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7분짜리 단편영화가 마지막, 40세 감독의 어처구니 없는 죽음

[김성호의 씨네만세 1311] 감독 김창민과 <구의역 3번 출구>

서울 동쪽에 위치한 광진구엔 2호선 지하철역사인 구의역이 있다. 서울교통공사가 매년 발표하는 통계에 따르면 이 역을 이용하는 사람은 매일 5만 명 남짓이다. 이 역사로 통하는 출구는 모두 4개니, 각 출구엔 매일 1만 명이 넘는 사람이 오간다. 구의역 3번 출구도 그중 하나다.

<구의역 3번 출구>란 영화가 있다. 2019년 열린 제23회 부천국제판타스틱영화제에 소개된 27분짜리 단편으로, 결코 낮지 않은 이 영화제 문턱을 넘었단 점에서 꽤나 잘 만들어진 구석이 있는 작품이다. 영화의 시작이 바로 '구의역 3번 출구'에서 이뤄지는데, 영화의 끝 또한 그곳을 통해 들어선 역사 한 켠이다. 영화는 구의역 3분 출구를 나서 다시 그곳으로 돌아오는 짧은 이야기가 된다.

주인공은 승구(오동민 분)와 선화(김예은 분)다. 3번 출구 앞에서 만난 두 사람은 제법 친한 듯하면서도 썩 반갑지만은 않은 사이인 듯하다. 이유는 얼마 지나지 않아 드러나는데, 이들이 찾은 곳이 가정법원인 때문이다. 조정이 끝나고 마지막 결정이 있는 날이다. 판사는 아무렇지 않게 이들이 이혼했다고 말한다. 정말 이게 끝이냐고 되묻는 승구에게 돌아오는 말.

'조정 기간 드렸잖아요?'

구의역 3번 출구 스틸컷
구의역 3번 출구스틸컷부천국제판타스틱영화제

님에서 남이 된 남녀의 마지막 하루

재판이 끝이 아니다. 이혼 판결이 확정됐다 해도 관할 구청으로 가서 이혼신고를 해야 하는 일이 남는다. 가족관계등록부를 정리해 완전히 서로가 남남으로 갈라서는 것이다. 구의역 3번 출구 바로 앞엔 광진구청이 있으니, 영화의 제목이 어떻게 정해진 것인지를 알만도 하다.

왜, 그런 이야기가 있지 않았나. 덕수궁 돌담길을 따라 걷는 연인은 헤어진다는 이야기 말이다. 1995년까진 덕수궁 돌담길 끝자락에 가정법원이 있었다고 전한다. 가정법원에서 이혼 소송을 하는 이들은 어찌할 수 없이 덕수궁 돌담길을 걸어야 했기에 이곳을 걷는 남녀가 헤어지는 말이 나온 것이다. 갈라서기 위하여 덕수궁 돌담길을 걷는 것이 아니라, 이 길을 함께 걸으면 헤어진단 표현. 이를 문학적이라 해야 할까.

영화는 승구와 선희가 함께하는 부부로의 마지막 순간을 다룬다. 6개월의 조정이 끝나고 재판을 마치고 난 뒤 마주앉은 테이블, 식사자리는 술자리로, 다시 또 다른 술자리로 이어진다. 농담인 듯 진심 섞인 몇 마디 말들이 섬세하지만 민감하지는 않게 둘 사이를 오고 간다. 사랑했고 그 사랑이 완전히 가시지는 않은 마음이, 앉았던 자국이 남은 방석처럼 미지근한 온도가 깃든 관계가 둘 사이에 있는 것이다.

구의역 3번 출구 스틸컷
구의역 3번 출구스틸컷부천국제판타스틱영화제

미지근하게 우렸을 때 더 맛난 차처럼

<구의역 3번 출구>는 결혼부터 이혼에 이르는 둘 사이의 복잡한 이야기를 구구절절 떠들지 않는다. 조정도, 재판도, 하다못해 둘의 입을 통해 '나 잘났고 너 못났다'는 흔한 말 한 마디 흘리지 않는다. 나쁘지 않은 관계, 심지어는 좋은 누나 동생처럼 보이는 둘의 관계가 어째서 파탄에 이른지를 영화는 썩 불쾌하지 않게 자연스레 드러낸다. 때로 어떤 관계는 깊어지지 않을 때에 가장 아름답다. 미지근하게 우렸을 때 더 맛난 차가 있듯이.

설명하지 않아도 알 수 있는 것이 있다. 승구와 선희가 서로를 대하는 태도에서 관객은 짐작하게 된다. 이들 사이에 어떤 일들이 있었는지는 몰라도, 어떻게 여기까지 흘러왔는지는 알 것 같은 느낌이다. "내가 좀 틀려도 그냥 맞다고 해"주길 바라는 여자와 도무지 그럴 수는 없었던 남자 사이의 흔하고 어리석은, 평범하고 아쉬운 관계였을 터다.

배우들의 연기도, 감독의 연출도 좋다. 대단할 것 없는 이야기지만 모두에게 다가서는 이야기이기도 하다. 구의역 3번 출구를 지나는 1만 명 넘는 사람들에게도 모두 그런 이야기 하나 쯤은 있었을 테다. 감독은 그중 하나를 붙들어 과하지 않고 담박하게 풀어냈을 뿐이다. 가만히 지켜볼 줄 아는, 나서지 않고 기다릴 줄 아는 감독의 자세가 그의 다음 작품을 기대하게 한다.

구의역 3번 출구 스틸컷
구의역 3번 출구스틸컷부천국제판타스틱영화제

감독 김창민의 다음을 보지 못하게 됐다

나는 여기서 감독 김창민의 다음이 없을 것을 알린다. 김창민 감독은 지난해 11월 세상을 떠났다. 1985년생, 고작 마흔이 된 나이였다. 아직 단편밖에 발표하지 않은 그의 필모그래피는 스태프 경력으로 가득 차 있다.

2013년 <용의자> 소품팀으로 시작해, <대장 김창수> <그것만이 내 세상> <마녀> <마약왕> <천문: 하늘에 묻는다> <소방관> 등 굵직한 작품에 작화팀으로 참여했다. 미술 기반으로 영화 현장 일을 익혀왔음을 짐작할 수 있다. 두 번째 단편으로 일반에 공개된 <구의역 3번 출구>가 미술적으로 꽤 안정감 있는 작품인 이유도 유추할 수 있다.

김창민의 이름을 마주한 건 그가 세상을 떠나고 거의 반년이 지난 최근이었다. 뜻밖에도 주변의 영화계 인사들이 보내온 사건기사를 통해서였다. 그가 아들과 함께 경기도 구리시 한 식당을 찾았다가 폭행을 당해 숨졌다는 기사였다.

구의역 3번 출구 스틸컷
구의역 3번 출구스틸컷부천국제판타스틱영화제

이래서야 안 되는 일이다

뒤늦게 소식을 접한 이들이 분노한 것도 당연한 일이다. 사건 처리는 정말이지 엉망진창이었다. 사람이 잔혹하게 맞아죽은 사건임에도 수사는 지지부진했다. 피해자가 숨을 거둔 뒤에도 가해자들은 세상을 자유로이 오갔다.

가해자 중 한 명이 힙합곡을 발매하고 홍보했다는 의혹까지 더해지며 분노가 커졌다. 영화계는 아까운 인재를 잃었다. 장애가 있는 아들을 키우며 성실하게 작업해온 이였다. 시민이 공공장소에서 맞아죽어도 법이 어디에 있는지를 알 수 없는 세상이다.

언론에 사건이 공개되고 법무부 장관까지 목소리를 내고서야 사건이 제대로 수사될 것이란 이야기가 나온다. 이래서야 될 일인가. 이 나라가, 사회가 정말이지 이리 돌아가서는 안 되는 일이다.
덧붙이는 글 김성호 평론가의 브런치(https://brunch.co.kr/@goldstarsky)에도 함께 실립니다. '김성호의 씨네만세'를 검색하면 더 많은 글을 만날 수 있습니다. goldstarsky@naver.com
구의역3번출구 부천국제판타스틱영화제 김창민 김예은 김성호의씨네만세
댓글4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작가.영화평론가.서평가.기자.3급항해사 / '자주 부끄럽고 가끔 행복했습니다' 저자 / 진지한 글 써봐야 알아보는 이 없으니 영화와 책 얘기나 실컷 해보련다. / 인스타 @blly_kim / GV, 강의, 기고청탁은 goldstarsky@naver.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