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진 감독이 '신구'에게 영감받아 그를 위해 쓴 블랙코미디

[안지훈의 연극 읽기] 연극 <불란서 금고: 북벽에 오를 자 누구더냐>

 연극 <불란서 금고> 공연 사진
연극 <불란서 금고> 공연 사진장차, 파크컴퍼니

아흔 살의 최고령 배우 신구가 무대에 오르며 연기 역사를 이어간다. 한국 코미디 연극의 대가로 꼽히는 장진 감독의 신작 <불란서 금고: 북벽에 오를 자 누구더냐(이하 '불란서 금고')>를 통해서다. 장진은 1995년 신춘문예를 통해 데뷔한 이후 특유의 리듬감을 바탕으로 다수의 블랙코미디 연극을 집필한 것은 물론 영화계로도 활동 영역을 넓혀왔다. <불란서 금고>는 장진이 10년 만에 다시 펜을 들고 집필한 신작 연극이다.

<불란서 금고>가 특별한 이유는 이 연극이 신구에게 영감을 받고, 신구를 위해 쓰였다는 점이다. 장진은 지난해 신구가 출연한 <고도를 기다리며>를 관람하고 영감을 얻어 집필을 시작했다. 그동안 신구와 단 한 번도 작업해 보지 못했던 지난날을 돌이켜보며, 신구를 자신의 무대에 모시겠다는 일념으로 오랜만에 새 희곡을 썼다.

신구가 맡은 역할은 '맹인'으로, 은행 지하에 있는 금고를 열려는 인물이다. 맹인 외에도 밀수업자, 대학 교수, 건달, 은행원이 지하에 모여 함께 금고를 열고자 한다. 프랑스 연극에서 쉽게 볼 수 있는 소동식 구조를 빌려, 금고를 열겠다는 목적 하나로 이곳에 모인 사람들에게 벌어지는 일을 다뤘다.

욕망을 마주하게 하는 블랙코미디

 연극 <불란서 금고> 공연 사진
연극 <불란서 금고> 공연 사진장차, 파크컴퍼니

이들은 서로를 알지 못한다. 서로의 이름도, 과거도 알지 못한 채로 은행 지하에 모였다. 이들은 금고를 털자는 누군가의 목소리에 이끌려 금고 앞에 모였다. 자정에 은행 건물이 정전되면 보안 장치가 멈출 것이고, 그때 금고를 열어야 범행을 들키지 않을 수 있다. 이들은 자정을 기다리며 금고를 안전하고 효과적으로 털 수 있는 작전을 세운다.

지난 3월 22일 <불란서 금고>를 관람하기 전까지만 해도 필자는 당연히 금고에 돈이 들어있을 것이라고 예상했다. 금고에 든 돈을 훔쳐 각자가 원하는 바를 이루고자 할 것이라고 짐작했다. 예상은 빗나갔다. 건달은 돈을 훔치고자 하지만, 그 외의 인물들은 다른 걸 얻고자 한다는 것을 연극은 초장에 선언한다.

건달 외의 인물들에게는 금고에 돈이 들어있는 게 중요하지도 않고, 꼭 돈이 들어있을 필요도 없다. 이를테면 밀수업자는 금고 안에 자신이 원하는 그림이 들어있을 것이라고 기대하고, 대학 교수와 은행원도 마찬가지로 자신의 바람을 투영한다. 금고에 들어있는 것은 각자가 욕망하는 것이고, 그렇다면 금고가 열리는 순간 가장 먼저 마주하게 되는 것은 자기 내면의 욕망이다.

"북벽 장춘이라고 했다. 깎아내린 듯 가파른 돌 절벽, 가장 높은 봉우리가 북벽이었고, 그 위에 오른 자가 상좌를 틀어 모든 걸 가져갔다. 북벽에 오르면 아래 세상이 훤히 보였고, 구름도 발 아래 있으니 두려울 것이 없었지."

맹인의 대사가 연극을 관통한다. 북벽은 봄바람이 불어오는 북쪽의 봉우리인데, 모두가 이곳에 오르고자 한다. 앞을 볼 수 없는 맹인은 연극의 시작과 끝에서 북벽을 이야기하며 이 모든 소동의 중심에 욕망이 자리하고 있음을 밝힌다. 연극의 말미에 이르러 각 인물들을 금고 앞에 불러모은 목소리의 정체가 밝혀지는데, 이로써 유쾌한 블랙코미디에 교훈 한 스푼이 얹힌다.

신구를 위한 연극, 맹인에게서 엿보이는 예술가의 면모

 연극 <불란서 금고> 공연 사진
연극 <불란서 금고> 공연 사진장차, 파크컴퍼니

신구를 염두에 두고 대본을 썼다고 하니 '맹인'이라는 캐릭터에 대해 더 생각해 볼 필요가 있을 것 같다. 앞을 볼 수 없는 맹인은 뛰어난 청력으로 금고의 톱니바퀴 소리를 세밀히 파악하여 금고를 열 수 있는 능력을 지녔다. 금고를 열기 위해, 그리고 다른 인물들이 금고 안에서 무언가를 얻기 위해서는 맹인이 필요하다.

맹인이 얻고자 하는 것은 금고 안에 있지 않다. 다른 인물들과 구별되는 점이다. 다른 인물들의 목적이 금고를 연 행위 다음에 따르는 무언가에 있다면, 맹인의 목적은 금고를 여는 행위 그 자체다. 맹인은 금고를 열 때 들리는 '가장 아름다운 마찰음'을 경험하고 싶어 한다.

필자는 그런 맹인에게서 예술가의 면모를 엿보았다. 남들이 모두 가지고 있는 것(시력)을 잃었지만 그걸 탐하지 않고, 남들이 전혀 욕망하지 않는 것(금고의 마찰음)을 바란다. 이를 위해 남들이 가지지 못한 예민한 감각을 발달시켰다. 세속적인 것을 바라는 인물들 사이에서 맹인은 자신이 진정 바라는 한 가지를 위해 다른 세속적인 것들을 기꺼이 내려놓는다.

금고를 여는 순간 맹인 역의 배우 신구 얼굴에 피어난 웃음, 금고 안에 있는 그 무엇도 탐하지 않고 홀연히 떠나는 맹인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불란서 금고>의 의미를 정리할 수 있었다. 내밀한 욕망을 따끔한 웃음으로 바라볼 수 있게 해준 이 연극이 소중했고, 무엇보다 "무대에 선다는 건 아직도 내가 살아 있다는 증거"라고 말씀하신 배우 신구의 연기를 볼 수 있어 영광이었다.

신구와 번갈아가며 맹인을 연기하는 배우는 성지루다. 장진 감독은 프로그램북에서 전한 인사말을 통해 "신구 선생님과 더블 캐스팅이라는 게 심적으로 얼마나 부담이고 힘든지 안다"며 성지루를 향해 각별한 감사를 전했다. 이외에도 장현성·김한결(교수 역), 정영주·장영남(밀수 역), 최영준·주종혁(건달 역), 김슬기·금새록(은행원 역), 조달환·안두호(이외 배역)가 출연한다. 공연은 6월 7일까지 NOL 서경스퀘어 스콘 1관에서 계속된다.

 연극 <불란서 금고> 공연 사진
연극 <불란서 금고> 공연 사진장차, 파크컴퍼니
공연 연극 불란서금고 신구 장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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