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기도 저기도 '프랑켄슈타인', 진짜 봐야할 것은?

[김성호의 씨네만세 1290] <프랑켄슈타인>

프랑켄슈타인이 나오는 영화 <브라이드!>를 소개했더니, 지난해 나온 기예르모 델 토로의 <프랑켄슈타인> 이야기를 해오는 이가 많다. 지난해 이맘 때 많은 평자들이 저평가한 로버트 저메키스의 <히어>를 옹호했을 때 그러했듯, 수많은 혹평과 마주한 <브라이드!>의 가치를 말하는 게 좀처럼 와 닿지 않은 때문일 수도 있겠다. 철 지난 페미니즘의 식상한 반복이 아니라, 전위적이고 패기 있는 도발적 작품이라고 나는 이 영화 <브라이드!>를 옹호하고 있는 것이다. 나는 지난해 <히어>가 그러했듯이 이 영화의 가치 또한 제대로 바라보는 눈 밝은 이들이 곧 나오리라고 믿어 의심치 않는다.

오늘 쓰는 글은 조금은 다른 이야기다. 지난해 나온 델 토로의 <프랑켄슈타인>, 개인적으로는 딱히 흥미 없는 이 영화에 대하여 그래도 논해볼 의미 깊은 지점을 짚어보기 위해서다. 평론이 무엇인가. 문을 열어주는 것이다. 단칸방인 줄 알았던 곳에 실은 다른 방이 딸려 있음을 알게 하는 것, 그 방이 때로는 내가 들었던 방보다 훨씬 더 크고 멋진 공간일 수 있음을 알게 하는 것 아닌가. 따로 짚는 이 없는 <프랑켄슈타인> 속 작지만 의미 깊은 이야기를 전하여 누군가에겐 유효한 감상을 이끌어내고자 한다. 마침 영화가 국내 몇 극장에서 장기 상영 중에 있고, 또 OTT 서비스를 통해서도 볼 수 있는 만큼 늦지 않은 일이라 여긴다. 혹시 아는가. 이 글이 나름대로 닿는 부분이 있는 <브라이드!>에 대한 관심으로 이어질지 말이다.

주지하다시피 <프랑켄슈타인>은 메리 셸리의 동명소설, 그러니까 SF문학의 효시라 불리는 작품을 크게 다르지 않게 따라간다. 앞서 케네스 브래너가 1995년 발표한 <프랑켄슈타인>이 그러했듯이 말이다. 두 작품 모두 과학자 프랑켄슈타인 박사와 그가 만들어낸 괴물을 대비한다. 그러나 은근하면서도 분명한 차이가 있으니, 브래너의 영화는 인간인 과학자보다 더욱 인간적인 모습을 띄어가는 괴물에게 집중한 반면, 델 토로는 괴물과 괴짜 과학자 둘의 독자적인 캐릭터가 도드라진다는 점이겠다.

프랑켄슈타인 스틸컷
프랑켄슈타인스틸컷넷플릭스

전인미답의 땅을 밟으려는 이들

자, 이제부터 진짜 중요한 이야기를 할 때다. 메리 셸리의 소설은 북극을 탐험하는 탐험가인 로버트 월턴 선장이 제 누이에게 보낸 편지로 시작한다. 두 편의 영화 가운데서도 월턴은 중요하게 등장한다. 특히 델 토로의 영화에서 얼음에 끼여 오도 가도 못하는 난처한 국면에 처했던 월턴의 배가 괴물의 개심으로 위기에서 빠져나오는 상황이 영화의 끝에 인상적으로 그려진다.

물론 월턴은 메리 셸리가 창조한 가상의 인물이다. 그러나 완전히 가상의 인물은 아니니, 당대 활발하던 극지 항해 탐험가들로부터 모티브를 얻은 것이다. 이제는 거의 사라지다시피 했으나 탐험가는 지난 시대 가장 용감한 이들이 택하던 존경 받던 업이었다. 지구는 여전히 미지의 땅으로 가득했다. 밝혀진 곳보다 밝혀지지 않은 곳이 훨씬 더 많았던 때문이다. 대항해시대부터 지도가 꾸준히 밝혀져 왔으나 밀림이며 고지, 사막과 극지 등의 오지는 여전히 미지의 영역으로 가려져 있었다. 특히 항해를 통한 탐험의 영역에서 가장 큰 목표는 북과 남, 양 극지였다. 수많은 이들이 도전했고 실패하던 시기, 아직 양 극지가 전인미답의 땅으로 남아 있던 1815년에 쓰여져 1818년 초판이 발행됐다.

수많은 도전 끝에 남극이란 대륙이 발견된 건 1년 뒤인 1819년이다. 훗날 남극점에 도달하는 저 유명한 로알 아문센은 1905년 대서양에서 북극해를 거쳐 태평양에 도달하는 북서항로를 개척한다. 그에 앞서 1893년엔 프리쵸프 난센이 북극점에 가까이 다가선다. 얼음에 갇힌 배가 유빙과 함께 떠돌며 북으로, 북으로 향하길 기다렸다. 그러나 유빙마저 얼어붙으며 그 도전은 실패한다. 북위 86도 14분은 그 당시의 북쪽 한계점이었다. 북극점은 1909년에 이르러서야 미국의 로버트 피어리에 의해 인간의 도달을 허락한다. 남극점은 그로부터 2년 뒤 로알 아문센에 의해 정복된다.

그러나 위대한 탐험가들의 이름 사이로 도대체 얼마나 많은 이들의 희생이 있었던가를 우리는 좀처럼 돌아보지 않는다. 멈추지 않고 전진만을 외쳤던 수많은 탐험가들이, 배를 잃으면 더 작은 배에 옮겨 타서, 썰매와 뗏목에 의지하여 북과 남, 양 극지를 향한 용자들이 수없이 얼음에 갇혀 목숨을 잃었다. 모두가 그를 의미 있는 일이라 했다. 왜 아니었을까. 탐험은 미지를 지로, 어리석음을 지혜로, 과거를 미래로 바꾸는 일이었다. 그를 통해 인류는 더 나은 미래를 열어갈 것이었다. 발전은 진보는 문명을 더 낫게 할 것이었다. 죽음은 그에 따른 희생일 뿐, 퇴보가 아니었다.

프랑켄슈타인 스틸컷
프랑켄슈타인스틸컷넷플릭스

박사와 괴물의 서사보다도 중요한 것

자, 다시 작품으로 돌아오자. 기예르모 델 토로의 <프랑켄슈타인>은 괴물의 서사가 모두 끝난 뒤, 괴물이 소설 속 탐험가 로버트 월턴의 배를 끄집어 내주는 것으로 끝을 맺는다. 오도 가도 못하게 되었던 배가 다시 탐험을 지속할 수 있게 된 순간, 그 배는 어디로 향하는가. 그것이야말로 진짜 논할 만한 이야기가 된다. 프랑켄슈타인 박사의 창조물은 그저 한 괴물로써 결말을 맞이하고 또 다른 창작물인 <브라이드!>에 이르러 그 다음 이야기를 지속할 뿐이지만, 배는 인류와 문명, 과학의 최전선에서 영화를 보는 극 바깥의 우리와 이어지는 때문이다.

앞서 언급했던 프리쵸프 난센은 북극을 향한 탐험을 떠난 지 3년 만에 배를 태운 유빙이 얼어붙어 오도 가도 못하는 신세가 됐다. 1896년이었다. 꼭 메리 셸리의 소설 속 이야기와 닮은 신세가 된 그가 <프랑켄슈타인>을 떠올렸을까. 그러나 그를 구한 건 괴물이 아니었다. 그는 선원들과 배에서 내려 개썰매를 타고 24일 간 극을 향해 전진한다. 그러나 겨울이 끝나고 얼음이 녹아 더 전진이 불가능해지자 북극곰을 잡아먹고 버텨 구조되기에 이른다. 그리고 이는 뱃사람의 기질을 지닌 당대 탐험가들의 통상적이고 모범적인 선택이었다.

그러나 예외가 있다. 어니스트 섀클턴, 떠난 모든 탐험에 실패했으나 앞선 영웅들보다 더 추앙받는 이 위대한 탐험가의 발자국일 테다. 특히 그의 두 번째 탐험에서 그가 생존해 귀환한 사건을 후대 학자들은 기적에 가까운 일이었다 말한다. 1915년 섀클턴은 유빙에 갇힌 인듀어런스 호를 버렸다. 8개월을 갇힌 배 안에 있던 섀클턴이다. 배를 버리란 건 두 가지를 의미했다. 앞선 님로드 호 원정 실패로 남극점 도달의 영광을 아문센에게 넘겨준 그였다. 이제 남은 건 남극 횡단, 그러나 그 대업을 그는 눈앞에서 포기한 것이다. 그 대가로 얻는 건 명확했다. 선원들의 목숨이었다. 배를 버리고 또 한 번 퇴각하기로 한 것. 6년 전 남위 88도23분, 극점 코앞에서 포기하고 돌아와 "죽은 사자보다 산 당나귀가 낫다"는 말을 남겼던 섀클턴이 이번에도 퇴각을 선택한 것이다.

프랑켄슈타인 스틸컷
프랑켄슈타인스틸컷넷플릭스

산 당나귀가 낫다는 믿음

그로부터 이어진 더욱 당혹스러운 고난의 여정은 역사상 어느 탐험가의 이야기보다 널리 팔려나갔으므로 아는 이들이 많을 테다. 그는 27명의 대원들을 단 한 명도 잃지 않았다. 줄어드는 자원과 떨어지는 사기, 예상치 못했던 1300킬로미터가 넘는 항해를 단 다섯 명의 선원과 함께 작은 배 하나로 감당하며 구조를 요청한 끝에 모든 대원을 살려서 탐험을 마감한다. 또 한 번의 후퇴였고, 극지 정복도 횡단도 해내지 못한 섀클턴의 두 번째 실패는 그러나 그 어떤 탐험보다도 더 큰 영예로 이어졌다.

산 당나귀가 죽은 사자보다 낫다. 때로는 문명의 진보보다 곁에 있는 한 인간이 귀하다. 당대의 경쟁자들, 그러니까 로버트 스콧과 로알 아문센, 아문센을 지원한 난센이라면 충분히 다른 결정을 내렸을 수 있는 상황에서 섀클턴의 결단이 더욱 빛이 난 이유다. 프랑켄슈타인 박사는 무덤을 파 시체들을 꺼낸다. 그 시체들에게 생명을 불어넣는다. 윤리와 도덕을 넘어 과학의 진보를, 인간이 밟은 적 없는 지식을 갈구한 결과다. 그러나 그렇게 태어난 생명을 그는 괴물이라 하였다. 받아들일 수 없었다. 그리하여 무너져 내린다.

유빙에 올라타 표류하는 것이라 여겼던 일이 인간을 목적지로 더 가까이 옮겨다 주었다. 표류하는 가운데서도 주도권을 잃지만 않는다면 배가 갇혀도 좋다는 난센의 방식이 인간에게 이전에 닿지 못한 영광을 가져다주었다. 섀클턴은 한 걸음 더 나아갔다. 오로지 전진만이 인간을 더 낫게 만들지는 않는다는 것. 때로는 멈추고 물러서는 것이 더 인간다운 길이란 걸 그는 보여주었다. 사람들은 전진하다 죽은 스콧보다도, 누구도 닿지 못한 땅에 앞서 닿은 아문센보다도, 나아가길 멈춰선 섀클턴을 훌륭하다 이야기한다. 과학자를 표류하게 만드는 통제를 벗어난 과학과 기술에 대하여 메리 셸리가, 기예르모 델 토로가 말하는 것이 이와 과연 다른 것일까.

프랑켄슈타인 포스터
프랑켄슈타인포스터넷플릭스

그 배는 어디로 향하는가

섀클턴의 후퇴보다 훨씬 앞서 빅터 프랑켄슈타인 박사의 이야기를 들은 로버트 월턴이 있었다. 당대 과학의 최전선에서 빚어진 창조물을 보고서 공포와 경이를 느낀 월턴이 저의 항해를, 탐험을 멈춘다. 난센과 아문센, 스콧의 도전에 앞서서 극점을 향했던 탐험가는 섀클턴보다도 거의 한 세기 앞서 제 도전을 멈추었다. 델 토로는 제 영화의 끝에서 괴물이 꺼내준 배를 극점이 아니라 집으로 향하는 월턴의 모습을 인상 깊게 잡아낸다. 나아가는 것만이 진짜 나아가는 것이 아니다. 때로는 물러서는 것도 나아감일 수 있다. 나는 그렇게 여긴다.

<프랑켄슈타인>이 이 시대에 진정으로 유효한 작품인 이유에 대하여 나는 이렇게 적겠다. 극점을 향하는 항해, 유빙 위에 올라타고도 제가 표류하는지도 알지 못하는 모험가들이 가득한 세상이다. 블랙박스 형태의 AI 기술을 비롯하여 막대한 데이터와 알고리즘으로 인간과 사회를 통제해 나가는 일련의 기업들을 바라본다.

묻는다. 우리는 우리가 어디로 향하는지 진정 이해하고 있는가. 극점을 향해 가며 낙오되는 것들이 무언지를 돌아보고는 있을까. 이 시대 진정으로 필요한 정신은 더 빨리, 더 먼저 나아가는 일이어선 안 된다. 월턴과 섀클턴, 그들의 결정 아래 깔린 것이, 메리 셸리와 기예르모 델 토로의 작품이 가리키는 것도 바로 이것이다.
덧붙이는 글 김성호 평론가의 브런치(https://brunch.co.kr/@goldstarsky)에도 함께 실립니다. '김성호의 씨네만세'를 검색하면 더 많은 글을 만날 수 있습니다. goldstarsky@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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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영화평론가.서평가.기자.3급항해사 / '자주 부끄럽고 가끔 행복했습니다' 저자 / 진지한 글 써봐야 알아보는 이 없으니 영화와 책 얘기나 실컷 해보련다. / 인스타 @blly_kim / GV, 강의, 기고청탁은 goldstarsky@naver.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