처럼 보이는 결말보다도 말이다.

에드는 말한다. "재능은 부분일 뿐"이라고. 지속하고 하지 않고, 그 중요한 걸 다른 이에게 기대지 말라고 말이다. 모임, 관계, 알아봐줌, 발탁되고 그렇지 않고를 넘어서 예술가를 지탱하고 지속하도록 하는 중한 것이 무언지를 이 영화는 말하고자 한다. 나는 그것이 진실에 가깝다고 여긴다. 어떤 희망에도 이르지 않는 이 영화가 동료 예술가에게 전하는 응원처럼 다가온 건 바로 이 때문이다.
덧붙이는 글 김성호 평론가의 브런치(https://brunch.co.kr/@goldstarsky)에도 함께 실립니다. '김성호의 씨네만세'를 검색하면 더 많은 글을 만날 수 있습니다. goldstarsky@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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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영화평론가.서평가.기자.3급항해사 / '자주 부끄럽고 가끔 행복했습니다' 저자 / 진지한 글 써봐야 알아보는 이 없으니 영화와 책 얘기나 실컷 해보련다. / 인스타 @blly_kim / GV, 강의, 기고청탁은 goldstarsky@naver.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