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븐숭이 4·3 기념관에 전시된 그림. 학살의 현장에서 이미 숨을 거둔 어머니의 젖을 빨고 있는 아이의 모습이 처절하다. 활자로만 접하던 비극을 생생한 통증으로 치환하며 관객의 숨을 멎게 하는 대목이다.
전갑남
이러한 방식은 현기영의 소설 <순이 삼촌>과 비교할 때 더욱 선명해진다. 소설이 옴먹밭의 학살 현장을 치열하게 고발하며 "무엇이 우리를 죽였는가"를 묻는다면, 영화는 남겨진 이들의 삶을 통해 "그 이후를 어떻게 살아내야 하는가"를 묻는다.
소설 속 순이 삼촌이 끝내 환청과 트라우마 속에서 비극적으로 생을 마감했다면, 영화는 그 아픔의 대물림을 끊어내기 위해 고통스러운 기억을 밖으로 꺼내는 '공유와 치유'의 과정을 보여준다. 비극을 과장하지 않고 인물의 고요한 일상을 따라가는 영화의 시선은 소설과는 또 다른 묵직한 울림을 준다.
물론 이 영화에 찬사만 보낼 수는 없다. 당시 청소년 인물들의 일탈이 비교적 직설적으로 제시된 장면들은, 영화가 구축해 온 절제된 정서와 다소 결을 달리하는 인상을 남긴다. 시대적 배경을 감안하더라도 이러한 표현은 일부 관객에게 몰입을 방해하는 요소로 작용할 수 있다.
또한 학교 교실에서의 폭력 수위 역시 아쉬움이 남는다. 4·3의 참혹함을 알리려는 의도는 이해되지만, 과도한 폭력 묘사는 때로 사실의 재현을 넘어 자극적으로 느껴질 수 있다.
실화가 가진 묵직한 힘은 자극적인 장면이 아니라 정제된 서사에서 더욱 깊게 전달된다. 영화가 조금 더 절제된 표현 방식을 택했더라면 그 메시지는 한층 맑고 깊게 다가왔을 것이다.
영화 후반부, 주인공 영숙이 보리밭에서 하얀 광목천을 휘날리며 추는 살풀이춤은 이름 없이 떠난 이들을 향한 깊은 위로로 다가온다. 그 춤사위는 단순한 슬픔의 표출을 넘어, 오랜 세월 불리지 못한 이름들을 불러내는 하나의 제의(祭儀)처럼 느껴진다.
영화 제목 <내 이름은>은 단순히 주인공의 성명을 묻는 것이 아닐 것이다. 그것은 평화공원 백비에 새기지 못한 이름이며, 우리가 끝내 외면하지 말고 불러주어야 할 우리 현대사의 이름이다.
우리가 그들의 이름을 온전히 불러주고 그 침묵을 우리의 목소리로 이어받을 때, 비로소 누워 있는 백비도 자리를 잡고 바로 설 수 있을 것이다.
"당신은 그 기억의 무게를 함께 짊어질 준비가 되었는가."
▲78년의 시린 세월을 견뎌온 어머니의 얼굴이 제주의 바람 속에 놓여 있다. "이제사 나로 살아지쿠다"라는 카피는 영화가 지향하는 치유와 회복의 핵심 주제를 관통한다. (출처: 영화 <내 이름은> 공식 포스터)츨처 : 와이드 릴리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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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화 마니산 밑동네 작은 농부로 살고 있습니다. 소박한 우리네 삶의 이야기를 담아내고자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