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은 빠르게 변한다. 컴퓨터가 등장했고, 휴대폰이 일상이 됐고, 이제는 AI가 우리 일을 가져가기 시작했다. 패션도, 음악도, 소통 방식도 전부 바뀌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변하지 않는 게 있다. 직장 안에서 벌어지는 일들이다. 인정받고 싶은 마음, 버텨야 하는 순간 그리고 결국 부딪히고 해결해야 하는 관계들. 기술은 바뀌었지만 인간은 여전히 같은 방식으로 고민하고, 같은 방식으로 부딪힌다.
영화 <악마는 프라다를 입는다2>는 바로 그 지점에서 다시 시작한다. 앤디(앤 해서웨이)와 미란다(메릴 스트립), 그리고 그 주변의 인물들은 각자의 자리에서 20년을 버텨왔다. 다시 만난 그들의 모습은 낯설기보다 묘하게 익숙하다. 왜냐하면 그 시간을 우리도 함께 지나왔기 때문이다. 이 영화를 보다 보면 자연스럽게 그런 생각이 든다. 나는 지난 20년 동안 어떤 선택을 했고, 어떤 사람이 되어왔을까.
[첫 번째 감정] 앤디의 절망
▲영화 <악마는 프라다를 입는다2>장면
월트디즈니 컴퍼니 코리아
영화는 앤디의 성공적인 순간으로 시작한다. 기자로서 인정받고, 수상까지 하는 장면. 겉으로 보면 완벽한 커리어다. 그런데 그 자리에서 동시에 문자로 해고 통보를 받는다. 그가 속한 회사 직원 모두가 그 통보를 받는다. 그 장면 하나가 이 영화가 말하려는 시대를 단번에 압축한다. 그건 바로 능력의 문제가 아니라, 시대의 속도가 문제가 된다는 것이다.
앤디는 분명 글을 잘 쓰는 기자다. 외부 사람들도 그것을 다 인정하고 있다. 하지만 온라인 매체와 SNS가 중심이 된 세상에서, 단순히 그 능력만으로는 버티기 어려워졌다. 신문사와 잡지사들이 설 자리를 잃어가고, 그 안에서 커리어를 쌓아온 사람들은 벼랑 끝으로 밀린다. 앤디도 그렇게 절망을 건네받는다.
하지만 앤디는 무너지지 않는다. 당황하고 흔들리지만, 멈춰 있지 않는다. 스스로 방법을 찾고, 다시 움직인다. 그 모습은 20년 전 앤디의 모습과 닮아 있으면서도 다르다. 이제 그녀는 상황에 휘둘리는 사람이 아니라, 상황을 극복하고 넘어서려는 사람이다. 문제를 대하는 태도 자체가 과거와 달라졌다. 이제 보다 적극적으로 문제를 해결하려 노력한다.
이 영화가 보여주는 건 절망 자체가 아니다. 절망을 견디게 만드는 시간이다. 앤디가 다시 기회를 잡을 수 있었던 건 단순한 운이 아니라, 지난 20년 동안 쌓아온 것들 덕분이다. 그래서 앤디를 보면서 자꾸 관객은 자꾸만 자신에게 묻게 된다. 지금까지 우리가 쌓아온 것들은, 우리 스스로를 다시 일으켜 세울 수 있을까.
[두 번째 감정] 미란다의 후회
▲영화 <악마는 프라다를 입는다2> 장면
월트디즈니 컴퍼니 코리아
미란다는 여전히 완벽해 보인다. 런웨이를 20년 동안 지켜온 사람. 업계에서 누구도 함부로 건드리지 못하는 자리에 그대로 자신의 위치를 고수하고 있다. 그 자리는 그냥 유지되는 게 아니다. 그녀가 매일 자신의 일을 하면서 스스로 지켜낸 것이다.
그렇게 강력하게 보이는 미란다가 이번 영화에서 보여주는 감정은 후회다. 그런데 그 후회는 자신의 커리어를 부정하는 방식이 아니다. 자신이 무엇을 선택했고 무엇을 포기했는지, 정확히 알고 있는 사람의 태도다. 가족과 함께하지 못했던 시간들, 자녀를 돌보지 못했던 순간들, 주변 사람들에게 보여온 차가운 태도를 미란다는 이미 다 인지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런 자신의 삶에서 후회스러운 부분을 처음으로 인정한다.
영화에서 그녀가 자신의 이야기를 털어놓는 장면은 가장 인상적이다. 아마도 영화 속에서 가장 강하게 마음을 흔드는 장면일 것이다. 우리는 지금껏 앤디의 시선으로 미란다를 봐왔다. 그래서 그녀를 온전히 이해하지 못했다. 이번 영화는 그 시선을 뒤집어 보여준다. 한 사람이 자신의 자리를 지키기 위해 얼마나 많은 것을 감당해야 했는지를 미란다의 후회와 함께 꺼낸다.
오랜 시간 한 자리를 지켜온 사람들은 결국 조용히 돌아보는 순간을 만나게 된다. 미란다는 여전히 차갑고, 여전히 완벽하다. 하지만 그 안에 인간적인 균열이 생겼다. 어쩌면 그 균열은 그의 커리어 내내 내면에서 자리하며 싸우고 견뎌왔던 감정일 것이다. 그래서일까. 깨질 것 같은 그 균열이, 오히려 그녀를 더 단단하게 보이게 만든다.
[세 번째 감정] 나이젤의 포용
▲영화 <악마는 프라다를 입는다2> 장면월트디즈니 컴퍼니 코리아
나이젤(스탠리 투치)은 중심에 서지 않는다. 하지만 중심이 흔들릴 때마다 그 자리를 지탱하는 사람은 늘 나이젤이었다. 미란다의 괴팍함을 받아내면서도 흔들리지 않고, 앤디에게는 타이밍을 아는 조언을 건넨다. 갈등이 터지는 순간에도 그는 균형을 잃지 않는다. 그가 특별한 건 상황을 누구보다 정확하게 읽기 때문이다. 감정을 억누르는 사람이 아니라, 감정을 다룰 줄 아는 사람. 그래서 쉽게 흔들리지 않는다.
1편에서 나이젤은 앤디에게 손을 내밀었다. 아무것도 모르던 신입에게 이 세계가 어떻게 돌아가는지 조용히 알려준 사람이었다. 그런데 이번 영화에서는 그 방향이 달라진다. 이제는 앤디가 나이젤을 돕는 순간이 온다. 그 장면이 이상하게 뭉클하다.
아무 의미 없어 보였던 관계가, 20년이 지나 서로에게 결정적인 순간이 되는 것. 사회생활이란 결국 그런 방식으로 이어진다. 나이젤과 앤디의 모습을 통해서 우리는 나의 주변에 나를 돕던 멘토를 자연스럽게 떠올리게 된다. 그런 사람은 분명히 있으니까.
포용력이라는 건 눈에 잘 보이지 않는다. 조용하고, 화려하지 않고, 그래서 자주 간과된다. 하지만 나이젤 같은 사람이 없으면 조직은 금방 갈라진다. 1인자가 아니지만, 누구도 쉽게 대체할 수 없는 존재. 그리고 그 존재의 가치를 가장 먼저 알아보는 건, 오랜 시간을 함께 버텨온 사람들이다.
20년이 지나 다시 만난 사람들
<악마는 프라다를 입는다2>는 단순한 속편이 아니다. 이 영화는 시간을 이야기한다. 그 시간 속에서 변한 사람들을, 그리고 변하지 않은 것들을 보여준다. 데이빗 프랭클 감독은 1편의 감각을 유지하면서도 20년이라는 무게를 억지스럽지 않게 녹여냈다. 서사가 다소 단순하게 풀리는 지점이 있지만, 이 영화의 목적은 완벽한 이야기가 아니다. 인물이 어떻게 달라졌는지, 우리는 얼마나 변했는지가 목적처럼 보인다.
메릴 스트립, 앤 해서웨이, 스탠리 투치, 에밀리 블런트 같은 배우들 역시 같은 캐릭터를 다시 연기하는 게 아니라, 그 캐릭터가 20년 동안 어떻게 살아왔고 성장해왔는지를 몸으로 보여준다. 여전히 같은 사람 같지만, 분명히 달라진 사람들. 그 미묘한 변화가 이 영화의 가장 큰 힘이다.
1편을 보던 우리는 앤디와 같이 사회 초년생이었을지도 모른다. 지금의 우리는 다르다. 때로는 앤디처럼 흔들리고, 때로는 미란다처럼 선택하고, 때로는 나이젤처럼 버틴다. 직장인으로 산다는 건 하나의 얼굴로 사는 게 아니다. 상황에 따라, 시간에 따라, 우리는 여러 얼굴을 오가며 살아간다.
그래서 이 영화를 보면서 자연스럽게 나에 대한 물음으로 이어진다. 지금 우리는 어떤 얼굴로 살고 있는가. 그리고 그 얼굴은, 스스로 선택한 것인가, 아니면 남의 시선에 맞춘 것인가. 1편을 좋아했다면, 이 영화는 단순한 추억이 아니라 지금의 자신을 돌아보게 만드는 시간으로 남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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