꿈도 희망도 없는 낙후된 시골마을이다. 청년은 얼마 되지 않고 나이든 이들만 한 가득이다. 한두 다리만 건너면 모두가 서로를 알 법한 이 작은 마을에는 재밌는 것도, 그럴 듯한 것도 얼마 되지 않는다. 청년들은 하나 같이 마을 바깥으로 떠날 생각만 한다. 이 마을에서 나고 자란 어른들조차 그들을 잡으려 들지 않는다. 마을에 희망이 없단 걸 알아서다.
가진 건 청춘뿐인 젊은이들의 이야기다. 시골마을 역사 앞에 모여든 청춘들이 쓰게 뱉는 랩 가사가 뼈아프다. 자고로 예술이란 문명의 세례를 받아야 하는 것이 아닌가. 폭발하는 열정으로 읍내에 모여든 힙합 마니아들이지만 기껏 해봐야 서넛이 고작이다. 이들이 선 배경으로 보이는 역사는 이 마을이 그나마 읍내의 번화가란 사실보다도 모여든 이들이 마침내 떠나갈 운명임을 보여주는 듯하다. 영화 <올 그린스> 속 청춘들의 상황이 꼭 이러하다.
코야마 다카시는 제 고향이기도 한 일본 이바라키현 도카이무라를 배경으로 영화를 찍어냈다. 고등학교에 다니는 세 명의 소녀 보쿠 히데미(미나미 사라 분), 야구치 미루쿠(데구치 나쓰키 분), 이와쿠마 마코(요시다 미즈키 분)를 주인공으로, 희망 없는 마을에서 역전을 꿈꾸는 이야기를 다뤘다.
▲올 그린스스틸컷
와이드 릴리즈
청춘없음을 말하는 청춘영화
<올 그린스>는 청춘영화다. 청춘영화가 흔히 갖는 꿈과 열정, 그리고 우정의 삼박자를 이 영화 또한 품고 있다. 다만 영화는 통상의 청춘영화와는 적잖은 차별점을 갖췄다. 흔한 청춘영화들이 꿈을 향해 나아가는 청춘의 성장통을 그린다면, <올 그린스>는 돌파구 없는 이들의 발버둥 가운데서 기성세대의 책임과 구조의 문제를 자연스레 부각한다는 점이겠다.
주인공인 세 친구는 학교 내 동아리 원예부를 만든다. 오래 전 학교 옥상에 온실을 설치하고 운영됐던 역사가 있다고는 하지만 사라진지 한참인 동아리다. 여기까지는 학내 동아리가 활성화된 일본의 흔한 청춘물과 얼마 다르지 않아 보인다. <워터보이즈>가 남학생들의 수중발레를, <스윙걸즈>가 여고생들의 스윙재즈를, <헤피엔드>가 음악연구 동아리를 중심으로 청춘이야기를 그린 것을 떠올려보면 이해가 쉬울 테다.
그러나 영화는 이런 작품들과 완전히 다른 길을 걷는다. 부활한 원예부가 온실서 남몰래 기르는 건 다름 아닌 대마초다. 그저 호기심으로 재배하는 것도 아니다. 이들이 원예부를 만든 이유가 대마를 키우기 위해서인 것이다. 그저 키우는 데서 끝나지 않는다. 재배한 대마를 유통해 거액을 벌어들일 계획을 처음부터 세우고 있다. 여고생들이 학교 옥상에서 대마를 재배하다니, 누구도 의심할 수 없는 일이 아닌가. 야심찰 뿐 아니라 영리한 작업이다.
▲올 그린스스틸컷
와이드 릴리즈
학교 옥상에서 대마를 키우는 여고생들
대마 씨앗을 얻은 건 순전히 우연이었다. 음악을 위해 지역에선 꽤나 잘 나간다는 DJ와 만난 히데미다. 이 못난 DJ는 질이 좋지 못한 이다. 제 발로 찾아온 히데미를 곱게 돌려보낼 생각이 없다. 대놓고 몹쓸 짓을 하려고 추잡한 방식을 쓴다. 다행히 눈치 빠르고 간도 큰 히데미는 순순히 당하지 않는다. 도리어 그가 집에 숨겨두었던 대마 씨앗을 모두 훔쳐 나오기에 이른다.
운이 좋아 희생양이 되지 않은 히데미는 그렇고 그런 소녀가 아니었다. 히데미 곁에 있는 미루쿠와 마코 또한 마찬가지다. 그래서 이들은 대마 씨앗을 키우고 팔기로 작정한다. 이들에겐 나름 절실한 이유도 있다. 그만한 돈쯤 손에 쥐어야 이 희망 없는 곳으로부터 탈출할 수 있단 걸 알아서다.
▲올 그린스스틸컷
와이드 릴리즈
세 소녀가 친해진 계기
영화 초반 세 소녀가 친해지게 되는 계기는 적잖이 의미심장하다. 어느 사거리였나. 오가는 사람 하나 없는 시골마을의 한적한 사거리에서 사고가 발생한다. 차가 길을 건너던 젊은 엄마를 친 것이다. 쓰러진 여자를 두고 차는 뺑소니를 친다. 보는 이가 아무도 없어서다. 아니, 보는 이가 있기는 했다. 그러니까 히데미와 미루쿠와 마코가 차가 여자를 치고 가는 것을 보고 있었다. 쓰러졌던 여자는 아무도 저를 보지 않자 몸을 추스려 일어서선 아이와 함께 도망치듯 사라진다.
이름 없는 이 여자는 곧 이 마을에 남는다면 세 친구에게 닥칠 미래의 현신이다. 힙합음악을 좋아하는 문학소녀 히데미, 영민한 씨네필 미루쿠, 의리 있는 마코 모두가 졸업 후 마을에 남는다면 그렇고 그런 시골여자가 되고 말 것이다. 아무렇게나 치고 도망쳐도 누구도 신경 쓰지 않는 작은 존재가 될 것이다.
아이를 낳고 기를 수야 있겠으나, 남편 역시 이 마을에 자리한 희망도 능력도 없는 존재가 되기 십상일 테다. 히데미의 아버지는 심심하면 가족들을 때렸고, 미루쿠의 엄마는 남편을 원자력발전소 사고로 잃은 뒤 완전히 이상해지고 말았다. 전형적인 시골 농사꾼 집안의 딸인 마코에게도 부모와 달리 살 수 있을 거란 기대가 전혀 없다.
▲올 그린스스틸컷
와이드 릴리스
사는 길은 도시로의 탈출, 방법은?
도시로 나가야 한단 건 알지만 저들에겐 돈도 재능도 없다. 그런 건 이 시골엔 처음부터 없는 것이다. 그래서 대마가 유일한 해결책이 된다. 대마를 키워 판다면, 그래서 큰 돈을 쥐게 된다면 달라질 수 있다. <올 그린스>는 그렇게 탈출을 위한 범죄극이 된다. <워터보이즈>나 <스윙걸즈>가 아닌 <내일을 향해 쏴라>나 <보니 앤 클라이드>, <델마와 루이스> 류의 영화가 떠오르는 건 그래서겠다.
영화의 배경이 도카이무라란 건 꽤나 상징적이다. 작품 중간 즈음에 직접적으로 언급되기도 하거니와, 도카이무라는 일본 원자력 발전 관련 방사능 누출 사고를 언급할 때 빠지지 않고 등장하는 곳인 때문이다. 후쿠시마 원전 사고 이전까지 도카이무라는 일본 원전 사고의 대표격인 마을이었다. 일본이 1956년 원자력 연구소를 건설한 이래 전략적 원전단지로 발전시켜온 도카이무라에선 1970년대 이후에만 모두 20여 차례나 방사능 누출 사고가 발생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개중 가장 큰 사고는 1999년에 일어났다. 핵연료재처리 업체의 부실한 관리로 사망자 2명, 피폭자 667명에 이르는 대형 인재가 발생한 것이다.
이는 그대로 도카이무라의 운명을 결정지었다. 사망자는 물론이고, 직접 피폭자만 수십 명, 간접 피폭자는 수백 명에 이르는 대규모 사고는 감춰질 수 없었다. 대규모 원전 단지에다 사고로 악명까지 얻은 도카이무라에 다른 경쟁력 있는 산업을 구축할 수 있었을 리 만무하다. 도카이무라가 희망 없는 도시가 된 이유다. 여기에 더해 초고령사회와 저출산 문제까지 겹치며 가뜩이나 비전이 보이지 않던 도시가 더욱 쇠락하고 말았다.
▲올 그린스포스터와이드 릴리즈
누가 미래를 이토록 망가뜨렸나
불법적인 수단이 아니고서야 희망을 볼 수 없는 처지에 내몰린 청춘들의 이야기다. 그나마 멀쩡해 봬는 학교 선생님은 아이들에게 제가 나고 자란 고향을 떠나라고 조언한다. 어른들조차 청년을 붙들 수 없는 땅, 그런 땅이라면 방사능 누출에 의해 오염된 저주받은 땅과 다르지 않은 것이다. 그런 땅을 만든 것은 아이들이 아니다. 어른들이다. 도카이무라에 원전 관련 시설을 유치하고 그를 제대로 관리하지 못해 사람과 가정과 환경을 파괴한 이들과 기업이다. 그러나 그 피해는 아이들에게 돌아간다. 사고 당시엔 태어나지조차 않았던 이들이 피해를 입는 것이다.
어디 도카이무라만의 이야기일까. 모든 쇠락하는 지역엔 그 땅에 살았던 어른들, 책임 있는 정부와 기관, 공동체의 실패가 자리한다. 오로지 오늘만 바라보며 뒷세대를 생각하지 않았던 이들의 죄악이 뒤따르는 이들의 희망을 앗아간다. 앞선 세대의 규칙을 어기고 조언을 무시해야 저의 생존을 도모할 수 있는 상황이 영화 내내 지속된다는 건 그래서 의미심장하다. 그러나 그러고도 끝내 온전한 승리를 도모하기 어렵단 건 이 체제가 지닌 부조리함일 수가 있겠다.
영화를 보는 내내 한국의 상황을 돌아보게 된다. 영화의 제목이기도 한 '올 그린스'의 녹색 빛깔이 대마초와 관리되지 않아 마구 자라는 잡초들의 색깔처럼 느껴지는 건 우연한 일이 아니다. 누구도 돌볼 여력이 없는 방치된 국토가 저기 일본보다도 여기 한국에 더욱 많다. 초고령사회에 접어드는 속도가 일본보다 두 배나 빨랐고, 저출산 또한 훨씬 심각한 수준인 한국의 지방도시와 마을들은 이미 파탄의 지경에 내몰려 있다. 지역 거점인 광역시들마저 수십 년 뒤를 장담하기 어려운 상황 속에서도 한국은 그에 대한 근본적인 대안을 제대로 내어놓지 못한 채 진통만을 거듭하는 형국이다.
<올 그린스>는 일본의 현실 속에서 더는 고분고분해선 안 되는 젊은이들의 모습을 그려낸다. 한국의 흔한 청춘영화들이 그리는 무기력과 박탈감으로부터 한 걸음 나아가서 문제의 책임을 넌지시 겨냥하고 현실에 저항하려는 의지를 내비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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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영화평론가.서평가.기자.3급항해사 / '자주 부끄럽고 가끔 행복했습니다' 저자 / 진지한 글 써봐야 알아보는 이 없으니 영화와 책 얘기나 실컷 해보련다. / 인스타 @blly_kim / GV, 강의, 기고청탁은 goldstarsky@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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