릴스는 왜 영화가 아닐까?

[김성호의 씨네만세 1308] 제4회 반짝다큐페스티발 <보이지 않는 도시에서>

(* 이 글은 영화의 스포일러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어디서부터 어디까지가 영화일까. 영화가 하나의 집이라면 내 식구요 하고 감쌀 만한 작품은 어디까지일까. 그야말로 온갖 영상이 범람하는 시대, 영상이 영화의 필요충분조건이라면 우리는 하루에도 몇 편씩 영화를 찍고 있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엄마 전화기를 들고 카메라 어플을 켜 동영상 버튼을 잘못 누른 세 살 아이는 영화계 최연소 입봉의 기록을 세울 것이다.

릴스는 영화인가. 인플루언서가 찍어내는 유튜브 영상이나 미술관에서 흔히 마주하는 영상 미술 작품이라거나, 또 TV 방송 프로그램은 영화일까. 어느 것은 영화이고, 어느 것은 영화가 아니라면 그 이유는 무엇일까.

단어는 실재하는 사물과 개념을 구획하고 포집한다. 그를 통해 사람은 사물과 개념을 더 깊이 이해한다. 향유하고 소통하며 발전하도록 한다. 어디부터 어디까지가 영화인지 논하는 것이 필요한 이유가 여기에 있다. 그러나 오늘에 이르러서 이러한 시도가 장벽에 부닥치고 있다. 어리석은 이들은 그를 무용하다 말하고 심지어는 조롱하기까지 한다. 영화가 정체성의 위기를 겪는 것이다.

보이지 않는 도시에서 스틸컷
보이지 않는 도시에서스틸컷반짝다큐페스티발

반다페가 선택한 실험영화

어디 영화뿐일까. 영화제도 마찬가지다. 들이는 영화가 곧 정체성과 수준, 품격이며 지향으로 이어지는 영화제는 자연히 제가 어떤 작품을 소개할지 고민한다. 오로지 획일화된 덕목만이 기준일 수 없다. 보는 재미를 따질 수 있겠고, 기술적 혹은 서사적 완성도나 다루는 주제며 소재가 갖는 의미를 돌아볼 수도 있을 테다. 저항적인 작품을 선호할 수 있고 그렇지 않을 수도 있다. 영화란 매체의 형식을 돌아보게 하는 작품은 주류든 비주류든 여러 영화제로부터 꾸준히 선택을 받아왔다. 그 비중에 대하여선 다른 의견이 있을 수도 있겠지만.

제4회 반짝다큐영화제(이하 반다페)는 한국 유일의 비경쟁 중단편 다큐멘터리 영화제다. 비경쟁이란 선정작의 낫고 못함을 가려 상을 주거나 하지 않는다는 것이고, 중단편은 말 그대로 장편영화가 아닌 중편과 단편만을 대상으로 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한 가지 더, 극영화가 아닌 다큐멘터리를 취급한다. 바로 이 세 가지가 반다페의 주된 정체성을 이룬다.

그런데 위에 언급한 정체성의 혼란 또는 위기를 이 영화제라고 피할 수는 없다. 영화란 무엇인가, 어디까지가 영화인가를 고심하게 하는 상황들이 닥쳐온다는 뜻이겠다. 사실을 기록하는 다큐멘터리라 해서 예외일 수 없다. 어디까지가 다큐인가, 또 영화인가를 고민케 하는 작품들이 매년 이 영화제의 문을 두드린다. 이번 반다페 또한 마찬가지. 섹션8에서 소개된 <보이지 않는 도시에서>는 여러 출품작 가운데서 이 영화제가 고르고 고른 26편의 작품 가운데 하나다. 어쩌면 이중 다큐와 영화의 집의 울타리 가장 먼 곳까지 나가 있는 작품일 수도 있겠다.

보이지 않는 도시에서 스틸컷
보이지 않는 도시에서스틸컷반짝다큐페스티발

나고 자란 도시, 울산의 정체성

이채민 감독의 26분짜리 단편은 그녀가 나고 자란 울산을 배경으로 한 영상의 모음이다. 한 문장으로 영화를 소개하는 로그라인은 '보이지 않는 도시에서 보낸 편지'라 건조하게 적혀 있다. 이채민은 연출의 변을 통해 "내가 태어나고 자란 울산으로 되돌아가, 이제는 보이지 않는 것들을 포착하는 시도"의 결과물이라며 "도시의 이미지에서 파생되는 심상이 모여 하나의 장송곡이 되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작업을 시작했다"고 전했다.

제목이 가리키는 '보이지 않는 도시'란 감독이 나고 자란 울산이다. 한국 동남부 대표 공업도시로 부산과 인천을 제하면 가장 큰 항만을 보유하고 있기도 하다. 특히 산업에 쓰이는 에너지와 관련해선 주력 도시로, 상당수 유조선과 가스선의 기항지로도 유명하다. 영화에도 등장하는 반구대 암각화 등이 유명한데, 선사시대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역사와는 별개로 오늘의 주민 대다수는 타지에서 건너온 이주민들이다. 요컨대 여기서 태어나 살다 죽는 이는 그리 많지 않다는 이야기다. 공업도시라는 특별함이 이 영화 <보이지 않는 도시>의 출발이 되었을 수 있겠다.

반다페가 제공한 시놉시스는 다음과 같다.

보이지 않는 '나'는 우편엽서와 편지를 찾아다니다가 기차를 타고 공업 도시 울산으로 향한다. 공업탑 주변과 반구대 암각화 등을 돌아다니고, 공장이 보이는 숙소에서 누군가에게 편지를 쓴다.

보이지 않는 도시에서 스틸컷
보이지 않는 도시에서스틸컷반짝다큐페스티발

실험의 목적도 소통에의 의지도 '보이지 않는'

요컨대 주인공이 누군가에게 편지를 쓰기까지의 여정이란 중심된 서사가 있다는 이야기다. 그러나 막상 영화 속 서사는 두드러지기는커녕 그 존재감이 희미하다. 대부분의 시간 동안 화면 위에 떠오르는 건 울산과 관련한 흐릿하고 모호한 영상뿐이다.

영상의 연속이 저만큼이나 흐릿하고 모호한 서사와 만나 이루는 것이 무엇인지, 작품을 본 이 가운데 언어로 표현할 수 있는 이가 그렇지 못한 이보다 훨씬 적을 게 자명하다. 구태여 구분 짓자면 실험영화다. 글로써 적어 제출한 연출 의도며 로그라인, 또 GV에서 이어진 말보다 이 영화가 많은 것을 담고 있는지 이해하기 어렵다.

상영 뒤 이뤄진 GV를 통해 이채민 감독은 "'유년 시절을 지금 돌아보고 나중에 다시 한번 돌아보고 70이 넘어서도 돌아보고 하면 다 다르게 보일 것'이란 선생님의 말씀을 들은 적이 있었는데 '지금 내가 뒤를 돌아본다면 어떨까'하는 생각이 들어 카메라를 들고 그냥 울산에 가게 되었다"고 작품의 출발점을 전했다.

반짝다큐페스티발 포스터
반짝다큐페스티발포스터반짝다큐페스티발

일련의 실험영화가 거둔 성취 뒤에서

이미지와 덧입혀진 소리로써 구현하는 도시의 감각이 감독의 유년과 어떻게 관계를 맺는지 명확히 이야기하기 어렵다. 단순히 감각하거나, 낯설게 하거나, 저항하는 것 사이에서 어느 무엇도 선택하고 있다고 보이지 않는다. 말하자면 이미지와 소리의 나열로써 도시와 그 안의 저 자신을 드러내고 있지만 동시에 드러내고 있지 않은 듯도 하다. '보이지 않는 나'와 '보이지 않는 도시'는 무얼 말함인가. 그로부터 구현하고 표현하려 하는 건 또 무엇인가. 상대를 고려하고 있는 걸까. 나는 어느 무엇도 확신하고 답할 수가 없다.

1920년대 이후 시작된 일련의 유럽발 실험영화, 그러니까 기존 영화적 방법론에 저항하고 해체하며 혁신하려던 시도는 1950년대 이후 레트리즘과 누벨바그로 양분되는 흐름을 정립했다. 미국에선 언더그라운드 영화로 수렴되는 도전적이고 저항적인 일군의 작품 가운데 실험영화가 있었다. 무엇을 위한 실험인가를, 무엇으로부터 비롯된 실험인가를 명징하게 말할 수 있었던 시대적, 사조적 흐름 또한 있었다. 철학과 사상이, 맥락과 의도가 선명했다.

그러나 오늘의 어떤 실험영화들에선 만든 이가 제출하는 연출 의도를 넘어서는 도전이며 저항, 극복하려는 시도며 관심을 찾아보기 어렵다. 이미지나 소리에 대한 신뢰가 아니라 표현력과 서사의 부재를 더욱 강하게 느끼게 되고는 한다. 감수성이며 실험정신이 아닌 모호함과 맥락 없음만이 부각되는 작품으로부터 관객은 무엇을 느낄 수가 있을까. 직접 어느 공업도시를 오가는 경험보다 못한 체감이라면 실험의 가치를 대체 어디에서 찾을 수 있다는 말인가.
덧붙이는 글 김성호 평론가의 브런치(https://brunch.co.kr/@goldstarsky)에도 함께 실립니다. '김성호의 씨네만세'를 검색하면 더 많은 글을 만날 수 있습니다. goldstarsky@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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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영화평론가.서평가.기자.3급항해사 / '자주 부끄럽고 가끔 행복했습니다' 저자 / 진지한 글 써봐야 알아보는 이 없으니 영화와 책 얘기나 실컷 해보련다. / 인스타 @blly_kim / GV, 강의, 기고청탁은 goldstarsky@naver.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