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콜드 미트' 스틸 사
㈜오싹엔터테인먼트
반면 <콜드 미트>에서 밀실은 자연, 혹은 신이 설정한 공간이라는 인상을 준다. 인간의 의지로는 어찌할 수 없는 거센 눈보라와 그 안에 고립된 상황은 배경에 그치지 않고, 인간을 심판하기 위해 등장한 한 캐릭터처럼 작동한다.
영화 초반부에 등장하는 숲속 마물에 관한 전설은 복선이지만 복선을 넘어, 이 고립이 기독교 예정론의 영화적 변주임을 암시한다. 살인마에게 예정된 이 지옥은 바깥의 압도적인 혹한이 더 치명적인 '빌런'으로 작용하는 역설에서 비롯한다. 반대로 타인이 지옥임을 알면서도 그 지옥의 온기를 빌려야만 하는 절박한 생존은, 인간의 악의보다 더 거대한 운명의 힘이 삶에 개입하고 있음을 보여주는 철학적 경구다.
서스펜스와 반전
장르 문법으로 볼 때, 등장인물과 관객이 위험을 인지하는 방식에 따라 스릴(Thrill)과 서스펜스(Suspense)는 구분된다. 스릴이 예기치 못한 충격에서 발생하는 순간적 흥분이라면, 서스펜스는 위험의 존재를 인지한 채 그것이 언제 현실이 될지 기다리며 축적되는 긴장이다. <콜드 미트>는 이 두 가지 요소를 배합한다.
영화 초반, 데이비드의 정체가 드러나는 순간은 전형적인 스릴의 영역이다. 구조자인 줄 알았던 인물이 연쇄살인범으로 변모하며 몰아치는 추격과 물리적 충돌은 관객의 아드레날린을 단숨에 끌어올린다. 하지만 차가 고랑에 빠진 이후의 서사는 서스펜스에 가깝다.
특히 위험을 인지한 후에도 공간적 제약 때문에 살인마와 한 이불을 덮다시피 해야 하는 상황은, 언제 터질지 모르는 폭탄 옆에서 잠을 자야 하는 서스펜스의 극치를 보여준다. 영화는 이처럼 서스펜스로 공포를 지연하다가 결정적인 순간에 날카로운 스릴을 폭발함으로써, 관객을 영화 속 밀실의 제3의 동승자로 가두는 강력한 매력을 발휘한다.
<콜드 미트>의 또 다른 묘미는 관객의 예상을 끊임없이 배반하는 다층적인 반전과 그 속에 담긴 존재론적 물음에 있다. 영화는 구조자가 살인마로 변하는 1차적 전복에 그치지 않고, 밀폐된 차 안에서 벌어지는 생존 게임의 규칙을 수시로 뒤집는다. 가장 인상적인 지점은 애나가 체온을 유지하기 위해 자신을 죽이려 했던 연쇄살인범의 품으로 파고드는 순간이다. 가장 끔찍한 적에게 생물학적 생명을 의탁 해야 하는 극한의 아이러니를 보여주며, 인간사에서 선과 악이 얼마나 기묘한 형태로 맞물리는지를 시각화 한다.
이어진 결말은 일종의 '데우스 엑스 마키나'적인 성격을 띤다. 그렇다고 단순히 서사적 편의를 위한 장치로 보이진 않는다. 어쩌면 영리한 존재론적 해법으로 격상된다. 극한의 공포 속에서 애나가 목격하는 초자연적 마물의 개입은 그녀가 겪는 심리적 투쟁의 발현이자, 이 사건의 최종 결정권이 인간에게 있지 않음을 시사한다. 감독은 관객에게 착각을 일으켰다가 뒤집는 여러 차례의 반전을 통해, 탈출의 열쇠가 인간의 완벽한 계획이 아니라 운명적인 개입에 의해 쥐어질 수 있음을 보여준다.
인간의 주체성과 운명적 해방의 경계
<콜드 미트>와 <미저리>의 피해자들은 가해자가 설정한 지옥의 규칙 안에서 자신들만의 반격을 완수한다. 하지만 <콜드 미트>가 도달하는 종착지는 조금 더 다층적인 의미를 내포한다. 애나의 생존은 단순히 악에 대항해 승리했다는 평면적인 승전보가 아니다. 그녀는 자신을 사냥하려던 포식자의 체온을 탈취하고 그 폭력의 논리를 역이용하지만, 그 과정에서 그녀를 구원하는 최종적인 힘은 인간의 영역을 넘어선 곳에서 찾아온다.
▲'콜드 미트' 포스터㈜오싹엔터테인먼트
인간은 의지를 지닌 주체로 이 삶의 지옥을 돌파하려 투쟁해야 하지만, 결말의 성패는 인간의 소관이 아닐 수도 있다는 운명론적 비애가 엿보인다. <미저리>의 폴이 타자기를 휘둘러 스스로의 자존을 증명했다면, <콜드 미트>의 애나는 포식자의 온기를 빌려 죽음의 문턱을 버티어 낸 후 '예정된' 기적과 같은 순간을 맞이한다.
악과 닮아가는 타락이 아니라, 압도적인 악을 생존의 도구로 부림으로써 그 권위를 해체하는 승리인 동시에, 최종적인 구원은 인간의 의지 너머에 있다는 겸허한 존재론적 고백이기도 하다. 주체적 의지로 운명에 맞선 인간의 결연함과, 그럼에도 삶과 죽음의 최종 판결문은 인간이 아닌 다른 곳에서 쓰인다는 냉엄한 진실이다. 11일 개봉.
안치용 영화평론가
저작권자(c) 오마이뉴스(시민기자),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오탈자 신고
문학, 영화 등 예술을 평론하고, 다음 세상을 사유한다. 다양한 연령대 사람들과 세계문학과 인문학 고전을 함께 읽고 대화한다. 나이 들어 신학을 공부했다. 사회적으로는 지속가능성과 사회책임 의제화에 힘을 보태고 있다. ESG연구소장. 아주대 융합ESG학과 특임교수, 영화평론가협회/국제영화비평가연맹 회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