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 모든 것에 그림자가 있다. 심지어 인간의 내면에도 그림자가 있다. 심리학계의 거두 칼 구스타프 융은 인간에게 두 개의 인격이 있다고 보았다. 하나는 밖으로 표출되는 외적 인격이다. 다른 하나는 내면에 감춰져 있으나 분명히 존재하는 내적 인격이다. 융은 이를 자아와 그림자라 불렀다.
해가 기울면 그림자가 늘어나듯, 내적 인격 또한 커지기도 하고 작아지기도 한다. 자아가 너무 비대할 때 그림자는 억눌린다. 자아가 작으면 그림자가 급격하게 커져 빈 공간을 메운다. 자아와 그림자가 이루는 균형이 무너지면 그 불균형한 상태가 인간을 위태롭게 한다. 무기력하고 우울하다거나 무엇에 지나치게 집착하고 폭력적이 되는 등 의식적으로 통제할 수 없는 문제를 일으킨다. 급기야 자아가 붕괴되고 그림자가 그를 지배하기도 한다. 되돌릴 수 없는 순간이 닥칠 수도 있다.
요컨대 모두에게 그림자가 있다. 탁월한 예술가라면 그 그림자를 공략하는 저만의 비기가 있게 마련이다. 의식하는 자아를 설득하는 것만큼이나, 아니 많은 경우 그보다도 더 그림자를 공략하는 편이 효과적인 때문이다.
우리는 세기말 세기초 왕가위가 쏟아낸 작품이 어째서 좋은지를 쉽게 말하기 어렵다. 감각적인 그의 영화가 감각하는 것은 명확한 서사나 그럴듯한 주제의식이 아니다. 대사와 대사 사이, 컷과 컷 사이, 인물과 인물 사이, 언급되지 않고 조명되지 않은 것들이 빚어내는 인상들이 보는 이를 매료시킨다. 우리는 이해하지 못하는 것에 대하여도 아름다움을 느낀다. 물론 그 반대도 얼마든지 있다. 그를 잘 해내는 이들과 그 작품을 우리는 오래도록 그 이유조차 집어 말하지 못한 채로 애정한다.
▲덱스터스틸컷
쇼타임
'설정이 다했다', 놀라운 인기 비결
<덱스터> 시즌8은 장장 여덟 해를 이어온 시리즈의 마지막 시즌이다. 자극적이고 수위 높은 콘텐츠로 승부하는 미국 대표 케이블채널 쇼타임의 대표작으로, 미국 드라마 역사에 손꼽히는 명작이다. 그 성과에 힘입어 오리지널 시리즈 이후에도 '뉴 블러드'며 '오리지널 신', '레저렉션' 시리즈 등 프리퀄과 시퀄 속편이 여럿 제작됐다. 최근엔 <덱스터: 레저렉션> 시즌2 제작이 발표되며 수많은 팬들을 흥분시켰다. 일회적 프로젝트가 아니라 공식적으로 시리즈를 부활시킬 것임을 확인한 것이다.
이 시리즈의 성공비결 중 첫째는 역시 설정이겠다. 주인공인 덱스터 모건(마이클 C. 홀 분)는 범죄자다. 그것도 살인범이다. 그냥 살인범인 것도 아니다. 벌써 몇 명을 죽였는지도 알 수 없는 연쇄살인마다. 심지어는 한 번도 잡힌 적 없는, 앞으로도 계속 살인을 이어갈 흉악범죄자다. 여기서 끝이 아니다. 그는 경찰이다. 마이애미 경찰청 강력계에서 혈흔분석가로 일한다. 첨단 과학기술로 범죄를 분석하는 전문가가 밤에는 끊임없이 살인을 저지른다는 이야기다. 제 지식이 낮에는 범죄를 해결하는 데 쓰이지만, 밤에는 범죄를 저지르는 데 쓰인다.
놀라운 사실이 더 있다. 그는 경찰 집안의 자식이다. 아버지 해리 모건(제임스 레마 분)은 마이애미 형사로 평생을 일했다. 그를 동경한 덱스터의 여동생 데브라(제니퍼 카펜터 분)은 마이애미 경찰청 역사상 최연소 경위가 됐다. 덱스터의 오늘을 만든 건 아버지인 해리다. 그가 흉악범죄 피해자의 유가족인 덱스터를 입양했고, 어릴 적부터 사이코패스적 본능을 억제하는 훈련을 비밀리에 시켜왔던 것이다. 그 결과로써 덱스터는 탁월한 살인마이자 뛰어난 경찰 과학범죄 수사관이 된다.
▲덱스터스틸컷
쇼타임
사람들이 가장 좋아하는 연쇄살인마
아버지가 만든 원칙들을 그가 죽고 나서도 충실히 따르는 덱스터다. 가장 중요한 건 어떠한 경우도 붙잡히지 않는 것. 그리고 오로지 죽어 마땅한 자만 죽이는 것이다. 죽여 마땅한 자는 살인을 저지른 자, 그러고도 경찰에 붙잡히지 않는 자들이다. 정말이지 세상엔 너무나 많은 범죄자들이 아무렇지 않게 활보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 사정이 비단 미국 마이애미에만 있는 것은 아니기에 이 드라마를 보는 많은 이들이 덱스터의 범행을 응원한다. 말하자면 살인범을 응원하는 평범한 시민들이 태어나게 되는 것이다.
그렇다. <덱스터> 시리즈는 살인범을, 그것도 연쇄살인마를 응원하게끔 한다. 쇼타임과 함께 미국 유료 케이블채널의 양대 방송국으로 꼽히는 HBO의 명작 드라마 <식스 핏 언더>의 책임감 있는 장례지도사를 듣도 보도 못한 살인마로 만든 <덱스터>는 마침내 덱스터와 마이클 C. 홀에게 '미국인이 가장 좋아하는 연쇄 살인마'란 기묘한 별명까지 안겼다. 이와 같은 파격적 설정이 이 작품이 오늘에 이르도록 한 첫째가는 비기였을 테다.
시즌8은 오리지널 시리즈의 장렬한 최후다. 시리즈 가운데 눈이 맞아 마이클 C. 홀과 결혼에 이르렀고, 다시 이혼한 제니퍼 카펜터에게도 특별한 시즌이 됐다. 그녀가 연기한 덱스터의 여동생 데브라가 사실상 시즌의 주인공이자 시리즈의 끝을 맺는 인물이 되는 때문이다.
시리즈는 앞서 제 오빠가 살인마라는 사실을 안 데브라가 마침내 그 범행을 은폐하고 심지어는 돕지 않을 수 없는 상황으로 내몰린 뒤의 이야기다. 제가 알던 오빠에게 상상할 수 없는 그림자가 있었단 사실을 받아들여야 하는 데브라는 스스로의 그림자와도 대면하게 된다. 아버지에게 인정받기 위해, 또 그 스스로 정의롭고 열정적인 경찰이었던 그녀가 더는 제가 만든 자아상을 유지할 수 없게 되며 파멸하고 마는 것이다.
▲덱스터스틸컷
쇼타임
그림자가 마침내 모습을 드러낼 때
억눌렸던 감정과 욕구가 분출하고 스스로를 파괴하려는 동력이 표면화된다. 그토록 확고했던 경찰로서의 자긍심이며 자부심이 깨어져나가고 스스로 직을 던져 사설 탐정사무소의 문제 많은 직원이 된다. 도리어 살인하지 않으면 골초 못잖게 금단증상에 시달리는 덱스터가 자아와 그림자의 건강한 균형을 잡고 있는 듯 느껴질 정도다.
시즌8은 이제껏 갖고 있던 시리즈의 동력을 소진하며 예고된 결말로 치닫는다. 연쇄살인마의 필수조건이 무엇인가. 또 덱스터가 끝끝내 지켜야 할 첫 원칙이 무언가. 어떠한 경우에도 잡히지 않는 것이고, 그를 위해 제 신상을 감춰야 하는 일이다. 그러나 시리즈가 무려 8시즌을 이어오며 더는 그를 지키기가 어려워졌다. 연쇄살인마의 살인행각이 보는 입장에서 재미있기 위해선 압도적이어선 안 된다. 끊임없이 위기가 있어야 한다. 검거될 수 있다는 불안감이 지속돼야 한다. 그래서 조금씩 덱스터를 범인으로 지목할 수 있는 지점들이 주변에 흩뿌려지게 되는 것이다.
동생뿐 아니라 몇몇 이들이 덱스터의 진짜 모습을 완전히, 또는 일부나마 알게 된다. 그건 시리즈를 지속하기 위한 어찌할 수 없는 선택이었겠으나, 동시에 시리즈의 생명력을 갉아먹는 일이기도 하다. 더는 완전무결한 사이코패스 살인마일 수 없는 때문이다.
▲덱스터포스터쇼타임
살인자를 좋아하는 살인하지 않는 사람들
대신 시리즈를 지탱하는 건 어두움, 그림자에 대한 본원적 끌림이다. 어째서 인간은, 심지어 일상에선 선한 준법시민인 이들조차 살인에 끌리고 살인마에 열광하는가. 법과 도덕, 윤리를 지키며 살아가는 수많은 사람들에게는 그에 반하고픈 본능이 있다. 법과 도덕, 윤리가 필요한 건 실현될 수 있는 부적절한 본능을 억제하기 위해서가 아닌가. 말하자면 자연에 반하는 인위적 질서다. 그 질서가 힘을 발하는 건강한 이들이라도 그 내면엔 어두운 본능이 있음을 잊어선 안 된다.
연쇄살인이란 극단적 범죄행각은 그 본능을 자극한다. 누구에게나 있을 억눌리고 억압된 본능에 호응하여 해방구가 되어준다. 시청자는 제 욕구를 극중 덱스터에게 투사한다. 사이코패스였던 덱스터가 조금씩 관객과 비슷한 보통의 인간으로 변화하는 건 그래서 자연스럽다. 시청자가 곧 덱스터가 되기 쉽도록 이끌어가는 것이다. 투사와 동화가 함께 일어나며 범죄는 범죄가 아닌 해방이자 사명이 된다. 덱스터의 문제는 더는 덱스터의 문제일 수 없다. 데브라의 문제로 건너와서는 또 한 번 제 그림자를 대면하도록 한다. 시리즈 전체가 빛과 어두움, 자아와 그림자, 질서와 욕망의 대결이다.
<덱스터> 시즌8은 명작으로 꼽히는 드라마 시리즈의 예고된 장례식이다. 어떤 이는 초심을 잃었다고 말한다. 사이코패스였던 이가 변화해 보통의 인간처럼 보이게 되고, 베일에 싸였던 완전범죄자가 안 잡히는 게 이상한 좌충우돌의 인물이 되어가니 마땅한 이야기이기도 하다. 심지어는 이야기의 결말부가 덱스터가 아닌 데브라에게 초점이 옮겨가기까지 한다. 그러나 이 모든 이야기를 앞의 대응하는 것들의 대결로써 이해한다면 그래도 꽤나 완결성 있는 마무리일 수 있겠다. 드라마가 잘 되는 시리즈를 더 이어가기 위하여 덱스터에게 마땅한 최후를 허락하지 않았다 해도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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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영화평론가.서평가.기자.3급항해사 / '자주 부끄럽고 가끔 행복했습니다' 저자 / 진지한 글 써봐야 알아보는 이 없으니 영화와 책 얘기나 실컷 해보련다. / 인스타 @blly_kim / GV, 강의, 기고청탁은 goldstarsky@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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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인하지 않는 사람들이 살인자에게 끌리는 이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