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영은 방송을 통해 성폭력의 심각성을 알린다.
ENA
저마다의 방식으로 피해 이후를 살아낸다고 해도 피해자들이 겪는 심리적 고통의 크기는 쉽게 작아지지 않는다. 이는 성폭력 피해자들을 위해 일하는 라영도 마찬가지다. 라영은 그 일을 겪은 지 20년이 지났지만, 현관에 잠금장치를 여러 개 설치해야 집에서 쉴 수 있고, 전기충격기를 지녀야만 외출할 수 있다. 그 당시를 떠올리는 사건이 발생하면 공황장애를 경험하기도 한다. 라영은 이런 자신의 상태에 대해 이렇게 말하기도 한다.
"난 결국 완전히 괜찮아지진 못했어요. 어떤 상처는 흔적도 없이 사라지지만 어떤 상처는 영원히 흉터로 남잖아요. 내가 겪은 일도 그랬어요." (5회)
이처럼 폭력의 상처는 오랜 시간이 지나도 트라우마 반응을 일으키곤 한다. 라영은 8회 제열이 공격해 오자 자신이 당한 일을 방송에서 공개하기로 마음먹는다. 하지만, 그 말을 꺼내기까지 라영은 식은땀을 흘리고 얼어붙고 말을 더듬는다. 이는 일종의 트라우마 반응이었다. '용기'를 낸 상황에서도 트라우마에서 오는 생리적·심리적 반응들은 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하면 고통 속에서도 살아갈 수 있을까? 라영은 고통 속에서 자신이 어떻게 조금씩 나아갔는지 말한다.
"그냥 하루씩 살아가면 돼요. 어떤 날은 미워하고 어떤 날은 괴로워하면서 그러다 어느 날 문득 돌아보면 내가 그 기억을 안고 얼마나 많이 걸어 왔는지 보여요. 그러면 조금 나아져요. '상처가 완전히 낫진 않더라도 상처 입은 채로도 얼마든지 나아갈 수 있구나' 알게 되거든요." (7회)
마음의 여러 미움과 분노, 그리고 슬픔 등 모든 감정을 타당하게 인정해 주면서 현재를 살아가라는 조언이었다. 이는 심리학적으로도 매우 타당한 방법이기도 하다.
제열 뿐 아니라 드라마 속 가해자들은 모두 '피해자들이 입을 열지 못할 것'이라는 확신을 가지고 당당하게 행동한다. 성폭력 피해자들이 수치심으로 아무 말도 못 할 것이라고 '피해자다움 프레임'을 씌우려 한다. 제열은 커넥트인을 파헤치려는 라영을 위협하며 이렇게 말한다.
"너 정말 신고할 수 있었어? 법정에 설 자신 있었어? 너한테 벌어진 일들 세상 사람들이 다 알게 될까 봐 사람들이 널 영원히 피해자로 보게 될까 봐 무서웠던 거잖아."(8회)
하지만 가해자들이 만든 이 프레임에서 벗어난 피해자들이 하나둘 모여들면서 연대는 시작된다. 8회 라영이 자신의 상처를 공개하자, 이에 용기를 얻은 커넥트인 피해자들은 서로의 손을 잡는다.
물론 이들의 연대만으로 커넥트인을 통쾌하게 깨부수지는 못한다. "끝까지 인정하지 않으면 이 또한 지나간다"(10회)고 버티는 가해자 집단은 돈과 권력으로 끊임없이 이들을 회유한다. 이에 어떤 피해자들은 중간에 싸우기를 포기하려고도 하지만, L&J 변호사들은 '포기'하는 마음마저 존중한다. 이후 피해자들은 결국 법정에서 자기의 피해사실을 증언한다.
이 여성들의 연대를 여성의 날에 떠올려 본다. 세상이 만든 프레임을 벗어던지고, 서로를 있는 그대로 존중해주는 마음들을 기억하면서 하루하루 조금씩 앞으로 걸어 나갈 때 폭력의 카르텔에도 서서히 균열이 나지 않을까. 그러다 보면 라영의 말처럼 "얼마나 많이 걸어왔는지" 깨닫게 되는 날이 오게 되리라 믿는다.
▲성폭력 피해자들을 돕는 세 여성 변호사의 이야기를 담은 드라마 ENA <아너: 그녀들의 법정>EN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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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쓰는 상담심리사. 심리학, 여성주의, 비거니즘의 시선으로 일상과 문화를 바라봅니다. 모든 생명을 가진 존재들이 '있는 그대로 존중받기'를 소망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