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석희 앵커가 뉴스진행을 하다가 감정적으로 흔들리는 모습을 두 번 정도 봤다. 모두 누군가의 부고와 관련된 일이었다. 방송사고라고 할 수 있을 만한 20초 정도의 침묵이 있었는데 저는 그 '망설임'안에 어떤 진실과 인간이 서 있는 모습을 우리가 다 봤다고 생각한다. 만일 뉴스를 AI(인공지능)가 진행했다면 망설임 없이, 보도원칙과 속도, 효율에 따라 전달했을 것이다. 인간의 결함이란 한계가 아닌 미덕이나 개성이 될 수 있다고 생각했다."
15일 방송된 MBC <손석희의 질문들4>에서는 소설가 김애란이 출연했다.
평범한 삶에서 길어 올린 이야기
▲질문들김애란MBC
1980년생인 김애란은 <노크하지 않은 집> <달려라 아비> <이중 하나는 거짓말> <안녕이라 그랬어> 등의 작품을 통하여 해외에서도 호평받으며 21세기 K-문학을 대표하는 작가로 꼽힌다. MC 손석희도 뉴스에서 김애란 작가의 글을 인용했던 인연이 있었다. 데뷔초부터 각종 문학상을 휩쓸면서 화려하게 등장했던 김애란에게 사람들의 높은 관심이 부담스러운 순간은 없었을까.
"부담도 없지는 않았는데, 힘이 되거나 격려가 되는 경우가 더 많았다. 그 이름을 제가 너무 진지하고 무겁게 받아들이면 더 불안했을 것이다. 상을 받는다는 건 웨딩드레스를 입는 것 같다고 생각했다. 우리가 결혼식 같은 특별한 날에만 웨딩드레스를 빌려입고 축하와 박수를 받지만 평소에는 자신의 일상복을 입고 살지 않나. 저 역시 그렇다."
김애란 작가의 단편소설 <안녕이라 그랬어>는 7년간 어머니의 간병을 도맡다가 일상이 무너진 40대 여성의 이야기를 담았다. 소설의 출발점은 1994년 발매된 로버트 폴라드와 킴 딜의 팝송 '러브 허츠 Love hurts'에서 영감을 얻었다. 김애란은 "부엌에서 살림하면서 노래를 듣다가 '아임 영I'm Young'이라는 가사가 '안녕'으로 들렸다. 안녕을 누군가의 시련, 이별, 착각, 오해, 사과라는 서사로 풀어내고 싶었다"고 밝혔다.
단편소설 <좋은 이웃>은 집값 폭등기에 전셋집을 비워줘야 하는 40대 부부의 흔들림을 담아냈다. 소설에서 주인공은 자신이 가르치는 장애 학생이 더 좋은 집으로 이사하게 되었다는 소식에 묘한 상실감과 박탈감을 느낀다. 김애란은 타인의 행복에 대하면서 내적 불안감을 느끼는 인간의 복잡한 심리를 세밀하게 묘사하여 호평을 받았다.
이처럼 김애란의 작품에서는 항상 하숙집, 고시원, 반지하, 원룸 등 인간이 거주하는 다양한 '공간'들이 중요한 배경으로 등장한다. 대부분은 작가 본인이 직접 삶의 경험을 통하여 지나쳐온 익숙한 공간들이었다.
"저는 데뷔작부터 방에서 출발한 작가이고, 최근작까지 집에 대한 관심이 쭉 이어져 오고 있다. 대학 때 시골에서 올라와서 처음 자취생활을 한 경험이 있다. 그래서 저의 뿌리에 대한 갈망이 있었다. 일제강점기나 한국전쟁을 겪은 한국인들의 마음속에서는 '삶의 터전'과 '정착'에 대한 열망이 크다고 생각한다. 저에게 방이란 '이야기를 담아내는 그릇'이다"
첫 번째 장편소설 <두근두근 내 인생>은 10대에 부모가 된 젊은 부부와 조로증에 걸린 아들에 대한 이야기로 베스트셀러가 되었으며 2014년에는 송혜교-강동원이 주연을 맡은 영화로도 개봉됐다.
"30대가 되면서 공간 말고 '시간'에 대한 이야기를 쓰고 싶었다. 일찍 나이를 먹게 된 아이에게는 우리가 종이를 구겼을 때처럼 과거, 현재, 미래가 다 들어 있다고 생각했다. 부모 세대와 아이 세대의 이야기를 같이 넣어보고 싶었다. 제가 가끔 썼던 가족 이야기를 하나의 장편 안에서 통합해 보고 싶은 마음도 있었다."
김애란의 소설을 관통하는 '유머'는 비극적인 상황에 놓였음에도 위트를 놓치지 않는 것이 특징이다. 김애란은 "농담이란 때론 고통을 지나치지 않기 위한 지혜"라고 이야기하기도 했다.
"농담은 제가 그리는 인물, 특히 약자한테 개성과 품위를 주는 장치다. 우리는 누군가를 위로할 때도 농담한다. 위로의 형식이 아니어서 더 위로가 되는 장치가 농담이라고 생각한다. 진지한 위로는 그 뜨거운 온도 때문에 정서적인 채무감을 줄 수도 있는데, 농담은 그 비장함의 온도를 좀 낮춰서 상대를 빚진 상태로 만들지 않는 위로라고 생각한다."
또한 김애란의 작품에서 농담은 절망적인 상황에서도 극중 인물과 독자들을 완전한 절망으로 빠뜨리지 않는 하나의 장치로서도 작용한다.
"희망도 강요하면 자칫 선전물이 될 수도 있으니까 조심한다. 청년기에는 비관이 세련되어 보인 적도 있었다. 그런데 이런저런 사건 사고를 겪으면서 삶이 아름답지 않다는 걸 알고 난 뒤에도 최선을 다해서 살아가시는 분들이 계신다. 여전히 분투하는 분들을 보면 '내가 뭐라고 절망하나' 스스로 절망의 자격을 묻게 된다."
인간의 문학성과 AI
단편 <입동><어디로 가고 싶는가>는 세월호 사건을 연상시키는 이야기들이 등장한다. 다만 김애란은 소설집을 출간하면서 세월호 참사를 직접 언급하지는 않았다. 김애란은 "동시대 사건이고 이야기와의 거리가 너무 가까워서 조심스러웠다"고 밝혔다.
신형철 문학평론가는 김애란의 <안녕이라 그랬어>를 평론하면서 "나는 김애란이 오랫동안 사회학자였고, 이제야말로 유감없이 그렇다고 주장할 것"이라고 평가한 바 있다. 하지만 김애란은 자신의 소설이 특정한 사회적 메시지로 규정되는 것에 조심스러운 입장을 내비쳤다.
"저는 말이 글보다 커지거나 앞질러 가는 걸 걱정하는 편이다. 당연 사회 속에 사니까 저도 사회적인 소설을 쓴다. 다만 소설을 '집'이라고 생각한다면, 독자들이 '제 집에 들어오기도 전에 싫증을 내버리면 어쩌지'라는 걱정이 있다. 사회적 주제를 집의 콘크리트나 뼈대로 세우지 말고, 독자들이 무슨 집이 모르고 들어왔다가 그 집을 나갔을 때 그 사회적 공기가 몸에 냄새처럼 배어서 바깥 공기와 만나 환기되는 식으로 상기가 됐으면 좋겠다는 게 저의 바람이다."
김애란은 최근 화두가 되는 AI(인공지능)에 대한 생각도 밝혔다. 김애란은 자신도 AI를 검색도구나 자료조사 등에 활용하고 있다면서도, AI가 인간의 문학성을 대체할 수는 없다는 소신을 밝혔다.
"내가 작가로서 글쓰기에 근육이 늘었다고 한다면, 한 문장 한 문장을 이을 때마다 전전긍긍과 자문자답, 그 과정에서 늘었구나라고 깨달았다. AI는 고민의 과정을 단축해준다. 제 분야에 한해서 이야기하자면, AI가 쓴 전쟁과 난민 문학이, 과연 인간이 쓴 것과 같을까? 소설이나 문학이 그저 콘텐츠이기만 하다면. 우리가 저자의 얼굴과 약력을 보는 일이 있을까. 우리는 왜 윤동주나 이육사의 작품을 보면서 감동할까?"
또한 김애란은 어느날 고민거리가 있어서 AI와 대화를 나누다가 인간과의 결정적 차이를 발견했던 순간을 회상했다.
"인간한테 있고 AI한테 없는 게 하나 있었다. 바로 '망설임'이었다. 인간은 누군가의 고민, 아픔을 듣고 상대방을 위해 말을 삼키고 주저하는 순간이 있다. 그 주저 안에는 힘겹게 서 있는 어떤 배려나 품위가 있다. 그게 어느 때는 유려하고 빠른 AI의 조언보다 인간의 투박한 침묵이 더 위로된 적이 있다."
SNS와 알고리즘의 전성시대, 오늘날 유튜브를 비롯하는 숏폼 콘텐츠가 넘쳐나는 시대에 '문학의 가치'는 과연 위기일까.
"시청의 속도를 결정할 수 있는 자율성이 걱정된다. 제가 어떤 사회적인 재난 사건의 보도 앞에서 저도 모르게 속도를 1.5배로 돌려볼까 생각들어 스스로 깜짝 놀란 적이 있다. 그때 내 몸의 리듬이 변했다고 느꼈다. 과거의 매체들은 편집의 기준이 사회적 가치와 지향이었다면, 지금은 '개인의 욕망'이 편집의 기준이 됐다. 짧고 자극적인 숏폼에 익숙해져 집중하지 못하는 몸이 됐다면 고민이 필요하다. 요즘은 도덕이나 윤리니 대단하게 아니라 '집중력이 도덕이다'라는 생각도 든다."
그럼에도 문학이 오늘날에도 존재해야만 하는 이유에 대하여 김애란은 이렇게 답했다.
"예전에는 문학의 내용에 집중해서 가치를 말했다. 요즘은 문학의 진정한 가치는 내용이 아닌 '형식'에 있지 않나 싶다. 어떤 진실이나 고통은 반드시 그 사람이 말하고 싶어 하는 분량과 속도로 전해져야 한다고 생각한다. 거기에 특화된 장르가 바로 문학이다. 우리가 어떤 사안에 집중하는 힘을 기르기 위해서는 말하는 이의 속도대로 쓰인 작품을 읽어야 한다. 당장은 문학이 우리 삶의 문제들을 돕지 않는 듯 보여도, 생색내지 않는 형태로 천천히 우리를 돕는다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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