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판도 퇴근하고 조명도 꺼졌지만 경기는 계속된다

[김성호의 씨네만세 1334] <마지막 야구 경기>

당신에게 한 게임 야구 경기로 영화를 찍으라면 어떤 경기를 찍을 건가. 나라면 가장 극적인 순간, 그러니까 한 시즌, 나아가 한 구단과 팬들의 결정적 순간을 녹여낼 수 있는 경기를 고르려 할 테다. 한국 야구영화 <퍼펙트 게임>은 최동원과 선동열, 류현진과 박찬호 이전까지 한국 프로야구 역사상 최고라고 불렸던 전설적 투수의 맞대결을 담았다. 자존심을 건 두 선수의 역투가 이어지고 점점 고조되는 분위기와 연출이 관객을 실제 경기만큼, 아니 그보다도 더 긴장케 한다.

<슈퍼스타 감사용>은 조금은 길을 틀어 간다. 오로지 최고에게만 최고의 순간이 있는 게 아니란 걸 내보인다. 압도적 꼴찌팀의 패전처리 투수, 감사용의 특별한 순간을 담아낸다. 당대 최고의 투수 박철순과의 맞대결, 그것도 박철순의 20연승을 앞두고 총력전을 벌이려는 강팀 OB 베어스를 상대로 한 등판이다. 프로 통산 1승도 없었던 감사용이 20연승을 향해 질주하는 박철순과 만나 벌이는 승부는 앞의 최고들의 것과는 또 다른 감상을 일으킨다.

물론 두 작품이 완전히 다르지는 않다. <슈퍼스타 감사용>이 최고가 아닌 주변부 선수들의 모습을 더 많이 보이는 건 사실이다. 삼미 슈퍼스타즈부터가 출중한 선수를 찾기 어려운 약팀이고, 감사용은 그중에서도 별 볼 일 없는 투수였다. 실제 통산 성적이 1승 15패이니 더 말해 무엇할까. 그러나 영화는 세상에 얼마 알려지지 않았던 그를 주인공 삼아 루저들에게 주어진 치열했던 한 경기의 이야기로 찍어냈다.

마지막 야구 경기 스틸컷
마지막 야구 경기스틸컷필름다빈

박진감 전무한 야구영화라니

그러나 어디 그것만으로 충분했을까. 영화가 그저 길을 약간 틀었다고 표현한 것은 <슈퍼스타 감사용>과 <퍼펙트 게임>이 근본적으로 다르지 않은 때문이다. <슈퍼스타 감사용>은 당대 최고의 투수와 강팀을 소환한다. 그리고 실제 이야기보다 극적 각색을 거쳐 경기를 훨씬 더 중요하고 극적이며 치열한 무엇으로 포장한다. 박철순의 16연승이 걸린 경기가 20연승이 걸린 역사적 경기로 바뀌고, 경기 내용 또한 막상막하의 치열한 승부가 된다. 요컨대 영화가 당대 약팀과 루저들을 부각시킨 건 그를 더 극적인 수단으로 활용하기 위함이다.

다른 방식이 있을 수 있을까. 더 치열하고, 더 극적이며, 더 짜릿한 영화가 아니길 바라는 스포츠 영화가 있을 수 있느냔 말이다. 너무 당연하게 제쳐둔 이 선택지가 실은 얼마든지 가능했다는 것을 이 영화 <마지막 야구 경기>가 보인다.

카슨 룬드의 신작 <마지막 야구 경기>는 독특한 작품이다. 야구, 나아가 스포츠 경기를 다룬 작품 가운데 비슷한 영화를 찾기 어렵다. 적어도 나는 단 한 편도 댈 수가 없다. 제77회 칸영화제 감독주간에 상영됐고, 제62회 뉴욕영화제, 제41회 뮌헨국제영화제에도 공식 초청된 이유가 무언지를 확인케 한다. 지난해 제26회 전주국제영화제에서도 선보였던 이 영화가 독립영화를 주로 배급해온 필름다빈을 통해 한국에서 만날 수 있게 된 건 다분히 이색적인 일이다. 이 영화가 경기를 연출하는 방식을 고려하면 영화제 현장서 수입이 가능하리라 내다본 이가 얼마 없었던 때문이다.

마지막 야구 경기 스틸컷
마지막 야구 경기스틸컷필름다빈

사라지는 야구장, 두 팀의 마지막 게임

영화는 프로가 아닌 아마추어팀의 경기를 다룬다. 매주 일요일 오후 솔저스 필드에 모여 경기를 치르는 선수들이 있다. 나이 들어 빨리 달리지도 못하고, 살이 쪄서 허리를 숙이기도 힘든 이들이 그래도 시간과 노력을 들여 경기를 이어오길 벌써 수십 년째 해왔음이 분명하다. 영화가 다루는 이들의 경기가 상당히 특별한데, 그는 솔저스 필드가 사라지게 되어서다. 이 자리에 학교가 설립되고 경기장은 없어진다. 멀리 다른 동네까지 차를 타고 나가기가 쉽지 않은 관계로 이들 중 많은 수가 야구를 영영 포기할 것이다. 말하자면 이날 경기는 두 팀 선수 중 많은 이들의 은퇴경기다.

솔직히 글을 쓰는 지금 경기에 나선 두 팀의 이름조차 모르겠다. 영화가 그를 언급이나 했는지도 확실치 않다. 유니폼 색을 따 빨강팀이랑 파란팀이라 하겠는데, 솔직히 말하자면 이들이 대비되는 색깔의 유니폼을 전원 제대로 입고 와 준 것만으로도 감사할 지경이다. 아니었다면 왕년에 야구깨나 했던 나조차 이들의 경기를 제대로 이해할 수 없었을지 모를 일이다.

일단은 시작한 것부터가 용하다. 아마추어지만 엄연히 리그가 운영되는 정식 경기다. 우리로치면 사회인리그인데, 두 명의 심판이 경기를 진행한다. 그런데 한 팀, 파란팀 선수가 8명뿐이다. 투수가 타격을 겸한대도 최소한 9명은 있어야 하는데 한 명이 오지 않은 거다. 두 심판 중 마음 약한 한 명이 그래도 마지막 경기니 봐줄 수 없을까를 물어보지만 주심은 단호하게 고개를 젓는다. 경기는 경기다. 원칙을 지키는 이가 어디에나 드물게 있다.

마지막 야구 경기 스틸컷
마지막 야구 경기스틸컷필름다빈

심판도 퇴근하고 조명도 꺼졌지만

어찌저찌하여 안 온 이를 일단 9번에 넣고 타순이 올 때까지 도착하기를 빌어보기로 한다. 그리고 그는 정말 딱 9번 타순이 들어왔을 때 경기장에 모습을 보인다. 그리고는 타격, 누가 봐도 우전안타를 치고는 달리다가 엎어져 아웃된다. 그러니까 우익수 땅볼 아웃이다. 이 경기가 이렇게 엉망진창이다.

두 팀의 경기는 하나부터 열까지 요상하다. 달리거나 숙이지 못하는 선수들이 어찌저찌 치고 달린다. 그런데 그게 또 이들 각자의 최선이다. 구력은 거짓말을 못한다고, 공을 따라가 맞히는 모양새, 또 날아오는 공을 포구하는 꼴은 제법이다. 그냥 늙고 낡았을 뿐이다. 늙고 낡은 이들이 치고 달리고 잡고 던진다. 점수도, 아웃카운트도 쌓여간다. 나름대로 치열한 경기다. 균형이 꽤 오래 유지되고 마지막 한 점으로 갈릴 연장전에 돌입한다.

분명히 기록표는 긴장감 넘치는 데 화면은 딴 판이다. 붕 휘두르는 스윙들과 뒤뚱뒤뚱 잡아 던지는 모습들이 있을 뿐이다. 그나마 있던 한둘의 팬, 그러니까 마지막 경기를 보러 찾은 어느 선수의 가족들도 그만 돌아간 뒤엔 경기장엔 환호랄 것이 전혀 없다. 마치 눈 온 뒤 마당을 쓸 듯, 제각기 제 할 일을 하는 이들의 모습만 있을 뿐이다. 누군가는 애들 장난이라고들 하지만, 이게 정말 장난인가. 그렇다고 아주 진지하거나 열의가 넘친다고 하기엔 또 그렇지도 않다. 이 경기, 도대체 뭐지 하는 생각이 수시로 지나간다.

마지막 야구 경기 포스터
마지막 야구 경기포스터필름다빈

야구, 그리고 경기를 넘어 바라보는 것

경기가 길어지며 조명 없는 운동장이 어두움에 덮인다. 땅볼도 뜬공도 보이지 않는 지경이 되자 각자 그라운드 가까이 차를 끌어와 라이트로 조명을 대신한다. 연장을 버티지 못하고 심판까지 퇴근했는데 경기는 이어진다. 승부는 승부니까. 기록지를 작성하는 게 낙인 어느 팬이랄까, 무튼 왜 경기장에 나오는 지 알 수 없는 그가 심판 역할을 대신한다. <마지막 야구 경기>는 두 팀의 승부를 그리지만 승부보다는 경기 그 자체에 집중한다. 이들은 왜 야구를 하는 것일까, 야구는 이들에게 어떤 의미일까를 생각하게 한다. 더는 할 수 없게 된, 그래서 마지막이 된 야구경기, 가족들조차 즐기지 않는 이 경기를 지속하는 이유가 무언지를 그저 가만히 보여준다.

99분의 러닝타임 동안 주말 오후 한 경기가 담겼다. 마운드에서 공을 던지는 동안 저 멀리 해가 진다. 바람이 불고 계절이 변화하는 모습 또한 담겨 있다. 경기장 곁에서 피자를 파는 푸드트럭 주인은 제 일을 싫어하고 차를 몰고 멀리 떠나려 한다. 그 사실을 다른 이들은 알았을까. 매일 야구만 하다 처음으로 이야기를 주고 받는 선수들도 있다. 끝나고 맥주 한 잔 같이 하겠지만 경기가 끝났다고, 이기고 졌다고, 다시는 경기를 하지 못하게 되었다고 울고불고 하지도 않을 것 같다. 가만히 앉아 그때 참 좋았는데, 그런 이야기를 선선히 나눌 것만 같다.

그저 어느 사회인야구 동호회에 따라가 하루를 같이 보내고 돌아온 인상이다. 중요하지 않은 경기지만, 꽤 열심히 했다고 말할 수 있는 그런 경기가 누구에게나 있을 테다. 그 기억들이 좋아서 자꾸만 찾게 되는 그런 경기가 누구에게나 한 번쯤은 있었기를 바래본다. 돌아보면 나 또한 그랬다.
덧붙이는 글 김성호 평론가의 브런치(https://brunch.co.kr/@goldstarsky)에도 함께 실립니다. '김성호의 씨네만세'를 검색하면 더 많은 글을 만날 수 있습니다. goldstarsky@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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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영화평론가.서평가.기자.3급항해사 / '자주 부끄럽고 가끔 행복했습니다' 저자 / 진지한 글 써봐야 알아보는 이 없으니 영화와 책 얘기나 실컷 해보련다. / 인스타 @blly_kim / GV, 강의, 기고청탁은 goldstarsky@naver.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