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붉은 악마 탄생기'의 시작과 끝에 장례식을 배치한 이유

[김성호의 씨네만세 1326] 프렌테 트리콜로 <서포터의 탄생>

(* 이 글은 영화의 스포일러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문제적 작품이라면 문제적 작품이겠다. 대한민국 축구의 기틀, 붉은악마와 서포터를 말하는 영화 이야기다. <서포터의 탄생>이라 이름 붙은 37분짜리 중편영화가 축구팬 사이에서 뜨거운 바람을 일으키고 있다. 프렌테 트리콜로, 그러니까 K리그2에서 승격을 위해 땀 흘리고 있는 수원 삼성 블루윙즈 서포터스 공식 유튜브 채널에서 지난 10일 공개돼 열흘 만에 2만이 넘는 조회수를 기록했다. 흔히 때깔 좋은 중·단편영화가 영화제를 관객과 만나는 첫 창구로 삼는단 걸 고려하면 서포터스 채널에서의 공개는 이례적 행보다.

2024년 한국 독립 다큐멘터리 가운데 손꼽히게 성공한 작품인 <수카바티: 극락축구단>은 선호빈과 나바루 영화감독의 공동 연출작이다. 시민구단 FC안양 창단까지의 과정을 서포터의 입장에서 풀어낸 영화는 어느 한 구단을 넘어 K리그 팬 일반에 적잖은 반향을 일으켰다. 스포츠의 근간은 그저 공놀이, 또 육체적 부딪침이며 경쟁에만 있지 않다. 본질은 서사와 드라마에 있다. 경기장 안에서, 또 바깥에서 이뤄지는 경쟁과 극복의 이야기가 모여 팬들이 환호하는 상품인 스포츠를 이룬다. 축구며 야구 같은 공놀이를 평생 할 일 없는 이들도 제 삶과 공명하는 가치를 발견할 수 있단 것, 그것이 스포츠의 진정한 힘이다. 그렇기에 프로스포츠의 역사를 쌓아가는 일, 서사를 풍부하게 하는 일이 더없이 중요하다.

<서포터의 탄생>은 <수카바티>에 이어 구단과 선수가 아닌 서포터에 주목한 흔치 않은 다큐다. <수카바티>의 주인공이 'A.S.U. RED'의 어제와 오늘을 이루는 이들이라면, <서포터의 탄생>은 옛 '그랑블루', 오늘의 '프렌테 트리콜로'란 게 다를 뿐이다. 말하자면 나바루는 전작에서 FC안양 서포터의 이야기를, 신작에선 수원 삼성 블루윙즈의 서포터 얘기를 다룬다. 그것도 오늘보다는 옛일을 담아낸다. 유럽 서포터스에 비해 기록이 일천한 한국 프로축구 서포터스의 낡은 전래담을 정리하여 역사를 구축하려 든다. FC안양을 도무지 기꺼워할 수 없는 FC서울의 오랜 팬임에도 <수카바티>의 가치를 역설해 온 나는 또한 이번 작업에도 나름의 의미 있다고 말할 수밖에 없다.

서포터의 탄생 스틸컷
서포터의 탄생스틸컷프렌테 트리콜로

한국 프로축구 서포터의 태동

영화는 수원 삼성 서포터스의 시작을 말한다. 전두환 신군부의 스포츠 진흥정책으로 창설된 프로축구 리그, 기업 주도로 시작돼 연고의식도 잡히지 않았던 몇 개 축구팀으로 시작한 초기의 민망한 역사다. 지역을 돌며 흥행유세를 하던 초기의 문화에서 오늘의 서포터스가 태동한 건 때마침 자리 잡은 PC통신, 인터넷 덕분이겠다. 하이텔 같은 PC통신 동호회를 통해 축구에 대한 애정과 유럽, 남미의 서포터 문화를 즐기는 이들이 모여들었고 자생적으로 응원문화를 만들어가기 시작한 것이다. 다큐는 그 시작이 되는 것이 1995년 창단한 수원 삼성 축구단, 그를 응원하는 수원 그랑블루였다고 말한다.

이전까지는 유행곡을 크게 틀고 경기장 나들이를 나온 일반 관중이 치어리더의 율동에 따라 응원하는 게 일반적인 응원방식이었다. 이 방식으로 진화한 게 오늘의 프로야구며 프로배구, 프로농구 등이고 보면 프로축구의 응원문화는 어딘지 이질적이다. 기실 유럽과 남미의 응원문화를 그대로 베껴온 것이라곤 하지만, 당시까지 국내엔 구단이 주도하는 응원문화밖에 없었기에 당연한 태동이라고만 말할 수도 없는 일이다. 영화는 당시 PC통신을 매개로 만나 서포터스를 조직한 이들을 카메라 앞에 세워 그들의 지나온 역사를 듣는다. 축구에 삶 상당 부분을 뚝 떼어내 바친 이들의 애정과 자부심이 뚝뚝 떨어지는 이야기들이다.

영화 전반은 오늘의 프렌테 트리콜로, 수원 서포터스인 그랑블루가 어떻게 태어났는지를 말한다. 국가대표에 비해 프로축구의 인기는 일천했던 시절, 대다수 팬들의 관심도 구단이 아닌 국가대표급 선수들에게 맞춰졌던 때다. 황선홍, 윤정환 같은 공 잘 차고 외모도 꽤 괜찮은 이들이 인기의 중심에 있었다. 그러나 선수 중심, 대표팀 중심의 응원문화가 리그 발전과 효과적으로 호응할리 만무했다. 축구는 어디까지나 팀스포츠가 아닌가. 구단을, 그것도 구단의 한 시즌을 진득이 따라가며 그 서사를 즐기는 참된 팬들이 리그 기반 프로스포츠의 중추가 돼야 마땅하다.

서포터의 탄생 스틸컷
서포터의 탄생스틸컷프렌테 트리콜로

2002년 붉은악마의 기적까지

이들이 해낸 게 바로 그 역할이었다. 수원 서포터스를 창설하기로 하고 그 시초가 된 하이텔 윙즈 팬클럽을 만든 게 첫걸음이 됐다. 수원 구단 직원이던 리호승 대리가 당시 하이텔의 제안으로 PC통신 동호회 송년회 자리에 참석해 구단이 나아갈 방향을 이야기했다니 1990년대 당시의 문화가 오늘과 얼마나 달랐는지를 짐작할 만하다. 서포터가 중심이 되어 앰프에서 나오는 음악과 치어리더가 추는 율동이 아닌 독자적인 응원을 해내기까지는 그다음의 역사가 된다.

수원 서포터스가 자리 잡자 하나하나, 그러니까 부산부터 안양, 부천 등을 연고로 한 구단 팬들이 자연스레 뒤를 따랐다. 오래전 잘못 기록한 책이며 퍼져나간 유언비어로 인해 한국 서포터스의 시작을 다른 팀으로 적어 불필요한 논란이 따랐던 일을 이 영화가 말끔히 정리한단 건 의미 있는 일이다.

영화 중반은 '붉은악마'로 채워진다. 한국 축구 서포터 역사상 최대의 사건, 바야흐로 전 국민이 거리로 나와 제 팀을 목 놓아 응원하는 역사가 이 땅에 강림한 2002년 월드컵 때다. 'Be the Reds'가 박힌 붉은 셔츠와 각종 응원도구, 따라 부르기 쉽고 흥이 나는 노래들과 리딩과 팔로잉에 이르는 응원의 조합까지가 하나하나 훈련된 이들의 체계적 준비가 없었다면 불가능한 일이었다.

많은 이들이 2002년 응원열기가 그저 집 바깥으로 나온 시민들의 참여만으로 이뤄졌다 믿지만 그건 기초공사가 다 이뤄진 뒤에 올린 대들보였을 뿐이다. 물론 가장 중요한 대목이긴 했지만 말이다. 그랑블루 창설 멤버이자 붉은악마 1대, 4대 회장을 지낸 신인철 등이 육성으로 당시의 이야기를 생생하게 전한다.

서포터의 탄생 스틸컷
서포터의 탄생스틸컷프렌테 트리콜로

무엇도 당연하지 않다

붉은악마는 1990년대 프로축구를 기반으로 자발적으로 탄생한 서포터가 없었다면 결코 쉽게 만들어지지 않았을 조직이다. 물론 역시 불가능한 건 아니었겠으나, 2002년의 자발적이면서도 체계적인 응원의 바탕에 이들의 수고가 있었음이 명백하다. '꿈★은 이루어진다'로 대표되는 저 유명한 카드섹션들도, 한국 역사에 아로새겨질 아름다운 순간들에도 이들의 노고가 깃들어 있다. 그 바탕이 된 이들의 얼굴을, 또 그 목소리를 듣는 게 하나하나 새롭다.

붉은악마 뒤에 프로축구 서포터스 문화가 있었다. 그 시작을 알린 건 수원 삼성 그랑블루, 채 몇 되지 않던 청춘들이었다. 축구에, 응원에 제 청춘의 한때를 바친 이들이 가만히 자리에 앉아 지난 시간을 회고한다. 37분, 결코 짧지 않은 다큐의 대부분이 이들의 인터뷰와 자료화면으로 채워질 뿐이다. 그럼에도 축구, 프로축구, 서포터에 관심이 있는 이라면 지루하지 않다. 도리어 쉽게 듣기 어려운 이야기를 정리해 풀어주는 그 수고에 감사하게 되는 순간도 없지 않다.

영화의 앞과 뒤는 전반과 어울리지 않는 장례식이다. 이민재, 그랑블루 초대 회장인 그의 장례식으로 채워진다. 서포터들이 영정과 위패 앞에 둘러앉아 저들을 찍고 있는 카메라를 바라본다. 그 끝은 장례행렬이 빅버드에 들어서 목놓아 응원곡을 부르는 장면이다. 담담히 한국 축구판 서포터의 태동담을 푸는 이 다큐가 한 사람의 죽음으로 시작하고 끝을 맺는단 건 어째서일까. 감독 나바루에게 따로 연락하여 나눈 대화로부터 그 이유를 얼마쯤 짐작할 수 있었다.

서포터의 탄생 스틸컷
서포터의 탄생스틸컷프렌테 트리콜로

시작과 끝, 장례식을 배치한 이유

나바루가 말한다.

"영화 제작자는 영상에 나오기도 하는 신인철 붉은악마 초대회장입니다. 저는 이 작업을 '최초의 서포터, 붉은악마'라는 주제로 5분짜리 쇼츠로 의뢰를 받았습니다. 사실 안양의 서포터인 제가 다른 구단의 이야기를 하는 것도 좀 부담스러운 일이었는데요. <수카바티: 극락축구단>에 출연한 그랑블루 초대 회장 이민재 형님의 부탁이라 거절할 수 없었습니다."

그랑블루 초대 회장, 수원 삼성을 넘어 한국 프로축구 여러 팀 서포터의 폭넓은 지지, 적어도 인정을 받는 이. 이민재는 한국 축구팬에 귀한 다큐 감독인 나바루에게 또 한 번의 중책을 떠맡길 수 있는 감각의 소유자였던 셈이다.

평론가로서 영화적으로 따로 노는 앞과 뒤 장면을 배치한 이유를 묻긴 하였으나, 축구팬으로서는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서포터의 탄생>에, 또 '서포터스'의 탄생에 그를 덜어놓을 수 없었기 때문일 테다. 장례식 장면으로라도 함께 하겠다는 결의, 그와 같은 의기와 연대, 정이 서포터를 이루는 힘이고 말이다. 이 영화가 진짜 서포터의 이야기인 것도 이 때문이겠다.
덧붙이는 글 김성호 평론가의 브런치(https://brunch.co.kr/@goldstarsky)에도 함께 실립니다. '김성호의 씨네만세'를 검색하면 더 많은 글을 만날 수 있습니다. goldstarsky@naver.com
서포터의탄생 수원삼성블루윙즈 나바루 이민재 김성호의씨네만세
댓글
이 기사의 좋은기사 원고료 20,000
응원글보기 원고료로 응원하기

작가.영화평론가.서평가.기자.3급항해사 / '자주 부끄럽고 가끔 행복했습니다' 저자 / 진지한 글 써봐야 알아보는 이 없으니 영화와 책 얘기나 실컷 해보련다. / 인스타 @blly_kim / GV, 강의, 기고청탁은 goldstarsky@naver.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