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렇게 추운 베를린영화제가 있었나 싶다. 영화제 기간 내내 얼음이 꽁꽁 얼어붙고 눈발이 휘날리는 나날이 이어졌다. 뮌헨 안보회의가 한창인 데다가 밀라노 동계올림픽이 베를린 영화제 이목을 흩뜨렸다. 추위에 몸을 잔뜩 움츠린 기자, 영화관계자들이 베를리날레 팔라스트 앞을 바쁘게 오갔다. 논란 속에서 선발된 집행위원장 파트리샤 터틀의 두 번째 영화제라서 기대를 모았다. 그녀가 차려 낸 베를린영화제는 심사위원장은 독일의 노장 감독 빔 벤더스가 맡았다. 76회 베를린 영화제가 2월 12일부터 22일까지 열렸다. 영화제에서 만난 의미 있는 작품 몇 가지를 정리했다.
독일 영화의 선전
▲베를린영화제 상영 현장
Berlinale
개막작의 정치적 메시지는 강력했다. 유명 감독의 영화 대신 아프가니스탄 출신 여성 감독 샤르바누 사다트 Shahrbanoo Sadat의 < 노굿맨 No Good Men >이 막을 열었다. 때는 2021년, 미국과 서방 군대가 아프가니스탄에서 철수하기 직전이다. 아프가니스탄 공영방송 카불뉴스에서 유일한 여성 촬영기사로 일하는 나루는 가부장적 구조 회사에서 고군분투한다. 나루는 남편과 별거 중에다 세 살짜리 아들도 어린이집에 등하교시키며 돌보고 있다.
그녀는 전 국민에게 알려진 유명 기자 와 한 팀이 되어 취재해야 하는 상황이다. 처음엔 여성이라 무시했던 그가 자기 일에 책임감을 가지고 최선을 다하는 모습에 인간적 감정을 갖게 되며 새로운 국면을 맞는다. 우리가 뉴스로만 접했던 그곳의 절망적 상황을 맞이했던 사람들의 모습을 만난다. 영화는 가벼운 터치의 코미디로 시작해 스토리를 이어 가지만 결국 급박한 비극으로 끝난다.
정치적 영화제라는 타이틀에 걸맞게 올해도 정치적 메시지가 담긴 영화들이 주를 이뤘다. 게다가 영화제 중반쯤 틸다 스윈턴, 하비 바르뎀 등 저명 영화인 80여 명이 영화산업지 <버라이어티>에 베를린영화제 당국에 공개편지를 냈다. 가자에 대한 이스라엘의 시민학살에 대한 입장을 분명히 하라는 요구를 담은 내용이었다. 결국 올해도 어김없이 베를린은 뜨거운 정치 토론의 장이 되었다.
이번 경쟁 부문 라인업엔 소위 '거장' 감독이 특히 드물었다. 예전 같으면 경쟁 부문에 올랐을 함량 미달 할리우드 영화들은 이제 모두 스페셜부문으로 자리를 옮겨갔다. 개막 당시 독일 유수 언론들은 베를린영화제 위기를 들먹이며 스타와 글래머 부족 타령을 해댔다. 영화산업교류가 가장 활발히 이루어지고 아트하우스 영화감독들이 가장 노리는 무대는 베를린이 아니라 칸이나 베니스다. 하지만 관점을 바꿔보자.
베를린은 아직 발굴되지 않은 새로운 이름들에 기회를 열어주는 기회의 무대라는 이미지가 강해졌다. 총 278편 중 데뷔영화가 14편, 월드프리미어는 200편이다. 게다가 독일 영화 무대였다. 경쟁작 22편 중 5편(< 노란 편지 Yellow Letters > < 홈스토리 Home Story > < 내 아내가 운다 My Wife cries > < 로제 Rose > < 도시에서 가장 외로운 남자 The Loneliest Man in Town >)이 독일 영화다. 그리고 20년 만에 독일 영화 < 노란 편지 Yellow Letters >가 금곰상을 차지했다. 연기파 독일 배우 잔드라 휠러가 최고 주연상을 거머쥐는 영광도 안았다. 자국 영화를 키워주는 홈그라운드 역할을 톡톡히 한 것이다.
예술가, 가족, 나이 듦
▲노란편지스틸
Berlinla
경쟁 부문 영화는 가족 문제, 노인 문제, 예술가들을 다루는 영화가 대다수였다. 어려움에 처했을 때 가장 사랑하는 사람은 가장 가까이 있는 사람일 수밖에 없는 인간존재의 공통 현실을 잘 반영했다.
예년과 비슷하게 평작이 더 많았다. 그럼에도 창의적이고 기발한 영화들도 간간이 보였다. 예술가 존재에 대한 탐구가 돋보였다. < 에브리바디 딕스 빌 에번스 Everybody digs Bill Evans > < 도시에서 가장 외로운 남자 The Loneliest Man in Town > < 노란 편지 Yellow Letters > < 엣더씨 At the Sea >와 같은 영화들이다.
<노란 편지> 속 세련된 연출에 배우들의 연기는 여전히 생생하다. <노란 편지>의 일커 차탁 감독은 터키 2세대 출신 독일 감독이다. 그는 민주주의가 무너진 세상이면 어디서나 일어날 수 있는 일이라는 걸 관객에게 각인시킨다.
설정은 튀르키예에서 일어나는 일이지만 촬영은 튀르키예가 아니라 베를린과 함부르크에서 진행됐다. 감독은 버젓이 앙카라와 이스탄불 대신 독일 베를린과 함부르크에서 찍었다고 밝힌다. 어색함은 곧장 경고로 읽힌다. 앙카라에 사는 부부는 저명 교수와 배우로 권위적 정부에 비판적인 태도를 취한다. 결국 이들이 직장을 잃는다. 수입이 끊겨, 실제 먹고 사는 일에 부딪힌 부부가 겪어내야 하는 삶은 녹록지 않다.
<노란 편지>는 정치적 문제가 먹고 사는 문제와 부딪혔을 떄 겪는 도덕적 갈등을 다룬 수작이다. <노란 편지>의 금곰상 수상으로 76 베를린영화제의 정치적 입장을 분명히 밝혔다. '민주주의가 무너지면 우리의 삶은 어떻게 변하게 될까?'라는 질문을 던진 작품에 손을 들어준 것이다.
▲에브리바디 딕스 빌 에번스스틸
Berlinale
무심한 듯 함께 있어 주는 가족의 소중함을 느끼게 해주는 예술가 영화도 눈길을 끌었다. 전설의 재즈 피아니스트 빌 에번스의 가장 어려웠던 시기를 조명하는 < 에브리바디 딕스 빌 에번스 Everybody digs Bill Evans >의 그랜트 지(Grant Gee)가 감독상을 수상했다. 영화는 연주실황으로 시작한다. 에번스의 오리지널 음악 사운드를 입힌 공연에 관객을 초대한다. 60년대 분위기를 살린 스타일이 인상적이다. 60년대 찍은 영화처럼 흑백이다. 빌 에번스는 1961년, 공연 후 같이 타고 가던 자동차 사고로 음악 동료 두 명을 잃는다. 영화는 그 후 공백 기간을 조명한다. 예술가는 슬픔과 무기력에서 어떻게 빠져나갈 수 있나. 영화는 말없이 함께해준 빌의 가족들과의 일상으로 이끈다.
밥 먹고 산책하고 가만히 있는 시간과 대화가 어떤 파장, 회복, 위로를 가져오는지 미세하고 점차 스며든다. 에번스가 다시 음악 세계로 돌아간 후 화면은 빠른 시간 도약을 거듭한다. 에번스의 뇌 속의 기억들을 따라가고 있는 것 같다. 70년대와 80년대 장면은 정말 그 시대의 패션과 영화 스타일을 그대로 따른다. 영화는 빌이 생의 마지막을 회고하는 순간이었을 수도 있겠다. 그가 관객과 함께하던 공연의 순간은 슬픔도 아픔도 없는 끝없는 현재의 시간이었음을 고백하며 마지막 숨을 거둔다.
▲도시에서 가장 외로운 남자스틸
Berlinale
< 도시에서 가장 외로운 남자 The Loneliest Man in Town >도 주목할 만하다. 극영화와 다큐멘터리가 혼재되어 독특하다. 오스트리아 빈에 사는 주인공 알 쿡은 왕년 블루스 가수다. 80살이 넘은 그가 사는 고풍스러운 오래된 아파트는 옛 영광과 추억으로 가득하다. 옛날 레코드판, 전축, 엠프와 전자기타, 60데 풍 가구, 작고한 사랑하는 이의 사진들로 둘러싸여 있다. 하지만 이 아파트는 곧 철거될 예정이다. 하지만 주인공 알은 세입자 권리를 고수하며 마지막 세입자로 남았다.
크리스마스이브 트리 장식을 하고 촛불을 켜고 음반을 틀어 혼자만의 의식을 가지려는 찰나 전기가 나간다. 새 건설회사는 사람과 돈을 동원해 이사 나갈 것을 종용한다. 결국 그가 찾은 곳은 여행사다. 평생 꿈이었던 블루스의 본고장 미국으로 떠날 결심을 하고 편도 티켓을 구입한다. 이곳저곳 광고를 붙여 가구와 자신이 소중한 물건들을 하나씩 팔아 가며, 그의 지난 삶을 반추한다. 자본에 밀려나는 세입자를 비판적으로 그리는 동시에 퇴락한 과거의 노스탤지어가 가득하다. 수상에는 실패했지만, 이번 영화제 다섯 손가락에 꼽힐 명작이다.
▲로제스틸
Berlinale
< 로제 Rose >는 가족이나 예술가 범주에서는 벗어났지만, 여성 인권에 대한 이야기다. 오스트리아 배우 출신 마쿠스 슐라인처(Markus Schleinzer) 감독의 작품이다. 중세 시절 전해 내려오는 이야기를 바탕으로 했다. 남장했던 어떤 여성의 운명을 그렸다. 때는 16세기 30년 전쟁 직후다. 마을에 자신을 군인이라고 소개하는 낯선 남자가 폐허가 된 농장의 상속 문서를 들고 나타났다. 마을 사람들은 의심의 눈초리로 바라보지만 농장을 인수하고 낯선 남자는 농장을 번영시킨다. 성공은 결혼으로 이어지고, 여러 위기를 넘기다 결국 그가 여성임이 밝혀진다. 그녀는 마지막 변론에 그저 자유롭게 살고 싶었을 뿐이라는 말을 남긴 채 형장의 이슬로 사라진다.
영화는 철저한 3인칭 관점의 거리를 두고 스토리를 풀어나간다. 절제된 흑백 화면에 내레이션으로 상황을 설명한다. 이 남장 여성을 연기했던 잔드라 휠러는 은곰상 최고 연기상을 수상했다. 영화제 내내 작품성도 인정받아 금곰상으로 점쳐졌다.
< 퀸 엣 씨 Queen At Sea >는 노인 문제를 가장 현실감 있게 다룬 문제작이다. 줄리엣 비노쉬가 주인공으로 출연하여 관심을 모았다. 알츠하이머병을 앓고 있는 가족을 돌보는 이들의 애환과 어려움을 생생하게 다뤘다. 치매 환자의 성 문제 같은 다루기 까다로운 문제가 전면에 섰다. 고령화 사회에 돌봄의 문제는 공론화될 문제다. 그래서 이 영화가 주는 울림이 크다.
▲퀸 엣 씨스틸
Berlinale
싱가포르 영화 < 위 아 올 스트레인저 We are all Stranger >도 흥미롭다. 가벼운 터치의 코미디로 서민들의 삶으로 들어가 볼 수 있다. 화려한 빌딩 사이로 매일 힘든 노동을 하고 사는 시장의 식당 주인의 일상과 서빙하는 점원들의 삶은 중산층 이상의 삶의 괴리를 들여다볼 수 있다. 재혼한 아버지와 새 부인, 이십 대 초반에 아이를 갖고 결혼한 젊은 세대가 좁은 집에 살며 부대끼며 산다. 혈육이 아닌 사람들도 가족이 될 수 있을까. 가족이란 무엇인지 사유하게 되는 영화다.
▲We are all strange스틸
Berlinale
< 홈스토리 Home Story >도 가족에 대한 이야기다. 16세 소녀 레아가 캐스팅 쇼에 발탁되면서 캐스팅쇼 촬영팀이 동독 지역 소도시 게라를 찾는다. 처음엔 노래하는 내성적 소녀 레아가 중심으로 이야기가 돌아가다가 카메라는 다른 가족 구성원에게도 골고루 관심을 둔다. 곧 레아의 부모, 사촌, 고모, 조부모들이 모두 각자 문제를 갖고 있음을 알게 된다.
모녀간 미세한 갈등, 인물들 간 미묘한 긴장감과 불만들은 러닝타임이 지나며 더욱 불거진다. 캐스팅 쇼 촬영팀에서 찍어 방영하게 된 레아 가족의 이야기와 실제 가족 모습의 차이를 보며 관객은 웃지 않을 수 없다. 여러 인물들의 다각도의 관점들이 영화 안에 살아있다. < 홈스토리 Home Story >는 복잡한 인물관계와 모순을 2시간 러닝타임 안에 축약한 대작이다.
말 많고 탈 많던 황금곰 잔치가 끝났다. 이번 베를리날레도 정치적 영화제임을 논란과 정치적 내용을 담은 영화들을 선보이며 존재감을 과시했다. 수상이 영화의 우열을 가르는 건 아니다. 이번 영화제의 방향성을 보여줄 뿐이다.
▲홈스토리스틸Berlina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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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와 만난 예술, 베를린 영화제가 품은 영화의 속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