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국주의(Militarism / 軍國主義)란 군대가 국가 정책의 최상위 가치가 되어 사회 전반이 전쟁수행을 위하여 재편된 체제와 이념을 뜻한다. 20세기를 전후하여 청일전쟁, 러일전쟁, 중일전쟁, 태평양전쟁(2차세계대전) 등, 아시아와 전세계를 전쟁의 소용돌이로 몰아넣은 일본 제국은 바로 이러한 군국주의의 대표적인 사례로 꼽힌다.
한때 아시아에서 가장 먼저 근대화에 성공하고 열강의 반열에 든 국가였던 일본은 어떻게 군국주의의 광기에 물들게 되었을까. 27일 방송된 tvN <벌거벗은 세계사>에서는 '군국주의는 일본을 어떻게 광기에 몰아넣었나'편을 조명했다.
일본은 19세기 후반부터 세계의 열강으로 올라섰고, 여러 전쟁에서 승리하면서 '군사력이 곧 국력'이라는 인식이 높아졌다. 일본은 점차 전쟁이 국력을 키우는 가장 빠른 방법이라고 확신하게 되었다. '군대'의 위상은 날로 높아지면서 군부가 국가를 지키는 차원을 넘어, 정치, 경제,사회를 이끌어야한다는 생각을 가지게 된다.
1937년 발발한 중일전쟁은 이미 진행중이던 일본의 군국주의가 더욱 가속화되는 계기가 됐다. 중일전쟁이 장기화되면서 일본은 '국가총동원법'을 제정하여 정부가 의회 승인없이 사람, 물자, 기업, 언론을 마음대로 동원하고 통제할수 있게 했으며, '모든 국민은 국가를 위하여 헌신해야한다'는 명분을 내세웠다.
아이들도 징벌 대상
▲벌거벗은세계사군국주의
tvN
일본은 국가총동원법에 따라 민간에서 강제로 식량, 금속 등 물자를 징발했다. 무기를 만들 철이 부족해지자 사찰의 범종이나 공공시설의 계단 손잡이와 우체통, 심지어 아이들의 장난감까지도 징발 대상이 됐다. 전쟁을 위하여 모든 물자가 군대로 모이게 되면서, 민간인들은 마음대로 물품을 살수도 없었고, 배급제를 통하여 국가가 허락한 품목과 수량만 구매가 가능했다. 사치를 매국으로 간주하는 사회 분위기가 만연하면서 아이들은 학교에 화려한 학용품을 가져오는 것도 금지되었고, 여성들은 파마를 하는 것도 사치를 부린다며 매도당하기도 했다.
국가총동원법으로 수많은 사람들이 강제로 군의 징집 대상이 됐다. 초기에는 15세 이상 60세 이하의 남성들만 징집대상이었으나, 전쟁이 길어지면서 여성, 아이, 노인들까지 동원되기 시작했다. 군국주의의 광기에 휩싸인 일본에서 군인이 된다는 것은 가장 큰 애국이자 영광으로 추앙받았다. 또한 사람들은 군에 징집되어 입대하는 가족이나 지인을 보고도 사기를 꺾는다는 이유로 마음껏 울지도 못했다.
"아들의 입대 소식을 들었을때 저는 울지 못했습니다. '명예로운 입대를 왜 슬퍼하느냐, 축하해야할 일이다'라며 이웃사람들이 지켜보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슬픔조차 허락되지않는 사회, 그것이 진짜 지옥이었습니다' (에모리 요코, <이웃반의 전쟁> 중에서)
각종 사유로 인하여 전쟁에 나가지 못하는 사람들이 있는 집은 '비국민' 취급을 받으며 이웃들의 멸시와 괴롭힘을 당하면서 사회적 낙인이 찍혔다. 마을마다 서로를 감시하는 분위기가 형성되며 민심은 흉흉해졌다.
1938년 '츠야마 대량 살인사건'의 범인 토이 무츠오는 과거 병력 때문에 징병을 기피했다는 사실이 알려지면서 마을 사람들에게 따돌림을 받게 되자 앙심을 품었다. 그는 총기를 준비하여 마을을 돌며 자신의 가족들과 마을 사람들을 대량으로 학살한 뒤 본인도 자살했다. 당시 이를 저지해야할 일본의 치안이 전쟁으로 인하여 공백 상태였던 것도 희생자가 급격히 늘어난 또다른 이유였다. 이 사건은 일본 사회에서 군국주의로 인한 사회적 낙인이 초래한 대표적인 비극으로 꼽힌다.
이러한 일본 사회의 '인간성 붕괴'가 가장 극단적으로 드러난 곳은 역시 최전선의 군대였다. 1882년 일본은 메이지 천황의 이름으로 '군인칙유'라는 지침서를 내리면서 상관에 대한 명령거부를 천황에 대한 반역으로 간주하며 철저한 상명하복을 군인들에게 강요한다. 일본군 내부에서는 군기를 내세워 구타, 물고문 등 끔찍한 가혹행위가 상습적으로 만연하게 된다. 폭력과 가혹행위에 익숙해진 일본군은, 이후 전쟁포로, 점령지 민간인, 식민지 출신자 등 약자들에게 더욱 잔인한 폭력을 일삼았다.
일본군들은 죄 없는 민간인을 잔혹하게 학살했고, 장교들은 포로를 상대로 한번에 목을 베는 '참수대결'까지 벌였다.일본 언론은 이러한 전쟁범죄를 마치 스포츠처럼 보도하여 군인들을 영웅처럼 미화하고 열광했다. 일본의 학교에서는 수업 대신 전쟁기술을 가르쳤고 어린 아이들은 전쟁놀이에 빠져들었다.
하지만 이러한 광기는 태평양전쟁의 패망이 가까워지면서 일본 자국민들에게도 부메랑으로 돌아왔다. 1945년 '오키나와 전투'에서 일본군과 주민들은 미군의 폭격과 공습을 피하여 동굴속에 몸을 숨겼다. 그런데 한 아기가 울기 시작하자 일본군은 적군에 위치가 발각될 것을 두려워하여 자국민인 아이와 일가족을 살해하는 만행을 저질렀다. 군인이 민간인을 지키는 게 아니라 제거해야 할 걸림돌로 간주할 만큼 인간성을 상실한 당시 일본군의 현 주소였다.
군국주의 광기의 희생양
▲벌거벗은세계사군국주의TVN
당시 일본의 식민지였던 조선인들도 이러한 군국주의의 광기에 희생양이 되어야했다. 일본은 수많은 조선인들을 전쟁에 강제로 동원하여 물자를 착취했다. 태평양전쟁 당시 태평양의 산호섬인 밀리환초에서는 미군의 포위로 섬이 고립되자 극심한 식량난에 시달리던 일본군들이 강제노역으로 끌려온 조선인을 대량학살하고 인육을 먹는 식인행위까지 벌인 사실이 훗날 생존자들에 의하여 밝혀졌다.
1945년 8월 15일, 일본은 마침내 연합군에 무조건 항복을 선언한다. 하지만 패전 이후에도 사회적 광기는 계속됐다. 전쟁의 여파로 인하여 정상적인 사회 시스템이 완전히 붕괴된 일본은 치안이 무너지고 각종 흉악범죄가 만연하는가 하면 전염병까지 창궐하며 후유증에 시달려야했다.
1948년 1월 26일 벌어진 '제국은행 살인사건'은 당시 일본의 망가진 사회 분위기와 행정시스템을 단적으로 보여준 비극이었다. 일본 도쿄의 제국은행에 후생성(보건복지부) 직원을 자처한 남자가 찾아와, 은행직원들에게 인근에 전염병 확산 때문에 예방약을 복용할 것을 권했다. 하지만 직원들은 남자가 권하는 약을 마시고 집단 이상증세를 보이며 차례로 쓰러졌다. 남자는 그 사이에 은행에서 현금과 수표를 챙겨 도망쳤다.
남자의 정체는 강도였고 직원들이 복용한 것은 독극물이었다. 이 사건으로 12명의 은행직원들이 숨졌다. 당시 무너진 일본의 치안과 행정으로 인하여 민간인도 쉽게 독극물을 구할 수 있었고, 은행같은 공적기관조차 특정인물의 신원을 제대로 검증할 수 있는 대비 체계가 없었기 때문에 벌어진 비극이었다.
용의자로 체포된 화가 히라사와 사다미치는 일본 경찰의 강압적인 신문에 시달리다가 결국 자백조서를 쓰고 범행을 인정했다. 하지만 그가 제국은행 사건의 진범이었는지는 의문으로 남아있다. 히라사와는 사형판결을 받았지만 집행되지는 않았고, 40년간 옥중에서 복역하다가 1987년 95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또한 일본은 전후 극심한 식량난에 시달려야했다. 무너진 배급시스템으로 인하여 정상적인 시장체제가 붕괴되고 암시장이 성행했다. 전쟁으로 부모를 잃은 수많은 전쟁고아들은 거리로 내몰렸고, 여성들은 자신의 물건을 내다팔거나 성매매를 통하여 생계를 유지해야했다. 가난에 시달린 부모들은 아기를 낳고도 키울 여력이 없어서 유기하는 사례가 속출하기도 했다.
전후 일본 사회의 범죄율은 이전보다 2배 이상 급등했다. 1948년 한해에만 일본 역사상 최대인 약 160만건의 범죄가 발생한 것으로 집계됐다. 1948년 1월, 아이들의 출산과 입양을 돕던 '코토부키 조산원'에서는 아이들을 이용하여 정부 배급품을 빼돌리고, 열악한 환경에 방치하여 약 100명에 이르는 영아가 집단으로 사망하는 사건이 벌어져서 일본 사회를 충격에 빠뜨렸다.
살인혐의로 체포된 조산원의 원장부부는 "우리는 죄가 없다. 가난한 부모는 아이를 제대로 키울수 없으니 차라리 일찍 죽는게 낫다"는 망언을 하기도 했다. 일본 법원은 사망한 영아들 대부분이 호적에 올라있지 않아 신원이 불분명하고 사고사인지 고의인지 구분하기 어렵다는 이유로, 살인혐의중 일부만 인정하여 원장 부부에게 징역 4년과 2년을 내리는데 그쳤다.
일본은 1947년 12월, 아동복지법을 제정하여 전쟁이후 급증한 전쟁고아와 빈곤아동 보호에 나서기 시작했다. 이는 일본에서 출산과 양육을 국가와 사회가 함께 책임져야 한다는 인식이 형성되는 변화의 계기로 작용했다.
패전 이후 일본군은 해산되었고 군국주의 체제는 마침내 붕괴되었다. 전쟁범죄를 주도했던 여러 군부 인사들은 전범재판을 통하여 처벌을 받았다. 군국주의에서 벗어난 이후에야 일본은 조금씩 전쟁의 후유증에서 벗어나 사회시스템을 회복하고 경제발전을 이뤄내게 된다.
전쟁의 가장 큰 피해는 결국 '전쟁을 겪은 사람들'이 받게 된다. 군국주의는 사라졌지만, 비극의 역사가 남긴 아픈 교훈만큼은 잊지 말고 기억해야 할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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