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인지 짐인지 아직 모르는 채로

[이 장면 이후 우리 사회는] 넷플릭스 <장손>이 남긴 한 장면

[이 장면 이후 우리 사회는] 영화, 방송, 책등 작품 속 한 장면을 통해, 오늘의 사회적 장면과 감정의 흐름을 살펴봅니다.[기자말]

손안에 무언가를 쥐었는데,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를 때가 있다. 받은 것인지, 남겨진 것인지. 선택하지 않았는데, 이미 내 이름으로 되어 있는 것. 아직 아무것도 결정하지 못한 채 굳어 있는 순간.

영화 〈장손〉에 그런 장면이 있다.

택시 안에서 성진(강승호)은 할아버지가 건네준 검은 비닐봉지를 열어본다. 뭔가 싶었는데 통장이다. 의아한 표정으로 통장을 한 장씩 넘기며 살펴본다. 성진의 이름으로 된 통장에는 할아버지 할머니 이름으로 매달 입금된 목돈이 들어 있다. 성진의 표정이 서서히 굳어진다. 초점 잃은 눈빛, 입술을 깨물고 만감이 교차하는 표정. 창밖에서 햇살이 쏟아진다. 성진은 손으로 햇살을 애써 피하며 옅은 신음을 내뱉는다.

이 영화는 큰 사건으로 남지 않는다. 대신 한 사람이 아무 말도 하지 못하는 얼굴로 남는다. 사실 처음 이 영화를 봤을 때, 담백한 연출이 인상적이었지만 감정의 여운이 그리 깊지는 않았다. 3대 대가족, 두부 공장 가업, 사랑과 돈과 기대가 뒤섞인 가족의 모습 등. 여느 영화에서나 볼 수 있는 가족과 세대 서사로 읽혔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통장을 손에 쥐고 굳어 있던 성진의 그 표정은, 시간이 지나도 마음 한편에 체증처럼 자리한다. 누구나 한 번쯤 겪어봤을 감정이랄까. 그 순간을 지나왔는데 미처 이름을 붙이지 못했던 것뿐일지도.

그리고 받아들이지도, 내려놓지도 못한 채 정지된 그 순간의 감정은 영화에 대한 선입견을 여지없이 무너뜨린다. 분노도, 감사도, 거부도, 수용도 아닌, 그 사이 어딘가에 멈춰 있는 순간의 감정. 체증처럼 자리한 그 감정을 따라가다 보면, 이 영화의 진짜 질문과 마주하게 된다.

영화 〈장손〉은 3대 두부 공장 집안의 장손 성진이 할머니의 죽음을 계기로 가족의 오래된 비밀과 마주하는 이야기다. 그런데 이 영화에서 가장 인상 깊은 장면은 누군가 쓰러지거나 소리치는 장면이 아니다. 그저 손안에 무언가를 쥔 채 굳어 있는 그 정지의 순간이다.

받은 것인가. 아니, 남겨진 것이다. 성진은 선택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것은 이미 손안에 있었다. 받은 것은 내가 선택한 것이다. 남겨진 것은 누군가 떠난 자리에 이미 놓여 있었던 것이다. 그 경계가 이 영화 내내 흔들린다.

사랑의 다른 이름

장손 티저예고편
장손티저예고편넷플릭스

남겨진 것을 거부하지 못하는 이유가 있다. 그것이 사랑의 언어로 포장되어 있기 때문이다.

"성진이 왔다. 어서 에어컨 틀어라." 할머니 말녀(손숙)는 다른 손자들에게는 틀어주지 않으면서 성진이 오면 제일 먼저 에어컨을 틀었다. 작은 편애였다. 그러나 그 편애 안에는 이 아이가 이 집을 이어갈 것이라는 기대가 들어 있었다. 그 기대는 말해진 적이 없었다. 그냥 에어컨 바람처럼 조용히 흘러 다녔다.

할아버지 승필(우상전)도 다르지 않았다. 술에 취해 곤히 잠든 아들 태근(오만석) 곁을 지나치다 말없이 선풍기를 틀어주는 장면. 에어컨도, 선풍기도, 이 집안의 사랑은 늘 그런 방식이었다.

이런 장면은 낯설지 않다. 장남에게만 건네지는 말 한마디, 딸보다 아들 앞에 먼저 놓이는 밥그릇, 손자의 진로에만 유독 진지해지는 할아버지의 표정. 대놓고 차별이라고 부를 수 없는 것들. 그러나 그것이 쌓이면 하나의 불문율이 된다. 누가 이 집의 이름을 이어갈 것인지, 누가 이 집의 짐을 질 것인지. 말하지 않아도 이미 정해진 것처럼 흘러가는 불문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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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약 그것이 노골적인 강요였다면 성진은 거절할 수 있었을 것이다. 실제로 성진은 말했다. "저 두부 공장 안 할 거예요." 아버지 태근은 받아쳤다. "니가 안 하면 누가 하노!"

하지만 그것이 할머니의 손길이었을 때는 달랐다. 한 생을 살아낸 여자의 마지막 기억이었을 때는. 그것을 거부하는 순간, 자신이 나쁜 사람이 된다. 그 무게가 사람을 옴짝달싹 못 하게 만든다.

성진의 누나 미화(김시은)가 출산 후 혼자 훌쩍이며 할머니의 요리 비법책을 들여다보는 장면이 있다. 말없이 지나치기 쉬운 장면이다. 한글을 이제 막 배운 듯 삐뚤빼뚤한 글씨로 정성껏 적어 내려간 손맛의 기록들. 평소엔 성진에게만 에어컨을 틀어주던 할머니가, 정작 이 집을 실제로 지탱할 사람이 누구인지는 알고 있었다는 뜻이다. 통장은 성진 이름으로, 요리책은 미화에게. 말로 한 적도 약속한 적도 없었다. 그냥 삐뚤빼뚤한 글씨로 조용히 남겼다.

할머니의 사랑은 성진에게만 있지 않았다. 미화에게도 있었다. 할머니는 모두를 사랑했다. 다만 방식이 달랐을 뿐이다. 성진 어머니 수희(안민영)가 뒤늦게 성진 앞에서 털어놓는 말이 그것을 조용히 드러낸다. 결혼 인사를 왔을 때 할머니가 쳐다보지도 않아 섭섭했다고 했더니, 할머니가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남의 집 귀한 딸 고생시킬 생각하니까 볼 면목이 없더라."

사랑은 있었다. 그러나 그 사랑이 표현될 수 있는 방식은 처음부터 정해져 있었다. 누가 정한 것도 아니었다. 그냥 그렇게 흘러온 것이었다. 장손이라는 이름은 누군가 강요한 것이 아니다. 가족 스스로 유지해온 것이다. 가업은 아들에게, 살림과 뒷바라지는 딸에게. 누가 시킨 것도 아닌데 그렇게 흘러왔다.

그리고 그 흐름 안에는 주었지만 받지 못한 사람이 생긴다. 고모 혜숙(차미경)이다. 혜숙은 평생 공장을 지켰지만 주인은 따로 있었다. 그것을 누구도 이상하다고 말하지 않았다. 그냥 그런 것이었다. 그 헌신이 사랑의 이름으로 당연하게 여겨지는 한, 인정의 언어도 거부의 언어도 찾기가 어렵다.

혜숙의 이야기는 영화 안에만 있지 않다. 지난 2월, 국회는 재산의 유지·보호에 기여한 상속인을 보호하는 방향으로 민법 개정안을 본회의에서 통과시켰다. 법은 뒤늦게 기여도를 따지기 시작했지만, 가족 안에서는 여전히 누가 얼마나 감당했는지 말해지지 않는다. 영화 속 혜숙의 이야기가 스크린 밖에서도 수십 년째 반복되고 있다는 뜻이다.

사랑인지 짐인지

장손 티저예고편
장손티저예고편넷플릭스

성진이 그 통장을 어떻게 했는지, 영화는 말하지 않는다. 받아들였는지, 내려놓았는지, 아니면 여전히 손안에 쥔 채로 굳어 있는지. 감독은 그것을 보여주지 않는다. 그 침묵은 이 영화의 진짜 질문과 맞닿아 있다. 사랑인지 짐인지 아직 답하지 못한 채로.

분노하기엔 너무 사랑받았고, 감사하기엔 너무 무거운 것. 그 감정에는 아직 이름이 없다. 이 영화는 그것을 해소하지 않는다. 성진의 얼굴에 그냥 그대로 둔다.

통장 안에는 돈만 있지 않았다. 이 집안의 이름을 가진 사람은 무엇을 해야 한다는 기대, 우리가 고생해서 쌓은 것이니 함부로 하지 말라는 무게, 그리고 그 모든 것에 담긴 말 못한 사랑까지. 이전 세대가 다음 세대에게 전달하는 것은 물건이 아니다. 읽어야 하는 텍스트다. 성진은 그 텍스트를 자기 방식으로 읽었다. 가업을 잇는 대신, 그것을 일군 사람들의 마음을 자기 언어로 받아 든 것이다.

사랑과 짐은 함께 온다. 원하든 원하지 않든 함께 받아야 하는 것. 그것이 사랑의 언어로 포장되어 있는 한, 거부하기도 어렵다.

"부모님 집은 받고 싶은데, 거기 따라오는 것들은 받고 싶지 않다." 요즘 젊은 세대에서 자주 들리는 말이다. 말해진 적 없지만 이미 정해진 것들. 명절에 와야 하고, 효도해야 하고, 집안일에 불려 다녀야 하는 것들. 그러나 원하는 것만 골라 받을 수 없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성진처럼 그 자리에 멈춰 있다.

이 멈춤은 이제 개인의 문제가 아니다. 가족이라는 이름 아래 당연하게 여겨졌던 것들이 이제는 더 이상 당연하지 않은 시대가 됐다. 그런데 그 갈등의 진짜 중심은 돈이 아니다. 사랑이라고 불러왔던 것이 실제로는 무엇이었는지, 우리는 아직 그 말을 제대로 꺼내 본 적이 없다.

장손 티저예고편
장손티저예고편넷플릭스

우리 중 누구도 손안에 비슷한 무언가를 쥐고 있을 것이다. 부모가 남긴 것, 집안이 걸어온 기대, 이어받아야 한다고 배워온 역할. 그대로 따를 수는 없지만, 완전히 외면할 수도 없는.

택시 창으로 쏟아지던 햇살을 애써 피하는 성진처럼, 우리는 각자의 손안에 놓인 것을 제대로 들여다보지 못한 채 머물러 있다.

그것이 사랑인지 짐인지.
받은 것인지 남겨진 것인지.
이제는 그것을 어떻게 읽을 것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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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손 가족 상속 유류분 가업승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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