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우절이라는 가벼운 농담이 세상의 소음을 가득 채우던 지난 4월 1일, 경기도 의정부로 향하는 버스에 몸을 실었다. 거짓말 같은 현실을 숙명처럼 받아들이며 살아가는 한 사람을 만나기 위해서였다. 바로 배우의 삶을 내려놓고 무속인의 삶을 살아가고 있는 정호근씨.
▲배우라는 이름을 내려놓고 무속인의 길을 걷고 있는 정호근 씨정호근
1975년 만화영화 OST를 부르며 소년 가수로 데뷔한 그는 1984년 MBC 공채 17기 탤런트로 연기자의 길에 들어섰다. 드라마 MBC <수사반장>을 시작으로 <이산>, <선덕여왕>, SBS <야인시대>, KBS <대조영> 등 다양한 작품에서 선 굵은 악역 연기로 존재감을 드러냈다.
특히 KBS 대하드라마 <광개토태왕>에서는 주인공 못지않은 존재감을 지닌 악역 '풍발' 역으로 등장해 시청자들의 강한 인상을 남겼다. 극 중 "도대체 얼마나 처먹는 게야! 돼지 같은 놈!"이라는 대사는 당시 화제를 모으며 그의 이름을 다시 대중에게 각인시켰다. 해당 장면은 지금도 유튜브 등 온라인 공간에서 밈으로 회자되고 있다.
신당에서 만난 그는 이제 은은한 향이 피어오르는 공간에서 누군가의 절박한 사연을 듣는 무속인으로 살아가고 있었다. 슬픔과 고민에 잠긴 사람들의 구구절절한 이야기를 듣는 그의 모습을 보니 무속인이라기보다, 인생의 굴곡을 먼저 건너온 인생 선배에 가까워 보였다.
그래서인지 마주한 정호근의 인상은 예상보다 훨씬 차분하고 편안했다. 인사를 건네자 TV 속에서 보던 날카로운 눈빛 대신 부드러운 미소가 돌아왔다. 배우에서 무속인으로의 전향은 대중에게도 파격이었지만, 그에게는 생존을 건 선택에 가까웠다. 그는 무속인이 된 이후 쏟아진 사회적 시선에 대해 담담히 입을 열었다.
"악플로 괴롭히는 사람들도 있지요. 여전히 세속적인 기준으로 저를 바라보는 시선이 힘들 때도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중심을 잃지 않을 수 있었던 이유를 묻자 그는 '사람'을 이야기했다.
"가족이라는 이름을 생각하면 다시 마음을 잡게 됩니다. 결국 사람은 가족 안에서 버티게 되는 것 같아요."
대화가 깊어지자 그는 인생의 가장 깊은 곳에 묻어두었던 이야기를 조심스럽게 꺼냈다. 자녀를 먼저 떠나보낸 부모로서의 참척(慘慽)의 고통이었다. 그는 그 시간을 "말로 설명하기 어려운 고통"이라고 짧게 표현했다. 그래서인지 현재 명리학을 기반으로 상담을 이어가고 있는 그의 삶은, 타인의 아픔을 어루만지며 스스로의 상처 또한 치유해 가는 과정처럼 보였다.
"참 힘겨운 삶이었습니다."
잠시 말을 멈춘 그의 눈시울이 붉어졌다.
"종교가 무엇이든 결국 사람을 향해야 합니다. 고통받는 사람의 마음을 어루만지는 게 먼저라고 생각합니다."
정호근은 종교에 대한 소신도 분명하게 밝혔다. 무속인인 그가 꺼낸 말은 의외로 소박하면서도 본질적이었다. 그에게 무속은 신비주의나 권위가 아니었다. 그것은 상담이자 위로였고, 삶의 현장에서 사람과 부딪히며 살아가는 일이었다.
배우라는 타이틀을 내려놓고 타인의 삶에 귀 기울이는 길을 선택한 정호근. 만우절에 만난 그의 이야기는 가벼운 농담들을 뒤로하고 묵직한 울림으로 남았다.
"행복해지기 위해 노력한다"는 그의 말은 의정부를 떠나는 집으로 돌아오는 고속 버스 안에서도 오래도록 귓가에 맴돌았다. 서로의 다름을 인정하고 그 너머의 인간을 바라보는 것, 어쩌면 그것이 그가 말한 '사람을 향한 종교'의 시작일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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