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나간 사랑을 떠올리는 색다른 방식

[김성호의 씨네만세 1323] <위 리브 인 타임>

* 이 기사는 영화의 스포일러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마침내 지고 말 모든 것이 피어나는 잔인한 4월이다. 한 시절 짧게 핀 뒤 영원히 지고 마는 수명 짧은 꽃들의 몰락이 그저 아름다움일 뿐일까. 연인들의 꽃놀이가 저물어가는 것들로부터 오로지 아름다움만을 선별하여 본다는 사실이 놀랍다. 죽음, 몰락, 사멸과 흔히 엮여 이야기되는 낙화가 어떤 이들에겐 아름다움일 수 있다는 것. 그는 보는 각도에 따라 달리 보이는 생과 우주, 그리고 사랑의 증거일 수도 있겠다.

알무트(플로렌스 퓨 분)와 토비아스(앤드류 가필드 분)는 연인이다. 더없이 서로를 사랑하는 듯, 앞길에 오로지 행복만이 가득할 듯한 안정감 있는 커플이다. 실력 있는 요리사 알무트와 대규모 시리얼 회사에서 꽤나 인정받는 직원인 토비아스는 서로를 보완하며 꽤 멋진 관계를 쌓아왔고, 또 쌓아갈 듯 보인다. 타이타닉호가 마주한 빙하처럼 수면 아래 감춰진 거대한 문제를 내보이기 전까지는 말이다.

이들의 행복한 일상으로부터 출발한 영화는 시작하고 갓 5분 쯤 지났을 때 알무트의 건강이 좋지 않다는 사실을 알게 한다. 의사는 항암치료를 해야 한다고 한다. '종양을 왜 제거하지 못하느냐' 묻는 알무트에게 의사는 종양이 커 손을 댈 수 없다고 설명한다. 고통스러운런 항암, 입 안이 헐고 머리카락이 다 빠지며 기력이 쇠하는 그 모든 과정을 알무트는 겪어내야 할 것이다. 수첩을 펴고 의연하게 설명을 받아 적는 토비아스다. 앞으로 있을 모든 일을 알무트 곁에서 성실하게 견뎌내겠다는 각오다. 알무트를 향한 저의 사랑이, 또 행복한 시간들이 그저 커다란 종양 하나에 무너지게 놓아둘 수는 없다는 결기가 느껴진다.

위 리브 인 타임 스틸컷
위 리브 인 타임스틸컷스튜디오 디에이치엘

지난 시간 안에 담긴 연인, 그리고 사랑

그리고 병원을 나오는 길. 알무트가 토비아스를 붙들고 진지하게 말한다. 항암으로 종양의 크기를 줄이고 수술이 가능해지면 수술을 감행하고 그러고도 다시 항암을 또 해야 하는 지난한 과정을 저는 견디고 싶지 않다는 이야기다. 지금까지 겪어낸 항암을 또 한 번 겪을 자신이 없다고, 머리카락이 빠지고 구토를 하며 제게 남은 시간을 보내고 싶지도 않다고 말이다. 치료는 얼마 남지 않은 삶을 낭비하게 하는 것이라고, 최소한의 치료만 받고 남은 몇 개월을 즐겁게 지내고 싶다고 말한다. 토비아스는 거의 울 것 같은 표정이 된다.

제목인 'We Live in Time'을 직역하자면 '우리는 시간 속에 산다' 쯤이 되려나. 존 크로울리의 <위 리브 인 타임>은 알무트와 토비아스의 만남부터 피할 수 없는 이별까지의 이야기다. 꽃이 피면 마침내는 떨어지듯, 사랑의 피고 짐을 시작부터 끝까지 다루었다. 남녀상열지사야 흔하고 흔한 주제인데, <위 리브 인 타임>은 몇 가지 설정을 끼얹어 새로움을 구한다. 하나는 앞서 적었듯 시한부의 삶이란 거다. 알무트가 큰 병을 얻고 항암을 않겠다 선언하며 둘 사이에 남은 시간이 그리 많지 않게 된다. 그러나 이것만으로는 그리 새로운 영화라 할 수가 없겠다. 애초에 시한부는 영화, 또 멜로의 흔한 설정인 때문인 터다.

영화의 승부는 형식에 있다. 통상의 선형적 전개, 그러니까 시간 순서에 따라 사건을 배열하는 이야기 구조를 벗어던진다. 알무트가 항암을 하지 않겠다고 말하는 장면 뒤엔 토비아스가 앞서 적은 시리얼회사에 입사 면접을 보는 장면이, 그리고 다시 이혼서류에 사인을 하는 장면이 따라 붙는다. 이혼과 새로운 시작, 그러니까 앞의 장면과는 도통 어울리지 않는 이 장면이 어째서 이어붙은 것인가를 관객이 이해하기까지는 약간의 시간이 더 필요하다.

위 리브 인 타임 스틸컷
위 리브 인 타임스틸컷스튜디오 디에이치엘

헤어진 연인을 떠올리듯

영화는 어느 순간 알무트와 토비아스의 첫 만남을 보인다. 토비아스는 알무트를 알지 못하고, 알무트 또한 토비아스를 알지 못하는 순간이 있었다. 앞 장면에선 더없이 서로를 아끼는 듯 보였던 두 사람이 서로를 알지 못했던 순간이라니. 가만히 따져보니 두 장면 사이 시간의 순서가 바뀌어 있는 것이다. 그로부터 영화는 매 시퀀스를 비선형적으로 배치한다. 앞의 것이 나중에 있고, 뒤의 것이 앞서기도 하는데, 마치 퍼즐을 맞추듯이 하나하나 제 위치에 놓다보면 어느 순간 전체 그림이 드러나게 되는 것.

<위 리브 인 타임>은 비선형적 구조로써 사랑이 피고 마침내 지기까지의 이야기를 그린다. 한 사람을 만나 사랑하고 결실을 얻었으나 그 지극한 행복의 순간에 그를 보내야 하는 이야기다. 가까이 보면 비극이지만 한 걸음 떨어져 보면 세상에 그야말로 흔하고 흔한 이야기다. 벚나무에서 떨어지는 꽃잎 하나의 비극이다. 그러나 그 낙화 또한 아름답지 않느냐고 꽃놀이 하는 이의 시선을 잡아끈다.

사랑하고 사랑을 잃어본 이가 제 잃은 사랑을 떠올린다 생각해보자. 처음부터 끝까지, 그러니까 만남부터 상실까지를 우리는 선형적으로 기억하지 않는다. 손을 잡고 함께 빗속을 내달렸던 어느 계절과 첫 키스의 짜릿함과 사랑의 언어를 뱉어내던 붉은 입술과 두근거리던 고백의 순간과 서럽던 울음들과 매정하게 변해버린 표정과 우리가 함께 찾았던 아름답던 장소들과 세상 흔하고 흔하지 않은 그렇고 그런 것들로써 조각조각 기억할 뿐이다.

위 리브 인 타임 스틸컷
위 리브 인 타임스틸컷스튜디오 디에이치엘

형식적 특별함, 서사의 진부함

선형적이지 않아도 문제될 게 없다. 사랑했다면 지난 시간 가운데 그 사랑이 온전하게 남을 터다. 내가 그를 완벽하게 기억하지 못한 대도 사랑이 있었다는 사실 만큼은 사라지지 않는다. 물론 사랑이 끝났다는 것 또한 그러하다. 비선형적 기억의 연쇄로써 <위 리브 인 타임>은 알무트와 토비아스, 그들이 보낸 저간의 시간들을, 그 가운데 자리한 기억들을 하나씩 드러낸다.

그 속엔 두 사람의 낭만적이라면 낭만적인 만남이 있다. 운명적이라면 운명적인 사귐 또한 있다. 성실하거나 다정한 순간 또한 있다. 토비아스는 어느 모로 보나 좋은 남자이고 알무트는 그가 사랑하는 여자다. 두 사람의 사랑이 온전해지는 순간이 있으나 불운하게도 아주 오래 지속되지는 못한다. 토비아스는 알무트를 사랑하여 그녀가 제 남은 생을 원하는 대로 보낼 수 있도록 돕는다. 그렇게 두 사람은 시작된 사랑을 또한 아름답게 갈무리하려 한다.

다만 형식적 특이함을 배제하면 그렇게 흥미로운 이야기는 아닐 수도 있다. 어디서나 많이 보았던 소소한 이야기일 수도 있겠다. 사랑하고 사랑을 잃는 어느 커플의 이야기 말이다. 중요한 건 캐릭터에 있었다. 커플의 비극은 동시에 그들 각자의 비극이기에, 그를 딛고 일어서는 사랑은 또한 그들 각자의 사랑이기에 그래야 마땅했다. 그러나 <위 리브 인 타임>은 '알무트 리브 인 타임' 쯤에 그친다.

위 리브 인 타임 포스터
위 리브 인 타임포스터스튜디오 디에이치엘

주와 종으로는 피어나지 않는 연인의 이야기

너무나 무해하기만 한 토비아스는 스스로 사랑영화의 남자주인공임에도 알무트를 보조하는 조연쯤으로 전락한다. 바로 이 지점에서 <위 리브 인 타임>은 흥미로운 영화가 되지 못한다.

아쉽게도 영화는 플로렌스 퓨가 연기한 알무트를 활짝 피워내는 것과는 달리, 토비아스를 살아 있는 캐릭터로써 주목하지 않는다. 모든 결정은 알무트의 선택에 따르고, 토비아스는 심지어 단 한 번의 강요조차, 분노조차도 않는 것이다.

홀로 실망하고 슬퍼하다가 마침내는 승복하고 만다. 차라리 알무트의 전기영화라면 나았을 테다. 이 영화가 가슴을 뛰게 하지 못하는 건, 사랑이란 나에 앞서 상대를 위하는 것이지 그저 상대만이 있는 관계는 아닌 때문이겠다.
덧붙이는 글 김성호 평론가의 브런치(https://brunch.co.kr/@goldstarsky)에도 함께 실립니다. '김성호의 씨네만세'를 검색하면 더 많은 글을 만날 수 있습니다. goldstarsky@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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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영화평론가.서평가.기자.3급항해사 / '자주 부끄럽고 가끔 행복했습니다' 저자 / 진지한 글 써봐야 알아보는 이 없으니 영화와 책 얘기나 실컷 해보련다. / 인스타 @blly_kim / GV, 강의, 기고청탁은 goldstarsky@naver.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