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류이치 사카모토: 도쿄 멜로디> 스틸
(주)영화사 진진
우리는 사카모토 류이치를 점잖게 피아노 치는 클래식 전공 출신 영화음악 대가로 이미지화하지만, 그는 김덕수 사물놀이패부터 크라프트베르크, 다양한 월드뮤직에 이르기까지 음악적 스펙트럼을 자랑하는 이다. 방탄소년단 슈가와도 말년에 교류했을 정도면 확 와닿지 않을까. 한창 왕성하게 다양한 음악 경향을 흡수해 제것으로 만들던 시절의 청년 예술가는 눈을 반짝이며 영감을 얻은 과거와 현재의 작가들을 호명하기 시작한다. 목록이 범상하지 않다.
인터뷰와 저서를 통해 널리 알려진 것처럼, 클로드 드뷔시는 사카모토 류이치에겐 대체 불가 존재다. (한때 자신이 드뷔시의 환생이라 믿었다) 드뷔시는 20세기에 태어난 손주들이 이해할 수 있는 음악만 작업한다고 소명한 바 있고, 음악만큼 다양한 이미지에 매료되었다고 류이치는 말한다. 어려서부터 정통 클래식 경력에 대해 만약 비틀즈를 조금만 일찍 알았다면 전공을 바꿨을 거란다. 현대음악에서 팝음악으로 노선 변경은 이미 예정된 바였다.
전후 경제성장과 함께 서구문화 개방의 문화적 축복은 그를 풍요로운 정신세계로 이끈다. 드뷔시와 비틀즈에서 출발한 목록은 광활한 스펙트럼으로 향한다. 팝아트의 대가 앤디 워홀, '볼레로'로 유명한 모리스 라벨, 교향악의 거장 스트라빈스키, '우연성 음악'을 창시한 존 케이지, 현대미술의 아이콘 마르셀 뒤샹, 작곢가 앙리 뒤티외, 현대음악가 올리비에 메시앙, 급진주의 작가 요시모토 류메이까지 고개를 끄덕이던 이름은 예상하기 힘든 경계를 뚫고 뻗어간다.
'제가 만난 어떤 아저씨', '길에서 스쳐 지나가는 남자들과 여자들'에선 피식 웃음이 터지고 '제가 알고 지냈던 여자애들......'에 이르면 배를 잡지 않곤 도리가 없다. 무엇이건 전력으로 질주하던 청년을 목격하는 건 무척 흥미로운 경험이다. 그러다 <전장의 크리스마스>에서 공연했던 데이비드 보위에게 '미디어 속에서 자신을 지키는 법'에 대해 배웠다며 다시 진지한 태세로 전환하는 게 자연스럽다. 당시의 그는 스펀지처럼 세상만사 흥미가 넘쳐 보인다.
무한정 확장하면 혼돈에 빠지지 않을까 궁금해질 즈음, 류이치가 해답을 내놓는다. '카피라이터'의 시대, 음악도 시작부터 끝까지 듣지 않게 된 세태를 평가한다. 그러나 애석하거나 비분강개하진 않는다. 시대에 어찌 적응할 것인가 모색하고 문화 흐름 읽기를 집요하게 시도한다. 다양한 장르를 섭렵하되 특정 장르에 구속되는 걸 경계하는 입장이 확연하다. 장르가 세분화할수록 오히려 다양성을 파괴하고, 창작을 획일화 틀에 끼우는 방식으로 흐를 수 있다는 우려도 전한다. 비단 음악뿐 아니라 한국 독립영화 근황과도 통하는 고민이라 귀에 쏘옥 박힌다.
문화 콜라주로 구현된 영화의 얼개 속으로
▲<류이치 사카모토: 도쿄 멜로디> 스틸(주)영화사 진진
마치 문화비평 대담 기록 같지만, <류이치 사카모토: 도쿄 멜로디>는 명백한 음악 다큐멘터리다. 관객에겐 낯설지만 그의 음악적 정체성을 확립하던 시절의 흔적이 시종일관 다채롭게 관찰된다. 그가 속한 Y.M.O(옐로우 뮤직 오케스트라)의 1983년 일본 무도관 콘서트 실황을 바탕한 초현실주의 영화 "A Y.M.O. Film Propaganda" 삽입부는 밴드 시절 그의 활약이 궁금하던 이들에게 신선한 충격으로 다가올 법하다. 게임 음악도 다수 참여할 만큼 열린 자세로 첨단기술 수용과 새 시대에 걸맞은 음악을 고민하던 면모가 설득력을 배가한다.
아울러 그에게 세계적 명성을 추가한 <전장의 크리스마스> OST 테마 연주, 전부인이자 음악활동 동반자였던 아노 아키코와 협연한 "통 푸", 영화 후반부를 장식하는 피아노 연주곡 "셀프 포트레이트"가 훅 들어온다. 신스 팝, 전자음악 유행에 세계적으로 활약한 밴드 시절 음악은 카메라에 담긴 낯설고 흥미로운 동시대 일본의 풍경과 연계해 하나의 민속지 혹은 사회문화 보고서처럼 읽히기에 아쉬울 것 없다. 아마 대중문화 연구자라면 그 배경 묘사만으로도 밤새 떠들 수 있지 않을까?
영화는 1985년 공개 후 한동안 잊혔다. 당시 다큐멘터리 촬영 환경 때문에 16mm 필름으로 촬영한 원본은 '로스트 미디어'처럼 어느새 실종되고 말았다. 사카모토 류이치 사후에도 한동안 작품은 호명될 기회를 얻지 못했다. 하지만 감독의 자택 창고에 잠들어 있던 필름 원본이 2025년 우연히 발견되고, 프랑스 국립 영화원 주도로 감독 검수 아래 디지털 리마스터링을 진행한 덕분에 원래보다 압도적으로 월등한 4K 화질로 부활할 수 있었다. 영화 속에서 류이치가 열정적으로 피력하던 디지털 환경 변화의 수혜를 사후에도 제대로 누린 셈이다.
처음엔 그저 사카모토 류이치를 추억하는 또 하나의 헌정 영화로만 기대했지만, 이 작품엔 1980년대 전성기를 달리던 일본 대중문화의 유산과 세계를 하나로 묶기 시작한 거대한 사회변화 출발점이 원형 그대로 보존된 채다. 그저 'Hip'해 보인다며 무비판으로 추종하거나 소비되는 '레트로' 열풍에 대한 씁쓸한 생각이 뒤를 잇는다. 특정 문화 요소나 스타일의 기원과 구조를 도외시한 채 그냥 겉으로 드러나는 피상적 면에만 주목하며 본질에 다가가지 못하는 추세를 근심하는 입장에서 이 작품은 부럽고도 질투가 나는 대상인 것.
일본의 80년대, 한국의 90년대엔 닮은 측면이 적지 않다. 버블 붕괴와 IMF로 짧은 전성시대가 막을 내리고 장기적인 정체로 빠진 하부구조 토대 문제, 문화적 다양성과 구매력 상승이 조화를 빚어낸 대중문화 황금시대의 자취를 파먹고 사는 현실이 특히 그렇다. 케이팝이 점점 기업의 전유물로 정체되고, 한국영화가 2000년대 초반 르네상스에 집착하며 매달리는 것 역시 그런 타성과 지적 게으름에서 비롯된 것일 테다.
<류이치 사카모토: 도쿄 멜로디>는 20세기 현대 문화적 르네상스의 정수와 함께 이를 가능케 했던 다양한 사회 조건을 검토할 수 있는 매력 가득한 텍스트였다. 물론 단지 거장의 청년기 면모를 호기심 가득히 들여다보는 것만도 충분히 호사스러운 체험임에 틀림 없다. 하지만 조금만 더 지적 호기심으로 다가간다면, 우리 시대 대중문화의 기원과 최신 유행 트랜드에 관해 보다 근본적으로 이해하는 비밀의 화원으로 능히 기능할 작업이다.
<작품정보>
류이치 사카모토: 도쿄 멜로디
Tokyo Melody: A Film about Ryuichi Sakamoto
1985|프랑스|다큐멘터리
2026.04.15. 개봉|63분|전체관람가
감독 엘리자베스 레나드
출연 류이치 사카모토
수입/배급 ㈜영화사 진진
제공/공동배급 ㈜더콘텐츠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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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사회복지영화제 프로그래머. 돈은 안되지만 즐거울 것 같거나 어쩌면 해야할 것 같은 일들을 이것저것 궁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