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큐멘터리 <류이치 사카모토 : 다이어리> 스틸컷
영화사 진진
말년의 사카모토는 더 이상 정교한 선율에 집착하지 않았습니다. 그의 병상 곁에는 항상 소리가 나는 물건들이 놓여 있었습니다. 그에게 구원은 화려한 오케스트레이션이 아니라 창밖을 때리는 무질서한 빗소리였고, 소리 없이 흘러가는 구름의 움직임이었습니다.
그는 이미 40대부터 자신의 음악적 종착지를 자연으로 설정했습니다. 서양 음악의 12음계라는 틀이 자연의 소리를 가두는 감옥처럼 느껴졌던 것일까요. 그는 쓰나미에 휩쓸려 조율이 나간 피아노 소리를 들으며 자연이 조율해 준 아름다운 상태라고 말합니다. 영화는 그가 인간의 언어와 음계를 하나씩 지워내고, 온 우주에 가득 찬 본연의 울림을 붙잡으려 애쓰는 과정을 스크린 속에 담담히 담아냅니다.
육신이 너덜너덜해지는 고통 속에서도 사카모토는 시선을 외부로 돌리는 것을 멈추지 않았습니다. 동일본 대지진 피해 지역 아이들로 구성된 토호쿠 유스 오케스트라를 향한 애정은 각별했습니다. 그는 아이들에게 음악이 단순한 기술이 아닌, 삶을 버티게 하는 존엄한 힘이라는 것을 가르치고 싶어 했습니다.
또한 러시아 우크라이나 전쟁의 비극 속에서 우크라이나 음악가 일리야를 위해 곡을 쓰는 등, 그는 마지막 순간까지 예술가가 사회적 비극에 어떻게 응답해야 하는지 몸소 보여주었습니다. 병상에서 산소호흡기에 의지한 채 오케스트라 공연 영상을 보며 허공에 손을 휘젓는 장면은, 그의 영혼이 이미 육신을 넘어 타인의 고통과 희망에 닿아 있음을 보여주는 이 영화의 절절한 장면이었습니다.
마지막 일기, 숫자로 기록된 생의 존엄
2023년 3월 26일, 그가 남긴 마지막 일기는 시도, 음악적 메모도 아니었습니다.
'0545 36.7/ BP 115-80/SPO 97'
시간, 체온, 혈압, 산소포화도. 한 인간이 이 세상에 존재하고 있음을 증명하는 가장 건조하고도 정직한 수치들입니다. 그는 마지막 순간까지 자신이 살아있음을 그 숫자들로 기록했습니다. 그리고 이틀 뒤인 3월 28일, 그는 영원한 침묵 속으로 떠났습니다.
타계 1시간 전까지 의식이 없는 상태에서도 손가락을 까딱이며 피아노를 치듯 움직였다는 기록은, 그에게 음악은 직업이나 예술을 넘어선 호흡 그 자체였음을 말해줍니다. 그는 숨을 거두는 그 순간까지도 자신만의 보이지 않는 건반 위에서 생의 마지막 악장을 연주하고 있었습니다.
경계를 지우는 사유, 그리고 보름달
▲<류이치 사카모토: 다이어리> 스틸
(주)영화사진진
영화의 마지막을 장식하는 보름달 사진들은 그가 지난 3년 6개월간 직접 찍은 기록들입니다. 그는 알고 있었을 것입니다. 자신이 찍은 이 달들이 언젠가는 자신이 없는 세상에서도 누군가의 밤을 비출 것임을 말입니다.
'류이치 사카모토: 다이어리'는 우리에게 묻습니다. 당신의 생이라는 샘이 마르고 있다는 사실을 안다면, 남은 시간 동안 무엇을 기록하겠습니까? 예술은 길고 인생은 짧지만, 그 짧은 인생을 예술처럼 살아낸 그의 기록은 우리에게 근사하게 나이 들고, 정직하게 떠나는 법을 가르쳐줍니다.
씨네큐브를 나설 때, 그를 따라 산 호피무늬 안경 너머로 마주한 광화문의 밤하늘은 이전과는 조금 다른 무게로 다가왔습니다. 그의 음악은 이제 안개처럼 흩어지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듣는 모든 빗소리와 바람 소리 속에 영원히 깃들어 우리를 위로할 것입니다.
Ars longa, vita brevis (예술은 길고, 인생은 짧다)
그의 묘비명처럼 남은 이 문구가 이제 우리 각자의 다이어리 첫 페이지가 되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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