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단한 땅에 발을 딛고 서 있지만, 불안정한 사람들이 있다. 지난 12일부터 14일까지 서울 종로구 두산아트센터에서 공연된 진윤선 연출의 연극 <나의 땅은 어디인가>에는 자기 뿌리에 대해 고민하는 인물들이 등장한다. 이들은 함께 등장하지만 직접적으로 연결되지 않는다.
각각의 배우는 모노드라마처럼 홀로 연기한다. 대상은 각각 다르다. 이주민 3세인 차비에게는 한국 출신 증조부가, 쿄에게는 대학 시절 가깝게 지냈던 경비원이, 정민에게는 떠나간 친구가, 사모에게는 키우던 고양이가 그 대상이다. 관객은 어쩌면 혼잣말 같기도 하고 편지 같기도 한 이들의 이야기를 3면으로 무대를 둘러싼 객석에서 지켜보게 된다.
무대는 일상적인 공간이다. 벤치, 소화전 등 우리가 평소 보던 공간의 일부를 옮겨둔다. 빈 무대와 가깝기 때문에 인물들의 상황에 맞춰 다른 공간으로 변화하기가 용이하다. 또 이런 무대는 인물들의 이야기가 우리가 알아채지 못했더라도 우리 주변에 있는 이야기였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 공연은 '두산아트랩 공연'의 여섯 번째 공연으로 올라왔다. 두산아트랩 공연은 40세 이하 젊은 예술가들이 새로운 작품을 실험할 수 있도록 지원하는 프로그램이다. 매년 정기 공모를 통해 선정된 작품을 공연할 수 있도록 지원한다. 젊은 예술가들이 무대를 통해 새로운 시도와 생각을 실험할 수 있는 공간이 된다.
▲연극 <나의 땅은 어디인가> 공연 사진서울 종로구 두산아트센터에서 진행된 연극 <나의 땅은 어디인가>의 공연 사진이다.
두산아트센터
고립의 순간 경험하는 사소한 스침
진윤선 연출은 <나의 땅은 무엇인가>의 대본을 직접 썼다. 진 연출은 지난해 1인 연출가 프로젝트인 '스칸도 프로젝트'의 첫 번째 연극 <침묵과 소음>에서 고립을 통한 연대를 전한 바 있다. 진 연출은 "연출로서 첫 발을 디딘다고 생각할 때 어떤 이야기를 해야 할지 고민했다"며 "이 작품은 고민하던 질문들의 총합이다"라고 설명했다.
진 연출이 그리는 연대는 '고립'이라는 전제가 놓여 있다. 일상에서 우리가 경험하는 연대는 사소한 스침에서 시작되기 때문이다. <나의 땅은 어디인가>에 나오는 차비, 쿄, 정민, 사모는 자신의 존재는 끊임없이 증명해야 하는 상황에 놓인다. 세상은 때로는 사람들의 시선으로, 또 법과 제도로 그들을 방해한다.
그런 인물들이 홀로 놓여 있는 고립의 상황에서 한 발짝 나설 수 있는 것은 다른 이의 '말'이다. '정민' 역할을 맡은 배우 박예리는 "만나진 않지만 내 안에 흐르는 말을 다른 배우의 대사와 상황에서 듣게 된다. 이 말들이 위로가 된다"고 말했다. 이처럼 이들이 경험하는 연대는 순식간에 상황을 긍정적으로 바꾼다던가, 문제를 완벽하게 해결하진 못하지만 가능성과 위로의 실마리가 된다.
인물들이 '땅'을 찾아 나서는 방법은 모두 다르다. 차비는 증조부의 삶을 알기 위해 한국을 찾고 쿄는 알고 있던 경비원이 무연고자로 일본에서 죽자 그의 유골을 인계받는다. 차비는 한국 여행을 통해, 쿄는 죽은 이의 추도문을 쓰면서 이미 사라져 버린 이들의 생을 되짚는다. 그 과정에서 아주 사소한 연결이라도 정체성의 희미한 단서가 될 만한 것을 찾는다.
연극에서 말하는 땅은 차비처럼 지금 당장 내가 딛고 있는 '공간'일 수도 있고, 쿄와 같이 가본 적 없지만 늘 궁금해하는 곳일 수 있다. 또 난민인 사모처럼 본디 있던 곳을 떠나 새로 정착해야 하는 곳이며, 정민처럼 평생을 밟아왔지만 언젠가는 떠나야 하는 곳이 된다. 인물들의 이야기 속에서 관객들은 자신의 땅은 무엇일지 고민하게 된다. 그리고 우리가 모두 이야기 속 인물들과 다르지 않다는 것을 깨닫게 될 때 생기는 공감이 곧 연대가 된다.
▲<나의 땅은 어디인가> 연습 사진진윤선 연출은 프로그램 소개와 함께 <나의 땅은 어디인가> 연습 중 배우들이 직접 그림으로 채운 칠판을 공개했다. 진 연출은 "배우들이 스스로 나서 칠판을 가득 채웠다. 작품 안의 요소들이 빼곡히 들어있다"고 설명했다.진윤선
'땅'이 없어도 서로에게 닿는 방법
네 명의 인물을 연기하는 배우들이 따로 혹은 함께 나온다. 한 인물이 자신의 이야기를 연기할 때 다른 배우는 지문을 읽어주기도 한다. 진 연출은 "극 중 인물들은 혼자 놓여 있지만 누군가가 계속 곁에 있음을 지문을 읽는 배우에게 상징하게 하고자 했다"고 말했다. 그는 배우들에게 '순간을 함께 하는 것처럼 지문을 읽었으면 좋겠다'고 요청했다.
각자 따로 이야기하던 배우들은 한순간 함께 비를 맞는다. 각자의 시간과 공간에서 맞는 비지만, 순간 무대에 다 같이 있는 모습으로 다른 곳에 있는 이들의 연결을 의미한다. 이 장면은 연극이기에 가능한 것으로 <나의 땅은 어디인가>를 연극으로 만나야 하는 이유다. 세상의 가장자리에 놓인 이들의 연대는 존재만으로 아름답게 다가온다.
우리는 살아가면서 타인의 존재를 의식하지 못한다. 혼자라고 생각하며 외로움을 느끼기도 하고, 자신의 감정을 토해내거나 소화하지 못해 괴로워하기도 한다. 구체적이고 특수한 각자의 사연들은 타인이 듣기에 이해가 되지 않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개인들은 어쩌면 '우리'가 될 수 있는 이들로, 아무리 특수하고 구체적인 삶을 산다고 해도 결국 공동의 아픔을 안게 된다.
아픔을 치유하는 것은 사소한 스침으로 시작된다. <나의 땅은 어디인가> 마지막 공연 이후 진행된 아티스트 토크 시간에 관객들은 그 스침을 경험했다. 진 연출은 그 시간을 "서로 이야기를 얹어가는 순간들이 아름다웠고 힘이 됐다"고 말했다. 모르는 관계지만 같은 공연을 봤다는 것만으로도 마음을 나누는 것, 그것이 약간의 스침이며 연대다. 마음이 닿은 사람들은 서로를 외면할 수 없다.
한 관객은 "월세와 전세 등으로 '자기 집'을 갖기 어려운 청년세대 역시 정처 없이 떠도는 연극 속 인물들과 닮았다"고 말했다. 어떤 이유에서든 아직 자신의 땅을 찾지 못한 이들은 무대뿐 아니라 현실에도 존재한다. 방황하고 떠돌아야 할지언정, 그들을 외면하지 않는 사회가 되기까지 <나의 땅은 어디인가>의 의미는 변하지 않는다. 고립 속에서 그려낸 작은 연대가 모두에게 닿을 때, 비로소 우리는 서로를 바라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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딛고 있는데 휘청이는 사람들, 그들이 느끼는 '연결'의 연극