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위 리브 인 타임> 스틸컷
㈜스튜디오 디에이치엘
04.
다시 처음으로 돌아와서, 두 사람의 만남과 결합, 그리고 다시 주어지는 위기는 각자에게 모종의 변화를 가져온다. 먼저 토비아스다. 그에게 일어나는 변화는 사랑의 윤리에 가깝다. 알무트와 정반대의 시간 감각을 가진 그는 반복적으로 그를 설득하려 하거나 붙잡으려 노력하지만, 결국 사랑은 상대를 자신의 방식으로 바꾸는 일이 아니라는 사실 앞에 스스로 멈추어 선다. 그저 사랑하는 사람의 선택이 온전히 모두 이해되지 않는 상태를 견디려 노력한다. 아마도 마지막까지 알무트가 왜 그런 방식으로 삶의 마지막을 태우고자 하는지 토비아스는 알지 못할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그 옆에 남는다. (영화에서 정확히 이유가 설명되지는 않지만, 아마도 알무트를 만나기 전 이혼과 비교하면 이 모습은 큰 변화로 이해될 가능성이 크다.) 완벽한 희생과 헌신이 아닌 불완전한 인내의 사랑이다.
영화에서 더 중요하게 다뤄지는 것은 알무트의 변화다. 조금 전 설명한 대로, 처음의 알무트는 현재의 감각을 신뢰하는 사람이다. 하지만 후반부로 향할수록 그는 전혀 다른 종류의 시간을 생각하게 된다. 곁에 서 있는 토비아스 쪽의 시간에 속하는 내일이다. 단순히 자신이 얼마나 더 오래 살 수 있을까 하는 생존의 기간에만 국한되는 것은 아니다.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더 근본적인 자리, 자신이 사라지고 난 뒤의 시간까지 떠올리기 시작한다. 나중에 딸이 자신을 돌아봤을 때 그저 죽어만 갔던 엄마로 기억되지 않기를 바란다는 그의 말 또한 그저 모성의 발현이나 책임감의 각성 정도로 해석하기에는 복합적인 측면이 있다.
05.
"쓸데없이 미래만 생각했어요. 내 앞에 있는 당신이 아니라요."
이 변화가 중요한 이유는 알무트가 갑자기 미래지향적인 인물로 바뀌어서가 아니다. 정확히 말하면 그는 미래를 믿게 된 것이 아니라, 기억의 구조를 의식하게 된 것에 가깝다. 초반부의 그가 시간을 자기 몸으로 감각하는 인물이었다면, 후반부의 알무트는 시간을 타인의 시선 속에서 상상할 수 있게 된다.
특히 딸이라는 존재가 그 변화를 선명하게 만든다. 자신이 병든 환자의 이미지로만 남지 않을 수 있기를, 단지 상실의 대상이 아니라 살아 있는 욕망과 재능과 기쁨을 가졌던 사람으로 기억되기를 바란다. 이 변화는 영화 <위 리브 인 타임>의 모든 감정을 관통하는 핵심이다. 사랑은 현재의 감정이지만, 상실은 언제나 과거의 기억을 요구한다. 알무트가 그 기억 속에서 자신이 어떻게 남을지를 처음으로 의식하는 순간, 비로소 전혀 다른 방식으로 시간을 살기 시작하게 되는 것이다. 동일한 행위 속에서도 의미는 완전히 뒤바뀌게 된다.
그래서일까? 그런 마음을 영화의 종반부가 이어받아 내는 방식은 부재의 자리를 선명히 드러내는 형식이 아니라 사소한 기억과 습관이 된다. 딸 엘라와 토비아스는 알무트가 달걀을 깨던 방식 그대로 아침을 준비하던 장면이다. 이 모습은 어떤 한 사람이 다른 사람 안에 어떤 방식으로 남겨지게 되는지를 보여주는 가장 정확한 근거가 된다. 동시에 알무트가 딸에게 어떤 모습으로 남게 되고 싶은지 고민했던 지점에 대한 응답처럼 보이기도 한다. 물론 남겨진 사람은 여전히 아프고, 기억은 품고 있던 상실의 흔적을 때때로 늘어놓을 것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누군가의 방식이 전이되어 남게 된다는 사실은 중요하다.
▲영화 <위 리브 인 타임> 스틸컷㈜스튜디오 디에이치엘
06.
"어쩌면 잊힌다는 게 죽기보다 더 싫은지도 모르지."
지금까지 이야기했던 두 가지 중요한 문제, 우리가 가까운 타인에 의해 마주하게 되는 변화와 현재와 미래 사이에서 동일하게 놓이지 않는 무엇을 보여주기 위해 영화가 시도하는 마지막 하나가 더 있다. 우리의 삶이 얼마나 쉽게 어긋날 수 있는지 지속적인 반복을 통해 보여주는 일이다. 애초에 첫 만남부터 그 사실을 노골적으로 드러내고 있다. 예기치 못한 사고로 인해 만나게 되는 두 사람의 모습은 영화가 앞으로 다루게 될 모든 시간의 성격을 미리 압축해 보여주는 복선과도 같다. 사랑은 준비된 상태에서만 시작되지 않고, 삶 또한 언제나 예상하지 못했던 장면으로부터 우리를 이끌고 가고자 한다는 점이다.
그뿐만 아니다. 이후 이어지는 알무트의 삶 역시 같은 궤도 위에 있다. 아이를 원하지 않는다던 그는 출산을 위해 몸과 시간을 들이고, 그 과정에서 예상할 수 없던 감정과 욕망을 지난다. 짧게 등장하지만, 스케이트 선수를 꿈꾸던 소녀가 요리사가 되고 만 그의 과거나 아직 젊은 나이에 암 투병을 두 번이나 겪게 되는 그 모든 과정이 동일한 서사 속에 존재한다. 일찍 이혼을 경험했으며 재혼 후 아이까지 갖게 되는 토비아스라고 크게 다를 게 있을까? 주유소 화장실 한편에서 딸을 출산하게 되는 장면은 그 정점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영화는 이 모든 과정의 '예측 불가능성'을 현재의 삶이 다른 밀도를 갖게 되는 중요한 조건이자 과정으로 비춰내고 있는 것이다.
결국 영화 <위 리브 인 타임>이 말하는 밀도는 여기서 나온다. 삶의 모든 순간을 계획할 수는 없다. 애초에 그 인생의 길이를 예측할 수 없기 때문이다. 대신, 예측할 수 없는 사건들 속에서 삶의 방향을 바꾸고, 이전에 없던 다른 감정과 관계를 마주하고 경험하며 쌓아가게 된다. 변화도 하게 될 것이다. 그래서 중요한 것은 얼마나 오래 살 수 있는가 하는 문제가 아닌, 그 예측 불가능한 시간 속에서 얼마나 밀도 있고 충만하게 존재할 수 있었는가, 그리고 우리를 둘러싼 타인들에게 어떤 모습으로 남을 수 있었는가 하는 부분이 된다. 이는 완전히 서로 다른 자리에 서 있었지만 변화를 경험해야 했던 알무트에게도, 토비아스에게도 모두 해당하는 이야기다.
이처럼 어린아이의 모습으로 태어나, 어른으로 성장하고 노인이 되어 늙어가는 신체 속에 우리가 살아 숨 쉬고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우리는 주어진 시간 속에서 끊임없이 다른 삶을 살게 되는 것이나 다름없다. 그렇다면, 결국 우리가 붙잡아야 하는 것은 단순한 시간의 길이가 아니라 그 안에서 남겨지는 밀도일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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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가 숫자로 평가받지 않기를 바라며 글을 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