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 글은 영화의 스포일러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장편영화 <로스트 도터>로 베니스영화제 각본상을 받은 메기 질랜할 감독의 신작 <브라이드!>가 4일 개봉했다. 배우 크리스천 베일이 우리에게 익숙한 프랑켄슈타인의 괴물 역을, 그리고 <햄넷>으로 상승가도를 달리기 시작한 제시 버클리가 신부 역을 맡았다. 차분하고 지적인 톤으로 여성의 상실에 관해 이야기하던 감독의 전작과 달리, < 브라이드! >는 시종일관 혼란스러우며 광기 어린 영화이다.
그러나 결코 '실험적인' 영화라고는 할 수 없는데, < 브라이드! >의 요란스러운 화법은 본작의 원전이라 할 수 있는 1935년 영화 <프랑켄슈타인의 신부>에 대한 치밀한 반론이기 때문이다. 이 '정신없는' 영화가 어떻게 여성의 목소리를 되찾는 전복적 작업을 성공적으로 이루어냈는지, 두 작품을 비교하여 알아보자.
▲영화 <프랑켄슈타인의 신부> 스틸컷
유니버설 스튜디오
1935년의 신부
고전영화 <프랑켄슈타인의 신부>는 유니버설 픽처스에서 제작한 <프랑켄슈타인> 영화 3부작의 2번째 작품이다. 1편을 제작한 제임스 웨일 감독이 다시 메가폰을 잡아, 원전의 세상을 확장해 나갔다.
특기할 점은 <프랑켄슈타인의 신부>라는 제목과 포스터에 남긴 강렬한 인상에도, 정작 괴물의 '신부'는 최후반부에 3분 남짓한 시간 동안만 등장한다는 것이다. 작중 프랑켄슈타인의 괴물은 자신을 이해해 줄 유일한 상대를 찾기 위해 '아버지' 프랑켄슈타인 박사를 겁박해 그를 위한 신부를 소생시키나, 정작 그 신부마저 그를 두려워하고 거부하자 연구실을 폭발시켜 자살한다.
이는 오픈리(openly: 성소수자임을 숨기지 않는다는 의미) 게이이던 제임스 웨일 감독의 영향이다. 단순히 신부가 여성이라 그 분량이 축소되었다는 뜻이 아니라, 오해받고 핍박받는 '외로운 소수자'라는 정체성을 프랑켄슈타인의 괴물에 고스란히 투영하였기에 '신부'는 괴물을 최종적으로 거부하며 비극적인 효과를 극대화하는 도구로 쓰일 수밖에 없었다는 의미다.
<프랑켄슈타인의 신부>에서는 원전을 창작한 메리 셸리가 지녔던 '여성으로서의 정체성'과 제임스 웨일 감독의 '게이 남성으로서의 정체성'이 충돌한다. 자기 피조물을 여전히 인정하지 않는 프랑켄슈타인 박사는 원작 소설에서처럼 통상적인 모성애를 느끼지 못하는 여성의 이야기를 담아낸 한편, 괴물은 그 존재 자체가 억압의 이유인 소수자의 비애를 담아낸다. 이 두 주제의식은 자연스럽게 합일을 이루는 듯하나, 끝내 영화의 메가폰을 쥔 감독의 이야기가 승리한다. 작중 메리 셸리 역을 맡은 엘사 란체스터가 괴물의 '신부'역도 맡은 것이 그 상징이다. 수려한 언어로 원전 <프랑켄슈타인>을 창작했던 메리 셸리가 '말하지 못하는' 신부가 되어, 창조주가 피조물로 전락한 것이다.
영화 대부분에서 프랑켄슈타인의 괴물이 사람처럼 말하는 법을 배운 반면, 끝에서야 등장하는 신부는 한마디의 말조차 뱉지 못하고 그저 비명을 지를 뿐이다. 할리우드 최초의 '여성형 괴물'이라는 위업을 달성했으나, 그 한계가 분명히 존재한다.
▲영화 <브라이드!> 스틸컷
워너브라더스
2026년, 가장 시끄러운 여성
< 브라이드! >는 이러한 <프랑켄슈타인의 신부>의 안티테제임을 시작부터 분명히 한다. 신부의 등장을 고대하게 만들던 원작과 달리, 가장 먼저 '신부'의 이야기를 밝혀 버린다. 경찰과 협력하며 마피아 조직에 잠입한 1930년대 미국 여성 '아이다'가 조직원들과의 실랑이 끝에 계단에서 굴러떨어져 버린 것이다. 그런 그녀의 몸에 메리 셸리의(본작에서도 제시 버클리가 1인 2역을 맡았다) 영혼이 빙의하면서 끝없는 정체성 혼란이 시작된다.
'프랭크'라는 이름으로 살아가던 프랑켄슈타인의 괴물은 원작에서처럼 자신을 위한 신부를 가지기 위해 아이다를 소생시키나, 죽음에서 돌아온 아이다는 자신의 이름조차 기억하지 못한다. 그런 그녀에게 프랭크는 '페니'라는 이름을 붙여 주고 과거에서부터 함께했다는 듯 굴며, 그들의 앞길을 방해하는 이들을 전부 죽이며 '보니와 클라이드' 같은 도주 생활을 이어간다.
여정의 끝에서 아이다 – 혹은 되살아난 그녀의 시신 – 은 '브라이드(신부)'라는 이름을 차용한다. 연약하던 아이다도 아니고 프랭크에게 종속된 페니도 아닌, 오로지 자기 자신으로 거듭난 신부. 이 이름을 찾기까지의 여정은, 단적으로 말하자면 요란하고 혼란스럽다. 영화 대부분이 브라이드의 머릿속에 들어선 메리 셸리와 브라이드 본인의 말싸움으로 이루어지며, 브라이드는 어눌한 어조로 단어 몇 개를 늘어놓던 유니버설 시절의 괴물과 달리 유창하고 발작적이기까지 한 시적 언어를 구사한다. 그야말로 '가장 시끄러운 여성'의 탄생이다.
작중 아이다가 생전 조사하던 마피아 '루피노'가 여성의 혀를 뽑아 전시하는 취향을 지닌 인물임에서도 드러나듯, < 브라이드! >는 그동안 잃어버렸던 여성 고유의 언어를 찾기 위한 전투적인 작품이기에 '시끄러울' 수밖에 없다. 극적인 효과를 위해 침묵을 유지하느니, 광기 어린 대사와 독백으로 휘몰아치는 구성을 택한 것이다.
▲영화 <브라이드!> 스틸컷워너브라더스
그 자체로 옳지 않은, 복합적인 '목소리'
그렇다면 그렇게 힘겹게 되찾아 낸 '여성의 언어'는 항상 궁극적으로 옳은 방향을 향할까? 역시 아니다. 원전 소설의 창작자인 메리 셸리가 여권운동의 시조격인 메리 울스턴크래프트의 딸이면서도 이따금 종교적·가부장적 권위에 기대었던 것처럼, < 브라이드! > 속 브라이드의 선택 역시 '정치적으로 옳은' 길로만 향하진 않는다.
브라이드가 가부장적인 남자들을 쏴 죽인 여파로 미국 전역에서 '여성 혁명'이 일어났다는 묘사가 있지만, 정작 브라이드 본인은 그녀를 상징으로 하는 혁명 자체에는 관심이 없어 보인다. 게다가, 그녀를 속이고 기만했던 프랭크를 다시금 품고 사랑하기까지 하는, 언뜻 보면 비합리적인 결정을 내리기도 한다. 이렇게 < 브라이드! >는 페미니즘 리부트 이후로 연이어 등장했던 '고전의 여성주의적 재해석'에서 한 단계 더 나아간다. 여성의 목소리가 항상 옳지는 않으며 그릇될 수도 있다고 시인한 다음, 그런데도 '소음'에 가까운 여성의 목소리가 양적으로 불어나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이다.
이처럼, < 브라이드! >는 완전히 새로운 페미니스트 유토피아를 꿈꾸는 작품이 아니라, 현실의 복합성을 인정하면서 그곳에서부터의 전복을 꾀하는 영화이다. 프랭크를 위해 '만들어진' 존재였던 신부가 정작 안착한 이름이 브라이드인 것처럼, 결국 우리네 삶을 끝까지 괴롭힐 수밖에 없는 가부장제의 망령이 존재한다고 인정한다. 그러나 무기력증에 굴복하는 대신, 잊혔던 여성의 목소리를 최대로 높이는 데 주력한다. 그러니 < 브라이드! >는 살인과 도주를 이어가는 단순한 플롯을 뛰어넘는, 광기가 어린 작품일 수밖에 없다. 단순 <프랑켄슈타인> 시리즈에서뿐만 아니라, 인류사를 통틀어 무시된 여성의 한탄을 단번에 쏟아내는 작업이기 때문이다. 남편과 연인에게 죽은 여성들의 목소리를 환청으로 듣던 브라이드의 대사가 그 의도를 분명히 밝힌다.
"죽은 자들이 할 말이 있다니, 내가 말해주겠어!"
< 브라이드! >는 그 자체로만 보면 혼란스러울 수 있으나, <프랑켄슈타인의 신부>가 지니던 역사적 맥락을 고려하고 관람할 때 비로소 가슴이 뻥 뚫리는 듯한 쾌감을 선사하는 영화로 거듭난다. 예술영화와 상업영화의 경계에서 여성의 '한풀이'가 이루어지는 방법이 궁금하다면, 혹은 그 의도는 좋으나 동화적인 해법으로 귀결되던 여성주의적 재해석 작품에 피로를 느낀다면 <브라이드!>를 관람해 보는 것이 어떨까. 시끄러움 속에서 진솔함과 아름다움을 찾아낼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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펄프 픽션 신봉자. 이야기가 가지는 힘을 믿고 글을 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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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은 여자들이 신부 목소리 빌려 남편과 옛 연인에게 남긴 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