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보다 연극의 문법이 익숙해진 지 오래다. 영화와 연극 모두 드라마를 기반으로 하지만, 표현 방식이 엄연히 다르다. 연극은 무대라는 제한된 물리적 공간에서 드라마를 구현해야 하기에 상징을 통해 의미를 함축하거나 반복을 통해 서사를 강화하는 등의 기법을 더 많이 쓴다. 독백이나 방백처럼 다른 인물들에게는 들리지 않고 오직 관객만 들을 수 있는 것으로 약속하는 대사 전달 기법도 쓴다.
자연스레 영화를 볼 때도 연극을 볼 때의 버릇이 튀어나온다. 대사나 장면이 반복되면 여기에 과할 정도로 의미를 부여하고, 그 장면에 사용되는 소재를 영화가 끝나고 곱씹는다. 때론 이런 버릇 때문에 영화 자체의 드라마를 놓칠 때도 있지만, '연뮤덕(연극 뮤지컬 덕후)'처럼 영화를 보는 게 재미있다는 생각도 든다. 오랜만에 영화관을 찾아 <왕과 사는 남자>를 볼 때도 필자는 어쩔 수 없는 연뮤덕이었다.
연뮤덕의 눈으로 본 <왕과 사는 남자>는 반복과 포개짐의 미학이 빛나는 영화였다. 영화의 주요 장면들은 두 차례에 걸쳐 반복되었고, 여기서 서사가 포개지며 영화의 완결성을 높였다. 과감히 말하건대 <왕과 사는 남자>의 흥행에는 바로 이 반복과 포개짐의 미학이 큰 몫을 했을 것이다.
▲영화 <왕과 사는 남자> 스틸컷
쇼박스
[첫 번째 포개짐] 이홍위의 도강을 돕는 엄흥도
<왕과 사는 남자>는 강을 건너는 이야기다. 강을 건너는 이는 한때 왕이었으나 세조와 한명회(유지태 분)에 의해 유배를 가게 된 단종 이홍위(박지훈 분)다. 그리고 이홍위의 도강을 돕는 이가 엄흥도(유해진 분)다. 이 영화에서 이홍위는 총 두 차례 강을 건넌다.
영화에서 처음 이홍위가 강을 건너는 순간은 유배지인 영월 청령포로 향할 때다. 청령포는 강에 둘러싸인 형국이기에 뗏목을 통해 건너가야 했다. 이홍위를 태운 뗏목을 엄흥도가 조종하고, 마을 사람들이 끌어당긴다. 강바닥 바위는 이홍위의 첫 도강을 방해한다. 바위에 걸려 뗏목이 부서지는 바람에 이홍위와 엄흥도는 강물에 몸이 흠뻑 젖은 채 유배지에 도착할 수밖에 없었다.
이홍위가 다시 강을 건너는 건 영화의 말미에 이르러서다. 첫 번째 강이 육지와 청령포를 가르는 물리적인 강이었다면, 두 번째 강은 삶과 죽음의 경계에 놓인 상징적인 강이다. 그 경계가 강이라는 것은 이홍위와 엄흥도의 대사를 통해 드러난다. 이때도 엄흥도가 이홍위의 도강을 책임져야 한다.
첫 도강 당시 바위 탓에 뗏목이 부서지는 것이 아무 의미 없는 설정이 아닐 테다. 그로 인해 엄흥도는 이홍위의 도강을 무탈히 수행하지 못했고, 이 기억이 엄흥도로 하여금 이홍위의 두 번째 도강을 무탈히 완수하게 한다.
두 번째 도강은 첫 번째 도강에 비해 훨씬 고통스럽고, 훨씬 비극적이며, 그 시간이 훨씬 더디게 흘러간다. 그렇지만 첫 도강을 무사히 돕지 못한 엄흥도의 아픈 경험이 두 번째 도강을 아프고 괴롭더라도 말끔히 완수하도록 한다.
▲영화 <왕과 사는 남자> 스틸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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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번째 포개짐] 이홍위의 외침 "네 이놈!"
도강이 두 차례에 걸쳐 반복된다면, 이홍위의 "네 이놈!"이라는 외침도 두 번에 걸쳐 반복된다. "네 이놈!"은 여러 매체와 SNS에서도 패러디될 정도로 <왕과 사는 남자>의 명대사이자, 이홍위 역을 맡은 배우 박지훈의 연기력과 카리스마를 확인할 수 있는 대목이다.
연극과 뮤지컬에서 반복은 대단히 중요한 장치다. 뮤지컬에는 음악을 반복하는 '리프라이즈'라는 표현 형식이 있을 정도다. 같은 음악을 다른 시기에 다시 연주해 서사를 강화하거나 상황을 대비하는 기법이다. 뮤지컬에 길들여진 필자의 관람 버릇은 <왕과 사는 남자>에서 이홍위가 두 차례 반복하는 "네 이놈!"이라는 대사의 의미를 집요하게 생각하도록 했다.
이홍위의 첫 번째 외침은 호랑이와 마주할 때다. 유배지의 마을 사람들과 함께 뒷산에서 호랑이를 마주하게 되었을 때, 마을 사람들은 죽음과 희생을 각오한다. 이전까지 무력했던 이홍위는 그 순간 활을 집어들고 호랑이를 향해 외친다. "네 이놈!" 이홍위의 눈에는 생기가 돌고, 목소리에는 힘이 실려있으며, 호랑이와 맞서는 그의 기개는 호랑이를 압도한다.
무력했기에 소중한 사람들을 잃었던 이홍위의 쓰라린 기억이 호랑이로부터 마을 사람들을 지켜냈다. "네 이놈!"이라는 이홍위의 명대사는 그가 사랑하는 사람을 지키고자 할 때 등장하는 대사다. 두 번째 외침은 한명회가 엄흥도의 아들 태산(김민 분)을 해하려 할 때, 한명회를 향해 발화된다. 호랑이를 상대할 때보다 한층 더 두꺼워진 이홍위의 외침은 분명 왕의 포효였다.
한편 <왕과 사는 남자>는 13일 기준 1200만 관객을 돌파하며 흥행을 이어가고 있다. 12일에는 장항준 감독이 서울 중구 일대에서 천만 공약의 일환으로 팬들에게 직접 커피를 나눠주는 이벤트를 진행하기도 했다. <왕과 사는 남자>는 미국에서도 순차 개봉하며 북미권 50개 이상 도시에서 글로벌 관객과도 만나고 있다.
▲영화 <왕과 사는 남자> 스틸컷쇼박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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