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레이의 겨울방학> 스틸컷
영화사 삼순
03.
일본에 사는 중학생인 레이와 한국에서 온 고등학생 규리. 영화 속에서 두 사람은 같은 공간에서 같은 시간을 보내지만, 정확히는 서로 다른 문화와 삶의 배경을 가지고 있다. 비슷한 나이대의 두 소녀가 만나 우정을 만들어가는 의미 이상의 것이 내포되어 있다고 할 수 있는 이유다. 이 차이는 영화가 가진 큰 동력 가운데 하나인 '언어적 충돌'과도 연결된다. 실제로 영화를 보면, 외형적으로 드러나는 톤 앤 매너보다 훨씬 밝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리고 대부분의 환기는 언어적으로는 소통되지 못하나, 이해 가능한 대화를 통해 이루어진다.
이 지점은 이번 영화를 감독의 전작들과 큰 맥락에서 동일성을 갖고 있으나, (긍정적인 의미로) 다른 모습을 하도록 만드는 부분이기도 하다. 언어와 문화의 차이는 그 자체로 하나의 장벽이 되기 쉽다. 만약, 이 작품에서도 이전까지 보여왔던 박석영 감독의 태도가 견지되거나, 인물의 삶을 강하게 응시하거나 관계를 형성하기 위해 사건을 개입시키는 식의 구조가 형성되었다면 분명 이 이야기는 갈등의 소재로 나아갈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보다 부드러운 방식으로 인간관계를 바라보는 시선. 이야기의 밀도보다는 느슨한 시간의 흐름에 더 목적을 두는 태도가 이 작품에서는 오히려 더 많은 이야기를 만들어내고 두 인물의 관계를 형성할 수 있게 만드는 것이다. 극적인 성장의 서사가 아닌 어느 시기에 공유했던 장소와 공기의 온도에 대한 기억의 형상이다.
박석영 감독은 이번 작품에 대해 '애초에 두 번 이상 찍을만한 여유도 없었고 (배우들의 준비가 너무 완벽해서) 그럴 이유도 없었기에, 이렇게 사람을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영화를 찍을 수 있구나 하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단지, 스스로가 잘 알지 못하는 세대의 관계였기에 언어는 나의 것이 아니었다'라고 밝혔다. 그런 과정과 태도가 영화의 틀을 형성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04.
"What do you want to be a future ?"
결국 영화의 핵심은 '한 때'라는 시간의 구간적 위치에 대한 감각이다. 방학이라는 단어 자체부터가 제약을 갖고 있다. 언젠가 반드시 끝나도록 약속된 시간이며, 이는 곧 다시 일상으로 흩어지게 될 운명을 암시한다. 두 인물의 시간적 배경이 방학이어서가 아니라, 레이와 규리가 함께 보내는 시간 자체가 하나의 '방학'과 비슷한 구조 속에 존재하는 것이다. 따라서, 이 영화에서 중요한 것은 관계가 어떻게 맺어질 수 있었는가 하는 결과가 아니라, 현재 시점에서 이미 모두 지나가 버린 시간 그 자체다. 이 만남은 두 사람 이후의 삶 속에서 오래 살아남을 수도, 그렇지 못할 수도 있다. 영화 또한 그 이후에 대해서는 조금도 설명할 생각이 없다.
그래서인지는 모르겠지만, 영화의 후반부에서 가마쿠라로 떠나는 두 사람을 그리는 지점의 표현 방식이 오래 기억에 남는다.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그 과정에서 두 인물이 배제되고 있어서다. 야근이 끝나고 집으로 돌아온 아빠와 혼자인 동생을 위해 집을 찾은 오빠의 대화로 시작되는 이 시퀀스는 레이와 규리의 모습이 아닌, 전철에서 내다본 풍경으로 대신 된다. 쉽게는 내내 두 사람의 모습과 대화로 채워지던 이동 장면의 변주이자, 겨울이라는 이미지의 강화, 여행을 떠나는 목적을 다시 상기시키기 위함처럼 여겨진다. 영화 전체의 행위를 하나의 기억으로 치환하고 작품의 목적 자체를 한 시기의 감정과 온도를 붙잡기 위한 것으로 하기 위한 온점이다.
▲영화 <레이의 겨울방학> 스틸컷영화사 삼순
05.
영화 <레이의 겨울방학>은 분명 박석영 감독이 자신의 작품 세계, 혹은 작업적 태도를 전환하는 지점에 놓인 작품일 것이다. 그것은 그의 영화가 완전히 다른 방향으로 나아간다는 의미라기보다, 대상과 세계를 바라보는 관점이 새로운 형태로 확장되는 순간에 가깝다. 그 중심에는 아직은 정확히 규정하기 어렵지만, 이전의 작품들과 비교하면 분명 움트고 있는 어떤 '자유로움'이 있다. 그럼에도 감독이 계속해서 탐구하고 있는 것은 결국 '시간의 감각'이다. 이 영화는 그 시간을 가장 투명하고 자연스러운 방식으로 포착해 낸 작품으로 남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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