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술의전당으로 가는 길이 조금 특별했다. 단순히 공연 한 편을 보러 가는 길만은 아니다. 아주 오랜 만에 만나는 동료들이 있었기 때문이다. 더 반가웠던 이유는 그들이 십여 년 전에 동시대성을 담은 창작연극을 지향했지만 이제는 역사 속으로 사라진 '남산예술센터'에서 극공작소 마방진의 작품을 함께 기획했던 동료들이기 때문이다. 한 시절 같은 공연을 두고 함께 고민하고, 뛰어다니며 시간을 보냈던 이들이다. 시간이 많이 흘렀는데도 셋이 다시 뭉쳐 공연장으로 향하는 길은 금세 예전의 공기를 불러왔다.
그동안 나에게 연극은 늘 대학로를 크게 벗어나지 않았다. 혜화역 근처의 익숙한 골목과 소극장, 공연이 끝난 뒤 늦은 밤까지 이어지던 이야기들. 내게 연극은 대체로 그런 기억 속에 머물러 있었다. 그래서 서초동으로 향하는 저녁은 오래간만의 외출처럼 느껴졌다. 익숙한 자리에서 조금 벗어나, 조금 더 멀리 가서 공연을 보는 일. 거기에 오래된 동료를 다시 만나는 반가움까지 더해지니 공연이 시작되기 전부터 마음이 먼저 설레었다.
무엇보다 그날 공연이 <홍도>라는 점이 남달랐다. 극공작소 마방진은 내게 그저 이름만 익숙한 극단이 아니다. 오래전부터 무대의 리듬과 결로 기억되는 단체다. <조씨고아, 복수의 씨앗>으로 깊은 인상을 남기고, <푸르른 날에>와 <변강쇠 옹녀>로 정점을 찍은 극단. 그런 마방진이 올해 20주년을 맞아 대표 레퍼토리인 <홍도>, <리어왕외전>, <칼로막베스>를 릴레이로 올리고 있다는 것은 단순한 기념 공연 이상의 의미로 다가온다. "우리가 지나온 시간"을 돌아보는 동시에 "지금도 우리는 여전히 여기 있다"는 말을 무대 위에서 하고 있는 듯했기 때문이다.
사실 <홍도>라는 제목에는 공연이 시작되기 전부터 관객의 마음을 먼저 건드리는 오래된 정서가 숨어 있다. "홍도야 우지 마라, 오빠가 있다." 한때는 노래로도, 유행어처럼도 사람들 입에 오르내리던 그 대목이다. 누군가에게는 부모 세대의 기억이고, 누군가에게는 한 번쯤 흘려들은 옛 노랫말의 잔상일 것이다. 제목을 듣는 순간부터 관객은 이미 무언가를 기대하게 된다. 눈물, 희생, 순정, 오빠와 동생, 기구한 운명, 그리고 한국식 신파의 진한 한까지 말이다. 그러니까 <홍도>를 보러 온다는 것은 단순히 한 편의 연극을 보러 오는 일이 아니라, 우리 안에 오래 남아 있던 신파의 기억과 정서를 다시 만나러 오는 일이기도 하다. 그런 기대가 객석 어딘가에 은근히 깔려 있었고, 공연은 바로 그 기대를 안고 시작된다.
울음의 기억을 데리고 온 제목, 절제의 방식으로 선 무대
▲연극 <홍도>가 4월 10일부터 26일까지 예술의전당에 진행된다.
이규승
그 가운데 <홍도>는 유난히 묘한 작품이다. 1930년대 신파극 <사랑에 속고 돈에 울고>를 바탕으로 한 이 이야기는 지금 보면 너무 거대하고, 직접적이다. 오빠를 위해 기생의 길을 택한 홍도, 사랑하지만 끝내 사랑으로 구원받지 못하는 운명, 늦게 도착하는 진실, 이미 돌이킬 수 없어진 기구한 삶. 줄거리만 놓고 보면 요즘 드라마보다 더 드라마틱하다. 그런데 신기하게도 이런 오래된 에피소드가 여전히 무대 위에 회자되는 것을 보면 사람의 마음을 건드린다는 것이다. 다만 예전처럼 같은 방식으로만 울리지는 않는다. 누군가에겐 슬픔으로, 누군가에겐 낡은 감각에 대한 질문으로 다가온다. 이번 <홍도>가 흥미로운 것도 바로 그 지점이 아닐까.
막이 오르면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오는 것은 절제된 무대다. 내용은 격정적인데 무대는 놀랄 만큼 단출하다. 하얀 공간, 직선으로 처리된 간결한 구조물, 부차적인 설명 대신 한국적 미감을 살린 여백을 남기는 연출. 이야기만 보면 한껏 울리고 몰아칠 법한데, 무대는 쉽게 감정을 터뜨리지 않는다. 오히려 많으 것을 비워놓고 관객을 맞이하며, 오히려 관객이 그 자리를 스스로 채우게 만든다. 이런 방식은 자칫 밋밋하게 흘러갈 수도 있는데, 이번 공연에서는 그 절제가 꽤 힘 있게 작동한다. 덕분에 무대는 촌스럽게 흐르지 않는다. 1930년대의 신파를 21세기의 현대감각으로 새롭게 바라보게 만든다.
배우들의 움직임과 장면 전환도 기억에 남는다. 큰 변화 없이 이어지는 무대, 정리된 동선, 암전에 기대지 않고 막의 구분 없이 한결같이 이어지는 흐름은 공연 전체에 하나의 호흡으로 만든다. 극의 초반에는 이런 시도가 다소 낯설게 다가온다. 감정이 폭발해야 할 장면에서도 배우들이 쉽게 무너지지 않고, 예전에 익숙했던 형식을 유지한 채 앞으로 나아가기 때문이다. 그런데 시간이 흐를수록 관객은 이런 방식에 익숙해진다. 필자는 이런 흐름에 적응하기에 한 시간이 걸렸던 것 같다. 하지만 바로 그 형식 덕분에 인물의 말과 몸짓이 더 선명하게 보인다. 이건 마방진과 고선웅 연출이 오랫동안 쌓아온 연극적 문법이 재탄생하는 순간이다.
무대에는 분명 힘이 있다. 배우들은 지나치게 감정에 빠지지 않으면서도 이 오래된 비극의 중심을 잘 붙든다. 특히 홍도라는 인물이 단순히 불쌍한 여자에 머무르지 않고, 사랑과 체념과 자존심이 뒤섞인 한 인간으로 남는 순간들이 인상적이다. 주변 인물들 또한 기능적인 역할에 머물 수 있는 구조인데, 배우들이 주고받는 호흡 덕분에 극 전체가 쉽게 무너지지 않는다. 무엇보다 이번 공연의 백미라고 꼽힐 정도로 인상적인 마지막 장면에서 붉은 색이 무대 위를 덮는 순간은 꽤 강렬하다. 홍도라는 이름이 가진 정서가 한 장면으로 응축되는 느낌이 있다. 아마 100분의 공연 중에 마지막 5분을 위해서 달리고 있는 듯한 느낌을 지우지 못할 정도로 극은 마지막으로 몰입되어 가고 있었다.
익숙한 신파의 결, 그리고 마방진이 끝내 지켜낸 무대의 힘
▲연극 <홍도> 공연 피날레 장면
이규승
물론 오늘의 관객이 보기에는 다소 낯설게 느껴지는 부분도 없지 않다. 여성 인물을 향한 거친 언사나 단선적인 인물 구도는 지금의 감각으로 보면 선뜻 편안하게 받아들이기 어려운 대목이다. 하지만 이번 <홍도>는 그런 오래된 신파의 틀을 무작정 숨기기보다, 오히려 그대로 끌어안은 채 무대의 형식과 배우들의 힘으로 다시 견디게 만든다. 바로 그 점이 이 공연의 미덕이다. 낡음을 지우기보다, 그 낡음이 오늘의 객석에서 어떻게 다시 읽히는지를 보여준다.
고선웅 연출 특유의 말맛과 속도감도 여전하다. 전작들에서 꾸준하게 보여왔던 고선웅식의 방식은 이번에도 그대로 재현됐다. 고선웅이 고선웅했다는 말이 떠오를 정도라면 어떨까. 때로는 비극 한가운데서 웃음이 스치듯 지나가고, 어떤 장면은 지나치게 젖지 않도록 템포를 바꿔준다. 누군가에겐 이 리듬이 다소 독특하게 느껴질 수도 있겠지만, 전체적으로 보면 오히려 작품이 한 방향의 눈물로만 흘러가지 않게 붙잡아주는 힘이 된다. 덕분에 <홍도>는 단순히 옛 신파를 재현하는 데 그치지 않고, 지금 다시 무대에 올릴 만한 이유를 끝내 만들어낸다.
그리고 이 공연이 무엇보다 반가운 이유는, 기대했던 마방진의 힘이 여전히 살아 있다는 사실을 확인하게 해주기 때문이다. 오래된 이야기를 오늘의 무대 위에 올리면서도, 그 안에 지나치게 안주하지 않는다. 한국적 정서와 절제된 형식, 배우들의 응축된 에너지, 그리고 마지막에 이르러 관객의 마음을 조용히 흔드는 힘까지. 보고 나면 "역시 마방진답다"는 생각이 먼저 든다. 20주년이라는 시간이 괜히 쌓인 것이 아니라는 것을 무대 스스로 증명해 보인 셈이다.
그날의 나에게 <홍도>는 공연 그 자체만으로 남지 않았다. 오래간만에 만난 동료들의 얼굴, 예전 이야기를 길게 하지 않아도 바로 이어지는 웃음, 그리고 마방진이라는 이름이 다시 불러온 시간의 감각이 공연과 자연스럽게 포개졌다. 그래서인지 마지막 장면에서 느껴지는 감정도 조금 더 깊게 다가왔다. 무대 위 홍도의 비극과 객석의 내 시간이 완전히 같은 것은 아니지만, 지나간 것이 아주 사라진 것은 아니라는 감각만큼은 묘하게 닮아 있었다.
▲연극 <홍도> 커튼콜 장면이규승
그래서 이번 <홍도>를 두고 한마디로 정리하자면 이렇다. 오래된 신파의 틀을 품고 있으면서도, 그것을 단지 추억으로만 소비하지 않게 만드는 공연이다. 약간의 낡음마저 끝내 무대의 힘으로 끌고 가며, 관객으로 하여금 다시 한 번 그 비극 앞에 조용히 멈추게 만드는 공연. 무엇보다 마방진 20주년이라는 이름에 걸맞은 밀도와 품격을 보여준 무대였다.
예술의전당을 나서며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좋은 공연은 때로 감동보다 질문을 더 오래 남긴다. 이번 <홍도>가 그랬다. 한 여자의 오래된 비극을 통해, 지금의 우리는 무엇에 울고 무엇에서 머뭇거리는지 돌아보게 만든다. 그리고 그 질문의 끝에서, 오래된 극단 마방진이 왜 20주년에도 여전히 자기 무대를 지키고 있는지 조금은 알 것도 같았다. <홍도>는 완벽해서 기억에 남는 공연은 아닐지 몰라도, 기대했던 마음을 충분히 보답하며 "다시 보길 잘했다"는 확신을 남기는 공연이다. 오래된 정서를 오늘의 객석 앞에 다시 세워놓고, 그 앞에서 울음과 여운이 함께 일어나게 만드는 무대. 그것만으로도 이번 <홍도>는 충분히 반갑고, 충분히 만족스럽다. 앞으로 전국공연 투어를 앞두고 있는 이번 공연에 대한 기대가 남다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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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여 년간 문화예술계에서 글을 써왔다. 월간지 <문화+서울>에서 편집장(2013~2022)으로, 한겨레신문에서 필진(2016~2023)으로 취재와 예술가를 인터뷰했다. 현재는 서울 대학로 일대에서 공연, 전시 등 다양한 분야의 예술가들을 만나 이아기를 전하며, '서울문화투데이'와 '더프리뷰' 등 매체에 칼럼을 연재 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