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9년부터 나온 잡지를 2026년에 읽고 있다. 혼자서가 아니다. 동료 비평가와 감독, 배우, 그리고 영화제를 꾸려 가는 이들까지 몇이 모여 함께 읽고 의견을 나눈다. 한국독립영화협회를 통해 모집한 <독립영화> 다시 읽기 모임이다. 이 모임을 제안하고 꾸려가는 이로서 나는 27년 지난 잡지를 읽는 이유가 무엇인지를 돌아본다. 최근 발간된 55호, 그리고 내년 나올 잡지의 편집위원으로 잡지의 정체성과 가능성을 확인하려는 게 우선된 이유였다.
그러나 오늘에 이르러 나는 그보다 중한 이유가 있다고 믿는다. 27년 전 잡지가 다루고 있는 이들과 오늘의 우리(여기 포함되는 게 영화 창작자며 비평가만이 아닌 독립영화에 관심을 가진 독자 일반이라 여긴다) 사이에 같고 다름을 읽어내는 것이 더욱 의미가 깊다고 여긴다. 다시 읽은 잡지와 모임 이야기를 구태여 전하는 까닭이 여기에 있다.
오늘과 달리 글 잘 읽히던 시대, 계간지로 출발한 잡지는 창간 바로 얼마 후인 1999년 가을에 2호가 나왔다. 발간주체인 한독협이 막 닻을 올렸고, 국가 영화정책의 주무부처인 영화진흥위원회가 갓 출범한 때다. 한국 독립영화의 나아갈 길, 또 영진위가 주관하는 여러 지원책의 방향성에 대한 논의가 잡지 가운데 주요하게 담긴 건 그 때문이겠다. 모임에 참석한 이들의 관심 또한 이 두 부문에 주로 닿았다.
▲독립영화 2호책 표지
김성호
한국 언더그라운드 문화와 독립영화의 접점
개중 가장 많이 이야기된 꼭지는 지금은 사라진 '십만원영화제(십만원비디오페스티발)'에 대한 글과 그 구심점이던 최소원 영화제 사무국장 인터뷰다. 오늘에 이르러 기억하는 이 얼마 남지 않은 행사이지만, 독립영화판에 몸 담은 이들이라면 문 닫은 지 한참이 지났음에도 적잖이 알고 있는 영화제기도 하다. 그건 이 영화제가 남긴 발자국이 그만큼 분명했던 때문일 테다.
십만원비디오페스티발. 1999년 6월 홍익대학교 앞 클럽에서 문을 연 이래, 만 6년 동안 17회 치러진 행사다. 영화 한 편 만들자면 목돈을 들여야 했던 필름시대, '단돈 10만원으로 영화를 만들자'는 역주행이 이 행사의 초기 정체성을 이뤘다. 돈 없어도, 전문적이지 않아도, 대단한 경력이 없더라도 누구나 감독이 되고 영화를 만들 수가 있다는 발상이 자생적 영화축제를 이뤘다. 민주화가 이뤄지고 학생운동이며 저항의 기치가 더는 힘을 발하지 못하던 20세기 말, PC통신으로 대표되는 신세대의 등장이 곳곳에서 전에 없던 흐름을 만들어내던 때다. 스튜디오 녹화며 대자본이 투입된 촬영팀이 더 익숙하던 시대, 누구나 카메라와 십만원만 있으면 감독이 될 수 있다던 영화제는 얼마나 앞서갔던 걸까.
독립영화란 개념조차 자리 잡히지 않았던 시기에 십만원영화제는 선명한 파문을 일으킨다. 미처 확인하고 바로잡기도 벅찼을 만큼 TV며 신문 같은 기성 매체가 십만원영화제를 찾아 보도한 건 그 때문이었을 테다. 기사가 쓰인 건 이들이 8번째 행사를 마치고 '화면조정중'이란 이름으로 휴식기를 갖던 때였다. 십만원영화제에서 십만원비디오페스티발로 이름을 바꾸기로 결정했고, 그 정체성과 나아갈 방향에 대한 고민을 거듭하던 시기였다.
▲독립영화 2호2호에 실린 핵심 꼭지, 십만원영화제 인터뷰
한국독립영화협회
정체성을 고민하며 나아가던 그 때 그 시절의 청춘
십만원에서의 아마추어리즘은 단지 기술적 미숙함을 칭하지 않는다.
우린 아무런 독창성이나 실험정신 없이 단지 기술적으로 후졌다 하여 아마추어의 범주에 들어간다고 믿지 않는다. 아마추어리즘은 그 역인 것이다. 기술적으로 만약 좀 떨어진다손 치더라도 독창성과 실험정신이 살아있다면 우리는 그 작품을 아마추어리즘의 범주에 넣으며, 진정한 아마추어는 거기서 어떻게 질을 더 향상시킬까를 고민하고 치열하게 행동하는 사람들이다. (중략)
비디오를 하위매체로, 아마추어를 하위그룹으로 인식하는 풍토는 위험하다. 그것은 단지 작품에 따른 매체의 취사선택과 마인드의 문제일 뿐이다. 그 매체가 무엇이든 그 안의 영혼이 가장 우선이다. 그리고 그것은 항상 통한다. 특히 좋은 카메라, 혹은 멋진(?) 편집시스템(이 부분 역시 작품에 따른 취사선택의 문제 이상 아니다)을 가지면 좋은 작품이 나올 거라고 생각하는 이들에게 말이다. -59p
지난 창간호에서도 소개됐던 행사다. 출품작은 여럿 받았으나 도저히 상을 줄 작품이 없어 상금 10만원이 주어지는 대상작을 선정하지 못했던 때다. 비싼 영화용 필름은 구하지 못해도 당시 보급됐던 8mm 가정용 캠코더를 가진 이는 여럿 있던 시기였다. 또 마침 아날로그에서 디지털로 전환 또한 이뤄지며 6mm 디지털 캠코더도 출시됐다. 서울, 그중에서도 젊음과 청춘, 변화의 열기로 가득하던 홍대를 놀이터로 삼았던 이들이었다. 이들은 기술의 발전이 상상과 표현의 변화로 이어지리라 판단했다. 그 결과가 영화를 매개로 한 판 놀이를 벌이자는 선택으로 이어진 건 결코 우연이 아니다.
아마추어와 프로의 정체성에 대한 고민, 또 자본과 기술적 역량 부족에도 열정과 탐구, 실험정신으로 격차를 극복해보려는 의지가 글 가운데 두드러진다. '우리가 돈이 없지 가오가 없냐'는 자세로, 그 가오에 해당하는 열의며 도전정신, 아이디어 따위를 모아보려는 생각이었을 테다. 그러나 영화제란 어디까지나 영화제다. 영화가 주인공이 되는 행사란 뜻이다. 영화제의 격은 결국 출품작이 결정한다. 수차례 수상작을 결정하지 못했던 기록, 또 수시로 수준을 말할 밖에 없었던 인터뷰들이 하나 같이 들어오는 작품들의 미흡한 격을 겨냥한다. 작품은 상투적이고 상상력은 제한돼 있었던 것이다. 아마추어를 발굴하는 게 아니라 수준 낮고 욕구만 있는 이들의 놀자판이 될지 모른다는 우려가 이들 가운데 역력했음을 엿보게 된다.
▲독립영화2호엔 영화진흥위원회 출범과 맞물려 정책 좌담회 특집 등도 함께 꾸려졌다.
한국독립영화협회
열정과 노하우는 끝내 이어지지 못했다
이 영화제 하면서 보면 충무로에서, 또는 굉장히 잘 나가시는 분들이 모자 푹 눌러쓰고 온다. 왜 오냐면, 주로 상상력에 자극을 받을려고 오는데, 과연 그런 부분이 있는가. 그 부분을 십만원이 해 줘야 되는 역할이라고 생각한다.
내가 생각했던 처음의 구도는 주류문화가 있고 십만원영화제가 있을 때, 서로 피드백하고 또 자극을 주고 그랬을 때, 하나의 의미는 그걸 보는 관객들이 뭔가 새로운 걸 보고 이건 다르구나라는 걸 한 번이라도 봐 준다면, 진짜 주류에서 장난을 치더라도 비판적으로 볼 수 있고, 그게 그 사람들한테 더 큰 자극이 될 수 있고, 요만큼 시작하지만 나중에 문화를 조금 더 풍족하게 할 수 있는 저변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 -66p
한때 일어났다가 기획자, 또 주최 측의 여력이 소진되며 문을 닫고 마는 많은 행사가 있다. 누구도 돌아보지 않는 땅에서 끝내 작은 그룹이 서로를 보듬는 자리쯤으로 전락하는 행사도 많다. 십만원영화제가 그런 사례 가운데 하나에 불과했을까. 모임에서 당시를 기억하는 이들의 설명으로 사정을 더욱 깊이 들어볼 수 있었다. 그저 그렇고 그런 작은 집단이 찾는 행사를 넘어 일군의 새로운 젊은이들이 결집하는 대표적 축제였다고.
그러나 영화제는 끝내 확고한 정체성을 갖추지는 못하였다. 최소원을 중심으로 하는 기획자들의 역량이 절대적이었고, 도달하는 작품들은 주류가 이루는 것 이상에 닿지 못했다. 잡지에 실린 인터뷰에서도 드러나는 바, 영화제가 갖는 성격과 정체성, 참여의 민주화란 정신 등에 대한 집중적인 질문에 대체로 회피하거나 동문서답하는 것 또한 영화제의 한계를 보여준다. 영화제에서 페스티벌로, 극장 안에서 밖으로 나아간 건 들어오는 작품의 수준을 벗어나려는 노력이었겠으나 거기까지였다.
▲십만원 비디오 페스티발포스터십만원비디오페스티발
그들이 걸음을 멈춘 이유
영화제가 멈춘 결정적 계기가 행사의 기반이던 활력연구소의 폐소였단 사실은 주목할 만하다. 좀처럼 후원과 지원을 따내지 못해 가뜩이나 움츠려 있던 행사였다. 2002년 이명박 서울시장 임기가 시작된 뒤엔 영화제를 유지할 수 있는 기초여건조차 마련하기 버거워졌다. 최소원 사무국장이 폐지를 공표한 뒤 "서울시의 일관되지 않고 무성의한 행정에 맞서는 게 힘들었다"고 발언했을 정도다. 여기에 행사를 이어오며 누적된 기획자들의 여력 소진이며 고인 인적풀의 역량적 한계도 문제가 됐다. 놀자고 연 행사가 6년, 17회, 그것도 영화계를 넘어 사회적 파문까지 일으켰으니 충분한 걸까.
읽고 나서 드는 감정은 아쉬움이다. 십만원영화제는 1999년에 일어나 2003년에 끝을 고했다. 한 시절 열정 가득한 젊은이들 사이에 새로운 기류가 되었으나, 뒤 이은 세대에게 지향이며 이정표가 되어주진 못했다. 인터뷰에서 야심차게 선언됐던 목표와 계획들, 이를테면 해외 영화제며 영화인들과의 교류, 주류 문화와 공존하는 생태계 구축 등은 이뤄지지 않았다. 이게 어디 이 영화제 주최측의 문제일까. 어디 그들만의 실패일까. 묻지 않을 수 없다.
프로 기획자가 되겠다는 최소원은 결국 영화계를 떠났다고 했다. 뒤를 이은 비슷한 규모 영화제들에 비해서도 꽤나 성공적이었던 십만원영화제의 노하우는 전해지지 못했다. 그 역할을 이어 지탱하는 행사 또한 자리하고 있다 말하기 어렵다. 그러니까 한국 문화예술계, 독립영화계는 아까운 자산을 상실한 것이다. 그 원인 중 주요한 부분으로 지목된 게 이명박 서울시의 행정, 지원은 못할망정 방해에 가까웠던 무성의한 시정이 자리한단 사실이 개탄스럽다.
상황은 얼마나 나아졌는가를 돌아본다. 오늘의 작은 영화제들은, 또 영화들은 평론가며 기자 한 명을 마주하기 어렵다고 아우성이다. 겨우 마련한 독립영화의 토양 또한 수시로 위협받는다. 지난해 서울시 예산삭감으로 폐지를 실제로 선언했다 겨우 부활한 독립영화쇼케이스와 역시 폐관할 뻔한 오!재미동 사례가 멀리 떨어져 있지 않다. 이미 있는 자산조차 지키지 못하는 우리가 더 나은 미래를 기대할 수 있을까. <독립영화> 2호에 실린 십만원영화제의 아직 타오르던 불꽃을 마주하며 씁쓸함을 느낀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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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영화평론가.서평가.기자.3급항해사 / '자주 부끄럽고 가끔 행복했습니다' 저자 / 진지한 글 써봐야 알아보는 이 없으니 영화와 책 얘기나 실컷 해보련다. / 인스타 @blly_kim / GV, 강의, 기고청탁은 goldstarsky@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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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7년 전 뜨거웠던 청춘들의 영화축제, 왜 지금은 멈췄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