들리지 않는 종소리, 일흔 넘은 일본 노감독의 경고

[김성호의 씨네만세 1284] <차임>

모두가 영화의 위기를 말하는 이 시대에 일본영화계는 새로운 전기를 맞이했다. 매년 세계 유수의 영화제에서 주목받는 일본 감독을 만나는 건 이제는 놀랍지 않은 일이다. 시대적 거장인 하마구치 류스케와 고레에다 히로카즈만이 아니다. 한국 영화팬들도 주목하는 일단의 젊은 감독들, 이시이 유야, 네오 소라, 미야케 쇼 등도 독자적인 세계를 점차 깊게 빚어 간다. 탁월하다 할 만한 신예가 나오지 않은 지 근 20년이 가까워 오는 한국 영화계가 부러운 시선을 보내게 되는 것도 자연스런 일이다.

어찌할 수 없이 부러워할 밖에 없는 게 몇 가지 더 있다. 개중 하나가 전 시대의 거물, 노장들의 존재다. 1955년 생 구로사와 기요시, 1959년 생 나카시마 테츠야, 1960년 생 미이케 다카시처럼 세계적으로 인정받은 나이든 걸물들이 여전히 활발히 활동하는 일본 영화계다. 말하자면 신구조화, 일본 영화계엔 나이든 작가와 젊은 작가들이 어우러져 제 색채를 유지하며 작품을 빚고 발표하는 일이 활발히 이뤄진다.

'감독이 60세 이상이면 10% 감점'

몇 년 전 유출돼 화제가 됐던 한국 어느 금융사의 영화 투자기준 가운데 이런 항목이 있었다. 이 금융사가 투자한 작품이 줄줄이 선전하며 해당 투자기준은 곧장 여러 투자사의 방침에 적잖은 영향을 미쳤다. 감독의 많은 나이는 그 자체로 감점사유가 되는 게 현실이다. 적어도 한국 영화계에선 더 많은 나이를 더 많은 현장경험이며 누적된 사유를 기대하도록 하는 단서로써 읽지 않는다. '살아남았다는 건 강하다는 것'이란 말은 인터넷 상에나 떠도는 밈일 뿐이다. 나이 먹은 이는 늙고 낡은 감각을 가졌으리란 편견이 아무렇지 않게 퍼져나가는 광경을 나는 영화계 안에서 지난 몇 년 간 수없이 목격해왔다.

차임 스틸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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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흔 넘긴 노장이 전하는 무서운 이야기

물론 나이든 거장이 아예 없는 건 아니다. 이창동과 이준익, 홍상수 등 한국에도 존중받는 노장이 소수나마 존재한다. 그러나 이들이 만드는 작품이 상업적 투자를 얼마나 받고 있느냐를 생각하면 민망할 따름이다. 할리우드에선 마틴 스콜세지, 스티븐 스필버그, 로버트 저메키스, 조지 밀러 등의 노장이 최근까지도 큰 자본이 투입된 작업을 진두지휘하고는 한다. 단순히 창작자의 위치에서뿐 아니라, 제작과 기획 등 다방면에서 활약한다. 일본 영화계 노장 또한 마찬가지. 여전히 상업영화 투자를 유치하여 젊은이들과 경쟁하고 협업하는 모습을 어렵잖게 찾아볼 수 있다.

구로사와 기요시, 일흔을 넘긴 이 감독의 신작이 한국에 개봉을 앞두고 있다. 45분짜리 중편 <차임>으로, 기요시의 지난 작품들을 연상케 하는 스릴러다. 대표작 <큐어>와 <회로>를 통해 현대사회 가운데 자리한 불통과 불가해의 공포를 감각적 장르영화 가운데 펼쳐낸 바 있던 그다. <차임> 또한 소리와 영상, 좀처럼 닿지 못하는 인간 간의 거리를 활용하여 보는 이의 감각을 깨우니, 구로사와 기요시의 장기를 확인할 수 있는 기회라 하겠다.

무대는 요리교실이다. 십 수 명의 수강생이 강사 마츠오카(요시오카 무츠오 분)의 지도 아래 요리를 배운다. 수강생 타시로(코히나타 세이이치 분)도 그 수강생 중 하나다. 다른 생각에 빠져 좀처럼 수업에 집중하지 못하는 듯 보이던 그에게 마츠오카가 다가가 이런 저런 주문을 한다. 강사와 수강생 사이 통상적인 상황은 타시로의 이상한 태도 탓으로 보는 이에게 섬뜩한 기분을 안긴다. 제 귀에 차임벨 소리가 들린다는 그의 말을 마츠오카는 도무지 이해할 수 없다. 광기다. 그 광기가 조금씩, 마침내 온전히 표출되자 수업은 파행에 이르고 만다.

차임 스틸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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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유는 없다, 현상이 있을 뿐

영화는 이유를 향하지 않는다. 표면화된 문제의 이유를 찾아가는 통상적 영화와 달리 현상 그 자체에 주목한다. 그저 한 명의 이상행동에 불과할 것이라 여겨졌던 문제가 요리교실 바깥에서도 아무렇지 않게 이어지는 광경이 사회, 공동체, 문명의 절멸을 떠올리게 한다. 마치 어느 좀비물의 본격적 좀비창궐 이전의 이야기를 그리듯이 아직 표면화되지 않은 재앙의 존재를 마츠오카를 중심으로 보여줄 뿐이다.

기괴한 행위, 불편을 자아내는 소리와 영상은 영화 속 서로와 닿지 않는 사람들, 파편화된 공동체와 맞물려 부조리한 감상을 자아낸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은 불편이 없는 평시의 상태가 불편한 요소가 있는 상태에서 비로소 강조되기 때문이겠다. 왜 행복이란 불행의 요소가 없는 상태란 말도 있지 않던가. 무탈함이 곧 다행함이란 것을 우리는 자주 잊고는 한다. 무언가 잘못된 상황 가운데서 문명을, 사회를, 공동체와 가족, 개인의 안녕을 부수는 게 무언지를 확인하게 된다. 이 영화 <차임>, 무언가 잘못된 상황에서 들려 마땅한 차임벨의 소리가 좀처럼 들려오지 않는 것은 이 시대 깨어 있는 사람들이 얼마 없기 때문은 아닐까.

전작에선 그래도 조금은 더 친절했던 구로사와 기요시의 영화가 이제는 현상 그 자체를 강조하고 있음은 어째서일까. 그의 전작이 없다면 이 영화로부터 이면의 응시를 파헤치려는 시도는 무용했을 테다. 그저 평이한 장르영화 쯤으로 이해하고 넘어가는 것이 더 마땅해 보이는 작품으로부터 감독이 응시하고 있는 지점을 파헤치는 것은 구로사와 기요시의 지난 작품들이 겨냥한 지점이 시대적으로, 또 작가주의적 관점에서 유효했기 때문이다.

차임 스틸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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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립과 절멸의 시대상, 그 뿐일까?

공동체가 무너지고 온라인의 연결이 가속화되는 세태 뒤로 개인의 고독은 더욱 가속화되는 현상을 직격한 그다. <차임> 속에서도 공동체는 있다. 마츠오카는 매일 아내, 그리고 아들과 함께 식사를 한다. 그러나 아내가 이상행동을 해도, 아들이 전화기만 부여잡고 있어도 아무런 문제가 없는 듯 그들은 각자 따로 존재한다. 하나하나가 미쳐가도 다른 이는 알지 못한다. 서로가 가족, 또 공동체를 이루고 있는 특별한 관계란 걸 전혀 인식할 수 없다.

어디 그들뿐일까. 영화 속에 등장하는 모두가 꼭 그와 같다. 사회 곳곳에서 미쳐가는 이들이 나오지만 국가의 존재는 좀처럼 보이지 않는다. 개별적 광기, 독립된 사건으로서만 문제가 다뤄지는 광경이 도리어 공포스럽다. 영화는 어떤 설명 없이 광기만을 표면화하는데, 그 집요한 무관심이 영화의 문제의식을 형식적으로 강화한다고 느껴질 정도다. 차임벨의 경고음은 이미 곳곳에서 울리고 있는데, 사람들은 그 소리를 듣지 못한 듯 오늘을 산다. 마침내 내 곁의 누가 칼을 치켜들고 저 자신을, 또 나와 내 주변을 찌를 때가 되어서야 무언가 잘못되고 있다고 말하게 될까.

구로사와 기요시는 통상적인 장편영화가 아닌 채 1시간이 못 되는 중편영화를 통해 오늘의 관객에게 제 영화세계를 선보인다. 그 시도는 형식적인 면에서도 젊은 감독들의 시도보다 전격적이며 효율적이다. 제 영화세계의 연장이면서도 독립된 작품으로서의 개성 또한 간직하고 있음을 주목할 만하다. 이전 작품들보다 더 나아간 작품이라고 할 수는 없겠다. 그러나 덜어낸 요소들이 도리어 시대성을 반영하고 있다는 건 주의해 마땅한 일이다.

차임 포스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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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붙이는 글 김성호 평론가의 브런치(https://brunch.co.kr/@goldstarsky)에도 함께 실립니다. '김성호의 씨네만세'를 검색하면 더 많은 글을 만날 수 있습니다. goldstarsky@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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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영화평론가.서평가.기자.3급항해사 / '자주 부끄럽고 가끔 행복했습니다' 저자 / 진지한 글 써봐야 알아보는 이 없으니 영화와 책 얘기나 실컷 해보련다. / 인스타 @blly_kim / GV, 강의, 기고청탁은 goldstarsky@naver.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