빈곤과 가정폭력의 굴레에 얽매인 소년 '데클란'. 데클란은 마음이 답답할 때면 솔즈베리 언덕에 올라 그림을 그리곤 한다. 그러던 어느 날, 자신만의 비밀스런 장소였던 솔즈베리 언덕에 한 중년 여성이 나타난다. 한때 촉망받는 극작가였지만 슬럼프에 빠져 허우적거리는 '리비'다. 리비는 데클란의 그림에 숨겨진 예술적 재능을 발견하고, 그에게 이야기를 들려줄 것을 청한다.
5월 2일 관람한 연극 <마우스피스>는 빈곤층 소년 데클란과 중산층 중년 여성 리비 사이에서 벌어진 일들을 다룬 2인극이다. 데클란은 자신만의 공간을 침범한 리비를 처음에는 불쾌하게 여기지만, 그 누구도 들으려 하지 않았던 자신의 이야기를 원하는 리비에게 점차 마음을 연다.
목소리의 크기는 권력을 반영한다. 많이 가진 자가 목소리가 크고, 적게 가진 자는 목소리가 작다. 누군가는 지나치게 많이 가진 탓에 목소리를 독점하고, 다른 누군가는 너무나 적게 가진 탓에 목소리를 잃어버린다. 리비는 적당한 목소리를 가진 중산층 여성인 데 더해 연극이라는 수단을 통해 보다 큰 목소리를 낼 수 있다. 반면 데클란은 목소리를 잃어버린 인물인데, 리비는 데클란의 이야기를 연극으로 만들고자 시도함으로써 자신의 목소리를 데클란에게 빌려준다.
▲연극 <마우스피스> 공연 사진
연극열전
대변자는 이야기의 주인이 될 수 있는가
가히 예술의 사회적 역할이라 할 만하다. 데클란처럼 빈곤과 폭력에 시달리는 인물뿐 아니라 여성, 장애인, 소수자의 생생한 목소리를 담아낸 연극은 그 자체로 의미가 있다. 최근에는 연극의 이런 시도들이 국내에서도 활발하게 이루어지고 있으며, 특히 다운증후군 여성의 사랑을 다룬 연극 <젤리피쉬>는 그 의미를 인정받아 지난 1월 동아연극상 작품상을 수상하기도 했다(<젤리피쉬>에는 당사자주의를 표방하며 장애 당사자가 출연하기도 했다).
그리하여 때로는 연극이 진실을 더 잘 포착해 담아낼 수도 있는 법이다. 셰익스피어의 <햄릿>에서 왕위를 찬탈한 클로디어스 왕의 악행을 고발하기 위해 햄릿이 유랑극단 배우들을 통해 연극을 선보였듯이 말이다. 여기서 셰익스피어는 연극이 시대를 비추는 거울이자, 진실의 표상이라고 선언한다. 리비가 데클란을 통해 만들고자 하는 연극, 데클란이 기대하는 연극이 바로 이것이다. 리비는 데클란의 대변자(mouthpiece)가 된다.
데클란의 이야기는 그대로 리비의 극본에 옮겨진다. 문제는 '결말'이다. 데클란의 삶에는 결말이 없지만, 연극에는 결말이 있어야 한다. 데클란은 결말을 알지 못하기에, 리비가 결말을 대신해서 쓴다. 리비가 쓴 결말은 비극으로 귀결된다. 당연히 데클란은 그런 결말을 원하지 않는다.
데클란과 리비는 결말을 둘러싸고 대립한다. 대립은 크게 두 가지 지점에서 이루어진다. 첫째는 이야기가 누구의 것인지를 둘러싼 대립이다. 데클란은 자신이 이야기를 빌려준 것이므로 연극의 이야기가 자신의 것이라고 생각하지만, 리비는 극본이 된 이상 이 이야기는 자신의 것이라고 확신한다.
둘째, 결말의 현실성을 두고 대립한다. 데클란과 리비 모두 이 이야기가 충분히 현실적이라는 데 동의하지만, 결말에서만큼은 서로의 동의가 엇갈린다. 리비는 비극적 결말이 빈곤에 허덕인 존재에게 충분히 일어날 수 있는 일이라고 단언하지만, 데클란은 비극은 리비가 쓴대로 쉽고 단편적인 방식으로 일어나지 않는다고 받아친다.
대변자가 되어주었다는 이유만으로 그가 누군가의 이야기를 소유할 수 있는가, <마우스피스>는 묻는다. 나아가 데클란이 지적한 이야기의 현실성에 대해 고민하게 한다. 철학자 테오도어 아도르노가 반세기 전에 내놓은 경고는 데클란에게 힘을 실어주는 듯하다. 고통받는 사람들에게 목소리를 빌려주는 것이 고통 받는 사람들의 진실을 지워서는 안 된다고, 아도르노는 강하게 경고했다.
▲연극 <마우스피스> 공연 사진
연극열전
연극은 끝날 수 있는가
리비는 데클란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결말을 강행한다. 데클란의 이야기는 리비를 거쳐야만 세상에 발화될 수 있다. 이를 달리 말하면, 리비의 표현이 왜곡되었을 때 데클란에게는 이를 교정할 능력이 없다. 데클란이 보기에 명확히 잘못된 이야기인 리비의 연극에 평단과 관객은 찬사를 보낸다. 빈곤층의 현실을 생생하게 담아냈다는 게 중평이다.
빈곤층은 동의할 수 없는 빈곤층의 현실성에 관객들이 동의할 수 있었던 건, 리비를 비롯한 공연계 인사들과 관객들이 빈곤하지 않기 때문이다. 데클란은 리비를 만나기 위해 극장에 찾아가지만, 비싼 티켓값을 지불할 능력이 없다. 빈곤을 다룬 연극을 빈곤한 사람을 볼 수 없다. 장애를 다룬 연극을 당사자는 보기 어렵다. 그럼 대체 이 연극들은 누구를 위한 것이란 말인가.
우여곡절 끝에 극장에 들어가 리비를 마주한 데클란. 리비의 연극은 끝났고, <마우스피스>도 이제 끝나야 한다. 리비와 데클란의 결말은 극중극에서도 엇갈리지만, <마우스피스>라는 큰 틀의 연극에서도 엇갈린다. 그래서 <마우스피스>의 결말은 두 갈래로 나뉜다. 리비의 결말은 끝을 이야기하지만, 데클란의 결말은 끝을 이야기하지 않는다.
연극이 끝난 뒤에도 연극에 등장한 인물들의 삶은 계속된다는 것을, 데클란은 일깨운다. 데클란은 말한다. "이야기가 끝났다고 당신이 말한다고 해서 그렇게 끝나진 않으니까. 이야기는 계속 이어지고 너저분하지만 그게 진짜니까." 그리고 선언한다. "마지막 장면은 없습니다."
한편 <마우스피스>는 6월 21일까지 대학로 예스24아트원 2관에서 공연된다. 김여진·우정원·김정이 리비 역을 맡고, 전성우·이재균·문유강이 데클란 역을 맡는다. 욕설과 자해에 대한 묘사가 있으므로 관람에 앞서 참고하시기 바란다.
▲연극 <마우스피스> 공연 사진연극열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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빈곤층 소년의 이야기를 연극으로 만든 중산층 작가, 대변자 될 수 있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