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랜 오해 뛰어넘은 이들의 사랑... 한국과 일본의 관계를 읽다

[김성호의 씨네만세 1327] '영화와 책' 츠지 히토나리, 공지영 <사랑 후에 오는 것들>

사랑은 혼자서는 할 수 없는 것이다. 적어도 내게는 그렇다. 철학계가 오래도록 고민했다는 세 가지 개념, 그러니까 정의와 사랑과 예술을 두고 오래도록 고민했던 시절이 있었다. 세상에 사랑이라 일컬어지는 수많은 것들을 그러모아서 그 모두가 담기고 다른 무엇은 담기지 않게 하는 정밀한 울타리를 세우고자 했던 시간이 이름난 철학자가 아닌 내게도 있었다. 그 끝에 도달한 답은 '사랑이란 나보다 남을 더 우선하는 것'이란 것. 개체로 태어나 사멸하는 인간이 본능이라 해도 좋을 이기를 넘어서 다른 무엇을 우선할 때, 나는 그 모든 순간에서 사랑을 발견한다. 남녀 간의 사랑이라 해도 다르지 않다. 그러니까 사랑은 혼자서는 할 수 없는 것이다.

사랑은 아름답지만 영원히 아름답진 않다. 사랑이 아름답기만 한 것이라면 구태여 결혼식과 같은 예식도 필요하진 않았을 테다. 검은 머리가 파 뿌리가 다 되도록, 그러니까 오늘이 아니라 내일과 모레, 일 년과 십 년, 달라진 나와 당신까지를 모두 끌어안고 사랑하겠다는 각오는 그것이 당연하지 않기에 필요하다. 세상 가장 열렬했던 사랑도 언젠가는 변한다. 제때 적절하게 변하지 못한 사랑은 관계를 망친다. 세상에 사랑만큼, 어쩌면 그보다도 이별이 흔한 것도 그래서겠다.

<사랑 후에 오는 것들>은 '사랑 후'를 말한다. 2024년 드라마로 제작돼 한국과 일본 양국에서 대단한 화제가 됐고, 20년의 시간을 건너 다시 출간된 소설까지 상당한 인기를 끌었다. 주연을 맡은 일본 배우 사카구치 켄타로는 유명한 예능프로그램 여럿에 출연하며 한국 톱스타 못잖은 인기를 누리기도 했다. 지난 시대 기무라 타쿠야, 오구리 슌, 츠마부키 사토시 등이 한국서 차지했던 자리를 이어받은 적자가 되었달까. 데뷔 30년을 코앞에 둔 아역배우 출신 이세영도 일본에 제 얼굴을 알렸다. 30여 년 전 한일 문화개방 뒤 활발하게 일었으나 해소되지 못한 역사문제를 비롯해, 한일 무역분쟁, 노 재팬, 일본 내 혐한기류 등으로 멈춰 있던 문화적 교류가 본격 재개된 작품으로 주목받았다(관련기사: 혐한, 노재팬 뛰어넘고 탄생한 이 사랑의 의미 https://omn.kr/2hvvh ).

사랑 후에 오는 것들 책 표지
사랑 후에 오는 것들책 표지소담출판사

두 권이 한 쌍을 이루는 특별한 로맨스

원작은 소설이다. 츠지 히토나리와 공지영이 각각 쓴 2005년 작 동명 소설로, 양국이 국교정상화 40주년을 맞아 2005년을 '한일우정의 해'로 지정한 데 발맞춰 기획됐다. 1999년 에쿠니 가오리와 츠지 히토나리가 여자와 남자 입장에서 각기 쓴 <냉정과 열정 사이>가 일본과 한국 양국에서 대단한 성공을 거둔 상황에서, 한국 내 출판을 맡았던 소담출판사가 같은 형식으로 일본 남성과 한국 여성의 이야기를 담은 작품을 다시금 기획한 것이다.

두 권의 책이 짝을 이뤄 하나의 이야기를 이룬다. 문학적 관점에서 아주 새로운 건 아니다. 인물 간, 특히 남녀 연인의 관점을 달리한 서술로 독자에게 조금씩 진실에 다가서도록 하는 전개는 과거 서간체 소설을 비롯해 추리물 등 여러 작품이 시도했던 양식이다.

그러나 전격적으로 서로 다른 두 작가가 각각의 책을 통해 제 성별의 인물 입장에서 같은 이야기를 달리 써내는 건 전례를 찾아보기 어려운 시도다. <냉정과 열정 사이>의 실험이 성공을 거둔 뒤, 국경을 넘어 이뤄진 또 한 번의 도전이다. 한국 작가가 나선 만큼 로맨스의 한 축은 한국 여성이다. 일본 로맨스 소설의 한국 내 주된 독자층인 젊은 여성을 겨냥한 전략은 성공을 거뒀다. 발간 직후 베스트셀러 최상단에 올라 무려 수십만 부가 팔렸다.

사랑 후에 오는 것들 스틸컷
사랑 후에 오는 것들스틸컷쿠팡플레이

'사랑'이 아니라 '사랑 후'를 말한다

제목은 사랑이 아니라 '사랑 후'를 말한다. 사랑이 끝난 자리에 남는 것은 무엇인가를 보인다. 츠지 히토나리가 쓴 책을 먼저 읽는 것이 바람직한 순서일 테다. 이런 류의 소설이 대개 그러하듯, 더 많은 진실을 감춘 이도, 더 깊은 감정을 기억하는 이도 대개 여성인 때문이다. 7년의 시간을 오가는 소설이다. 현재는 작품이 쓰인 2000년대 초반, 한국이다. 베스트셀러 작가로 한국과 일본에서 크게 성공한 사사에 히카리가 방한한다. 출판사에선 담당 편집자와 통역사를 내보내는데, 통역을 맡은 이가 갑작스레 일이 생겨 일본어에 능한 홍이가 그를 맡기로 한다. 사사에 히카리란 필명으로 성공한 이는 아오키 준고, 7년 전 일본에서 홍이와 사랑한 남자다.

누구에게나 절절했던 순간이 한 번쯤은 있었으리라 짐작한다. 읽는 내게도, 소설 속 화자에게도 그런 순간이 있었다. 우리는 왜 가장 필요한 것을 그것이 필요한 순간이 지나고서야 알게 되는가. 지금 아는 것을 그때 알았더라면, 지금 가진 것을 그때 가졌더라면. 그런 후회가 남는 것도 자연스러운 일이다.

사랑은 지났으나 아주 끝나지는 않았는가. 무려 7년의 시간이 흘러 사내는 제가 사랑했던, 그리고 여전히 사랑하고 있는 여자 앞에 선다. 모든 오해와 뒤틀린 감정, 무엇보다 서로에게 달리 흐른 시간을 딛고서 둘은 맺어지는가. 아니면 또 한 번 엇갈리는가. 누군가는 생각할 테다. 7년은 긴 시간이라고. 가장 뜨겁던 사랑도 차갑게 식어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게 하기 충분하다고. 그러나 또 누군가는 말할 테다. 진짜로 사랑이 지나간 자리라면 아무렇지 않을 수는 없으리라고. 사랑 후에 오는 것이 반드시 있다고.

사랑 후에 오는 것들 스틸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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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과 드라마, 그 같고 다름에 대하여

츠지 히토나리는 특유의 섬세하며 낭만적인 필치로 일본 남자의 사랑을 적는다. 사랑이란 홀로 할 수는 없는 것이기에 괴로워하며, 그러나 마음처럼 되지는 않는 것이기에 거듭 다가서는 청춘 아오키 준고를 그려낸다. 지난 절절함이 여전한 절절함이란 걸 확인한 아오키 준고의 다가섬에 이 나라 많은, 이제는 아마도 중장년이 되었을, 여성들이 설레어 한 것도 자연스러운 일이다.

공지영은 또한 저 나름의 붉고 선명한 색채로써 츠지의 글을 맞이한다. 일본 남자가 알지 못한 한국 여성의 감성이 책장을 뚫고 솟구치는 순간이 여럿이다. 사람이 보이는 츠지의 글에 비하여 국적과 성별이 두드러지는 게 다분히 그 시절 한국문학의 감성을 알게끔 한다. 시인 윤동주와 해소되지 않은 역사문제, 일본에 대한 불편한 감정을 20대 청춘의 연애 가운데 욱여넣은 당시의 소설이 오늘과 달라진 감성을 내보이기도 한다. 20년의 시차를 건너 제작된 드라마가 이를 대부분 덜어낸 것도 그래서일 테다.

무엇보다 오늘은 국제연애와 결혼, 그중에서도 일본 여성과 한국 남성(2025년 국제결혼 중 4위 조합)의 연애며 결혼이 급속히 늘어나고 있는 세상이 아닌가. 이제 누구도 그들의 만남에 대하여 소설 속에서와 같은 거부감을 표하지 않는다. 대놓고는 더더욱 그렇다. 역사적이고 정책적이며 윤리적으로 다가설 뿐이었던 한국과 일본의 관계는 20여 년의 시간이 지나 문화적인 접점 또한 확고하게 갖추었다. 자연스럽고 바람직하다.

사랑 후에 오는 것들 포스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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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정 너머 진정한 관계맺음을 위해

한국과 일본의 같고 다름이 한국 여성과 일본 남성의 관계로부터도 두드러진다. 그중 많은 수가 이해에 닿는다. 작품 속 인물들뿐 아니라 읽고 보는 독자와 시청자에게도 그렇다. 그 같고 다름 가운데서 작품이 진실로 주목하는 건 같음이다. 저와 다른 상대에게 기꺼이 다가서려 하는 마음과 의지, 욕구를 비추는 이유다. 한국과 일본 사이, '한일우정의 해'를 기념하고 관계를 증진하려 시도한 이들이 있었다.

여러 어려움을 건너 서로에게 다가서고 이해하며 더 나은 관계 맺기를 도모한 이들이 이와 같은 작품을 빚었다. 20년 전의 소설도, 20년 후의 드라마도 말한다. 서로 다른 존재여서 사랑할 수 있다고, 서로 다른 존재이기에 다가서고, 위하고, 용서할 수 있다고 말이다. 그러다 보면, 어쩌면, 사랑 앞의 7년이란 긴 시간도, 역사 앞의 그보다 훨씬 길고 깊은 문제들도 건널 수가 있으리라 믿게 된다.

물론 쉽지만은 않을 테다. 기적처럼 느껴지는 재회를 이루기 위한 비결은 흔한 후회와 낙담이 아니다. '사랑 후에 오는 것들'을 잘 견뎌내는 태도다. 성장과 용서다. 우리는 과연 어떠한가. 모든 이별한 이들이 사랑 후에 오는 것들을 잘 견뎌내길 바랄 뿐이다. 여전히 이루지 못한 두 나라의 진정한 관계 맺음 또한 다르지가 않다.
덧붙이는 글 김성호 평론가의 브런치(https://brunch.co.kr/@goldstarsky)에도 함께 실립니다. '김성호의 씨네만세'를 검색하면 더 많은 글을 만날 수 있습니다. goldstarsky@naver.com

사랑 후에 오는 것들 세트 - 전2권

공지영, 츠지 히토나리 (지은이), 김훈아 (옮긴이), (주)태일소담출판사(20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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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영화평론가.서평가.기자.3급항해사 / '자주 부끄럽고 가끔 행복했습니다' 저자 / 진지한 글 써봐야 알아보는 이 없으니 영화와 책 얘기나 실컷 해보련다. / 인스타 @blly_kim / GV, 강의, 기고청탁은 goldstarsky@naver.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