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겨스케이팅에는 김연아, 배구에는 김연경, 배드민턴에는 안세영. 2000년대 이후로 스포츠의 얼굴은 자연스레 여성의 차지가 되어가고 있다. 그렇다면 물리적인 힘 대신 정신적 기량을 겨루는 마인드 스포츠(mind sports)의 영역에서는 어떨까. 아직도 바둑을 이야기할 때는 조훈현 9단이나 알파고와 싸운 이세돌 9단이 자주 거론된다. 체스 역시 마찬가지로, 넷플릭스 드라마 <퀸스 갬빗>에서 안야 테일러조이가 연기한 베스 하먼이 천재 여성 체스 선수의 이미지를 각인시키기는 했지만, 정작 현실의 여성 체스 선수를 열거할 수 있는 이들은 많지 않을 것이다.
선댄스영화제에서 선 상영하고 지난 2월 공개된 넷플릭스 다큐멘터리 <체스의 여왕>은 그중에서도 가장 뛰어나다고 평가받던 유디트 폴가르(Judit Polgar)의 일생을 다루었다. 유디트 여정을 따라가면서, 어떻게 해야 아직도 마인드 스포츠계에 팽배한 여성에 대한 편견을 타파할 수 있을지 고민해 보자.
교육으로 '만들어진' 천재
▲다큐멘터리 <체스의 여왕> 스틸컷
넷플릭스
분야를 막론하고, 대부분 '위대한 선수'의 탄생에는 항상 천부적인 재능 이야기가 동반된다. 제대로 교육받지 않았는데도 경쟁자들을 압도하는 이가 있는가 하면, 재능을 늦은 나이까지 썩히다 뒤늦게 꽃피우는 이들의 이야기도 심금을 울린다.
하지만 <체스의 여왕>이 따라가는 유디트 폴가르는 '완성형 천재'와는 거리가 멀다. 1976년 헝가리에서 태어난 그녀는 교육심리학자 아버지 밑에서 자랐는데, "천재성은 타고나는 것이 아니라 만들어지는 것이다"라는 아버지의 교육철학에 의해 어릴 적부터 자매들과 함께 체스를 배우게 된다.
이 야심찬 선언을 뒷받침이라도 하듯, 유디트는 15세라는 어린 나이에 체스 그랜드마스터(grandmaster: 세계체스연맹이 인정하는 최고 권위로, 전 세계에 1,000명 정도만이 존재한다) 자리를 꿰찬다. 체스계의 별과도 같은 세계 챔피언 바비 피셔(Bobby Fischer)의 최연소 그랜드마스터 기록을 갈아치운 순간이었다.
다큐멘터리는 유디트가 세 폴가르 자매 중에서도 '초기 재능'은 가장 적었다는 사실을 상기한다. 느릴지언정 꾸준히 노력해 온 유디트가 그 누구도 깨지 못한 기록을 세우는 데 성공한 것이다. <퀸스 갬빗>을 연상시키는 천재의 서사는 아니지만, 묵묵히 자신의 길을 걸으며 전설적인 위치에 다다른 폴가르의 이야기는 확실한 감동을 준다.
이렇게 '만들어진' 천재 유디트는 유명한 남초 스포츠이던 체스계에 새바람을 불러일으킨다. 수비적이고 치밀한 계산으로 이루어진 '형세적' 대국이 유행하던 20세기 말에 저돌적으로 공격해 승리를 따내는 '전투 체스'를 부활시킨 것이다. 당대 세계 체스 챔피언이던 가리 카스파로프는 유디트를 '서커스 인형'이라 부르며 평가절하하기도 했지만, 그녀와의 대국에서 패배하며 자신의 실수를 인정하기도 했다. 이후 유디트는 여성으로서는 최초로 세계 체스 10위권 안에 들어가기도 하며, 존재 자체만으로 편견을 타파해 갔다.
수치가 증명하는 실력차? 아직 표본 부족해
▲다큐멘터리 <체스의 여왕> 스틸컷넷플릭스
그러나 그런 유디트가 정작 세계 체스 챔피언의 차이는 꿰차지 못하자, 여성의 기력(棋力)에 관한 이야기가 자연스레 오갔다. 2020년대까지도 체스에서 여성 선수가 종합 10위권 안에 오르는 경우는 극히 드물며, 챔피언은커녕 챔피언 도전자(2년마다 1인을 선발한다)에 해당한 이도 전무하다. 그렇다면 정말 남성 기사들이 이야기했던 대로 여성은 '선천적으로' 이러한 종목에 불리한 것일까?
<체스의 여왕>은 이 문제에 간접적으로 '아니'라고 대답한다. 체스에는 세계체스연맹에서 인증하는 타이틀 'FIDE 마스터', '인터내셔널 마스터', '그랜드마스터' 외에도 '여성 FIDE 마스터,' '여성 인터내셔널 마스터', 그리고 '여성 그랜드마스터'라는 직위가 존재하는데, 후자는 명목상 혼성인 타이틀 규정에서 분리된 별개의 직책으로 여성 전용 리그를 통해서만 취득할 수 있다.
이러한 여성 전용 타이틀은 역설적으로 여성 기사의 능력을 평가절하하기 위한 수단으로 사용되기도 했다. 여성이 진정 남성만큼 강하다면 왜 굳이 혼성 경기에 참여하지 않느냐는 것이다. 이러한 성별 분리 정책은 유디트가 성장하던 시기에도 존재했으나, 유디트 본인은 커리어 대부분을 여성 전용 경기가 아닌 혼성 경기에서 쌓았다. 그러나, 정작 유디트 본인은 여성 경기의 전면적 폐지에 앞장서는 편이 아니다.
그 이유는 아직도 압도적인 성차에 있다. 세계체스연맹이 공인한 선수 중 여성은 2023년 기준으로 아직도 13%에 불과하다. 2021년 드라마 <퀸스 갬빗>이 흥행한 후 2배로 뛴 여성 참여 수치가 이 정도인 것이다. 유디트는 이를 의식하듯 여성 기사와 남성 기사의 진정한 실력차를 계산하기에는 아직도 절대적인 표본이 부족하다고 암시한다. 적어도 선수층 안에서 1:1의 성비가 완성되기 전까지는, 남성 선수들의 차별과 멸시로부터 여성 선수들을 보호하기 위한 일시적 요람으로서 여성 전용 경기 및 여성 전용 타이틀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시원섭섭하면서도 논리적인 해명이 아닐 수 없다.
이처럼, <체스의 여왕>은 세계에서 가장 뛰어난 여성 체스 선수의 이야기를 다루지만, 인위적인 작품만큼 '속 시원한' 성공담을 풀어 주지는 않는다. 하지만 다양한 여성 선수 중에서도 '만들어진 천재' 유디트를 집중적으로 추적하며, 통념과 달리 마인드 스포츠의 영역에서도 치열한 노력은 빛을 발한다는 희망적 메시지를 내포한다. 드라마 <퀸스 갬빗>이 전 세계에 다시금 체스 열풍을 일으켰다면, 다큐멘터리 <체스의 여왕>은 혼자서 '난 안 될 거야'라고 생각하고 있을지도 모르는 익명의 여성 선수들에게 밖으로 나오라고 권유하고 있다. 이 다큐멘터리가 현실판 <퀸스 갬빗>의 시작이 될 수 있기를 조심스레 바라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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펄프 픽션 신봉자. 이야기가 가지는 힘을 믿고 글을 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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체스계 새바람 일으킨 소녀, 아버지의 남다른 교육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