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일 만에 끝난 정치재판, 법정에 선 군인이 남긴 한마디

[이 장면 이후 우리 사회는] 넷플릭스 〈행복의 나라> 속 1980년 법정이 남긴 질문

영화, 방송, 책등 작품 속 한 장면을 통해, 오늘의 사회적 장면과 감정의 흐름을 살펴봅니다.[기자말]
살면서 한 번쯤은 그런 순간이 온다. 신념을 굽히면 살 수 있는데, 그것을 스스로가 용납하지 못하는 순간. 타협하면 편해지는데, 그 타협이 자신을 배반하는 것처럼 느껴지는 순간. 굳이 거창한 일이 아니어도 좋다. 직장에서, 관계에서, 아주 작은 선택 앞에서도 그 순간은 찾아온다. 그리고 대부분은 조용히 타협한다. 그 선택이 더 안전하기 때문이다.

추창민 감독의 영화 〈행복의 나라〉는 그 타협을 끝까지 거부한 사람의 이야기다. 우리는 어떤 이름은 기억하고, 어떤 이름은 기억하지 못한다. 10.26은 김재규의 이름으로 남았고, 12.12는 전두환의 이름으로 남았다. 사건의 중심에 선 이름이 그 시대 전체를 덮는 동안, 그 주변을 채운 사람들—명령과 선택 사이에서 버틴 사람들, 소리 없이 사라진 사람들—은 기억되지 않는다. 영화는 그 기억되지 못한 자리에서, 지워진 이름을 천천히 불러낸다.

명령과 선택 사이

행복의나라 예고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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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는 1979년 10.26 직후 단 16일 만에 끝난 정치재판을 배경으로, 이기는 것이 불가능한 싸움을 선택한 두 사람의 이야기를 담는다.

"어차피 대한민국은 김 부장만 기억할 겁니다. 반역자든 혁명가든. 박태주란 이름 기억 못 해요."

변호사 정인후(조정석)가 박태주 대령(이선균)을 회유하는 장면이다. 박태주의 무표정한 얼굴과 흔들리는 눈빛. 신념을 굽히면 가족에게 돌아갈 수 있다는 것을 알면서도, 그것을 스스로가 용납하지 못한다는 심정이 그 눈빛에 담겨 있다.

시간을 되돌릴 수 있다면 같은 선택을 하겠느냐는 재판장의 질문에, 박태주는 잠시 머뭇거린다. 돌아가고 싶은 장면은 분명하다. 아내의 밥 짓는 냄새와 아이들의 웃음소리가 있던 시절. 그러나 결국 "나는 대한민국 군인입니다. 명령에 복종해야 합니다. 그날의 선택은 변하지 않을 겁니다"라고 말한다.

박태주는 명령과 선택 사이에서 자신이 무엇을 용납할 수 없는지 아는 사람이었다. 용기가 두려움을 이기는 것이라면, 그의 선택은 두려움을 알면서도 자신을 저버리지 않는 쪽에 가까웠다. 이기기 위해서가 아니라, 끝까지 자기 자신으로 남기 위한 싸움.

그 심정은 1980년 법정에만 있었던 것이 아니다. 부당한 명령 앞에서 멈춰 선 군인, 위법한 지시임을 알면서도 따르는 것과 거부하는 것 사이에서 혼자 버텨야 했던 사람들. 채상병 사건이 그랬고, 12월 3일 밤이 그랬다. 역사는 그 선택을 쉽게 구분하지 않는다. 명령에 따랐다는 말 아래 모두를 같은 이름으로 덮어버린다. 박태주가 지워지지 않는 것은 명령에 따랐기 때문이 아니라, 그렇게 지워지기를 스스로 거부했기 때문이다.

질 수밖에 없는 싸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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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정은 옳은 놈, 그론 놈 가리는 데가 아니에요. 이기는 놈, 지는 놈 가리는 데라고요."

정인후는 처음부터 정의로운 인물이 아니었다. 이기는 것이 전부인 변호사였다. 그러나 질 수밖에 없는 싸움 속에서, 그는 조금씩 달라진다.

재판 중에 합수단장 전상두(유재명)의 쪽지가 수차례 전달되는 법정에서, 이미 결론이 정해진 싸움인 것을 알면서도 정인후는 포기하지 않았다. 12.12 군사 반란 직후, 골프 연습 중인 전상두를 찾아가 무릎을 꿇고 박태주를 살려달라고 애원한다. 전상두가 날린 골프공을 줍기 위해 겨울 호수로 들어가고, 전상두 부관에게서 얼굴이 피범벅이 될 때까지 구타도 당한다.

이길 수 있다는 계산보다, 그 자리에 있어야 한다는 쪽이 먼저인 사람들이 있다. 정인후가 겨울 호수에 들어간 것도 그런 순간이었다. 굴욕인지 선택인지, 승산이 있는 싸움인지 아닌지를 따지기 전에, 몸이 먼저 움직였다.

질 것을 알면서도 싸운다는 것의 의미를 묻는 순간, 우리는 이미 그 재판의 방청석에 앉아 있다. 분노도, 슬픔도 아니다. 이미 정해진 결론 앞에서의 무력함과 그럼에도 멈추지 않는 선택 사이에 남겨진 감정. 그건 쉽게 설명되지 않는다.

그래도 싸운다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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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네한테 진 빚이 많아. 자네 진짜 변호사야. 잘 있게."

사형 선고가 내려진 날, 박태주는 그렇게 말했다. 정인후는 이겼기 때문이 아니라, 끝까지 그 자리를 떠나지 않았기 때문에 '진짜 변호사'였다. 이길 수 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돌아갈 수 있는 길이 있다는 것을 알면서도, 그 자리를 끝까지 지킨다. 쉽게 잊히지 않는 장면이다. 이 싸움은 이기기 위한 것이 아니라, 자신으로 남기 위한 선택일지도 모른다.

역사는 이긴 사람의 이름을 기억한다. 그러나 가끔, 진 사람의 눈빛이 더 오래 남는다. 아들의 죽음에 대한 책임을 묻기 위해 수년째 법정 안팎을 오가는 채상병 유족도, 10년이 넘도록 진실을 요구하며 싸워온 세월호 유족도, 이길 수 있다는 보장 없이 그 자리를 지켜온 사람들이다. 12.3의 밤 장갑차 앞에 섰던 시민의 이름은, 위법한 명령 앞에서 멈춰 선 군인의 이름은 역사가 또렷히 기억하지 않을 수 있다. 그러나 지금 우리가 박태주를 기억하는 것처럼, 그 이름들도 언젠가 누군가에 의해 불릴 것이다.

사건은 오래 남지만, 그 안의 개인은 쉽게 사라진다. 사건의 중심에 선 이름이 역사를 덮는 동안, 박태주 같은 사람들은 조용히 뒤로 밀려난다. 명령과 선택 사이에서 버틴 사람, 돌아갈 수 있는 길을 알면서도 끝내 그 자리를 떠나지 않은 사람, 16일 만에 사형이 집행된 사람. 그 이름을 지금 우리가 기억하고 있다는 것.

"잘 있게."

영화가 끝나고 자막이 올라갈 때, 박태주의 마지막 말이 다시 들리는 것 같았다. 누군가를 기억한다는 것은, 어쩌면 그 말을 끝내 혼자 남겨두지 않는 일일지 모른다. 1980년의 법정은 하나의 질문을 남긴다. 지금, 우리는 어떤 자리를 지키고 있는가.

덧붙이는 글 이 기사는 네이버블로그 https://blog.naver.com/ezmind921에도 실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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