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은 공정한가... 불신 받는 이 시대의 법을 향한 분노의 총성

[김성호의 씨네만세 1283] <판결>

(* 이 글은 영화의 스포일러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영화 <판결>은 기자로 일하며 목격한 수많은 사건을 떠올리게 한다. 합당한 제도 위에 부패한 인간들이 일으킨 문제를, 그로 인해 희생되는 힘없는 사람들의 분노와 무력감을 생각하게 한다. <살인자o난감> 등을 연출한 이창희 감독의 신작은 놀랍게도 한국이 아닌 인도네시아를 무대로 한다. 등장하는 이들도 모두 인도네시아 현지 사람으로, 한국이 제작에 참여하고 한국 연출진이 전면에 나섰음에도 한국 프로젝트라고 느껴지지 않을 정도다.

그러나 이야기는 다르다. 인도네시아 법원에서 벌어지는 현지의 이야기가 한국, 아니 비단 특정한 어느 나라가 아닌 전 세계적 문제를 저격한다. 법 아래 만인이 평등해야 한다는 법언은 무력하기만 하다. 유전무죄 무전유죄의 부조리함이 공공연하다. 법 바깥의 자본주의가 가진 자에게는 더 큰 부를, 갖지 못한 자에게는 더 지독한 소외를 안기는 상황에서, 법마저 가진 자와 갖지 못한 자를 차별하고 있다.

부잣집 아들의 폭행사건

판결 스틸컷
판결스틸컷제이앤씨미디어그룹

<판결>은 선악의 흔한 구도를 따르는 듯 보인다. 주인공은 법원 경위 라카(리오 데완토 분)다. 전직 특수요원 출신으로 동료들에게 신임받는 라카는 요즈음 세간을 떠들썩하게 하고 있는 사건을 가까이서 지켜보고 있다. 피해자가 크게 다친 상해 사건으로, 부잣집 아들이 가난한 이를 일방적으로 폭행한 사건이다.

피고인을 변호하는 티모(레자 라하디안 분)는 인도네시아에서 손꼽히는 유능한 변호사로,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승소하는 솜씨가 탁월하다는 평가를 받는다. 과연 그 솜씨가 상당한 듯, 증인으로 출석한 의료감정인 등은 피고인에게 정신질환이 있어 보인다는 소견을 낸다. 때문일까. 피고인은 영구적 피해를 입힌 가해행위를 했지만 징역을 피한다.

여기까지였다면 가진 자와 갖지 못한 자를 흔한 선악의 구도로 배치한 영화라고 할 수도 있다. 그러나 영화는 한 걸음 더 전진한다. 이번엔 피고인의 친구다. 그의 친구는 비슷한 일을 벌이고도 심신미약 등을 이유로 교묘히 처벌을 피한다. 그는 아예 무죄를 받지 못하고 되도 않는 정신병을 주장한 피고인을 못난이로 취급한다.

유전무죄 무전유죄의 사회적 자화상

판결 스틸컷
판결스틸컷제이앤씨미디어그룹

피고인의 집안은 인도네시아에서 호텔을 비롯해 다양한 분야의 사업을 하고 있다. 라카의 삶에 피고인이 연관된 건 우연한 일이었다. 앞의 사건 뒤 집행유예 처분을 받은 부잣집 아들을 쫓아와 붙들려는 피해자의 가족을 리카가 막아섰다. 법원 경위로 제 일을 했을 뿐인데, 피고인의 아버지는 자기가 운영하는 고급 레스토랑 식사권을 준다.

그는 사랑하는 아내 니나(니켄 안자니 분)와 함께 레스토랑에 방문한다. 변호사 시험에 막 합격한 니나에게 뭐라도 해주고 싶어서다. 그녀와 좋은 시간을 보낼 줄만 알았던 이날, 모든 것을 망친 비극이 벌어진다. 식사권이 어떻게 생겼는지 알게 된 니나와 다툼을 벌인 것이다. 화를 다스리러 화장실로 향하던 그녀는 앞의 문제 많은 부잣집 아들과 부닥친다. 그 한 번이 라카의 모든 것을 앗아간다.

영화는 명백한 살인사건을 증인 매수와 증거 인멸로 무죄로 바꿔내려는 부잣집 아들과의 싸움으로 이어진다. 어찌할 수 없는 상황에 법으로 해결하려 했던 라카는 눈앞에서 망가지는 사건 전개에 당혹감을 감출 수 없다. 상대 변호사는 악랄하고, 검찰은 무력함을 넘어 무기력하기까지 하다. 그 뒤에 감춰진 진실은 인도네시아뿐 아니라 세계 곳곳에서 확인되기도 했던 일이다. 검찰의 타락이다. 증인도 증거도 사라지고, 증언은 뒤바뀌며, 검찰마저 상대의 주장에 은근히 동조하고 나서는데 라카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 그래서 그는 그가 할 수 있는 것, 아주 잘 하는 것을 하기로 한다.

국경을 넘어 보편적 공감을 의도하는

판결 스틸컷
판결스틸컷제이앤씨미디어그룹

<판결>은 단순하고 우직하게 목적지로 향한다. 가장 먼저 묻는 것은 '세상은 과연 공정한가'하는 질문이다. 이는 '공정하지 않음을 알면서도 내 일이 아니기에 외면하는 일은 어쩔 수 없는 일일까'하는 물음으로 이어진다. 공정하게 법을 집행해야 할 이들이 도리어 법 기술자가 되어 가진 자들에게 복무하며 제 사익만을 좇는 행태가 공공연하다. 제겐 그런 일이 없을 줄 알았던 라카가 그 앞에 섰을 때, 그는 비로소 제 무력함만을 확인한다.

한국에서도 그와 같은 일이 적지 않다. 이를 보여주는 지표 하나는 바로 재정신청일 테다. 기자로 일하던 시절, 재정신청 사건을 수차례 가까이서 다룬 적이 있다. 일반 시민에겐 낯선 용어일 게 분명한 재정신청은 당사자들에겐 간절하기 짝이 없는 마지막 희망이다. 법원으로 하여금 검찰이 기소하지 않은 사건을 바로 잡아달라는 고소, 고발인의 마지막 요청이다.

법조계에선 검찰이 기소가 아니라 기소하지 않는 방식으로 진짜 힘을 발휘한다는 이야기를 공공연하게 한다. 그런 경우 피해자들은 법원에 검찰 처분을 다시 보아달라는 재정신청을 한다. 재정신청 이전에도 상급 검찰청에 담당 검사의 처분이 부당하다는 항고와 재항고 등의 절차를 밟을 수 있다. 그러나 수년을 기자로 일하는 동안 나는 항고와 재항고가 받아들여지는 광경을 본 적이 없다.

라카가 겪은 일이 이와 얼마 떨어져 있지 않다. 그러나 라카에겐 그가 할 수 있는 수단이 있었다. 반면 이 시대 평범한 이들에겐 그와 같은 역량이 없지 않은가. 그래서 <판결>은 희망이 아닌 절망의 노래다. 제도는 무력하고 제도에 복무하는 이들은 부패하며 가진 자와 갖지 못한 자 사이는 갈수록 벌어지는 상황이 그 기적적 역전극보다 선명하다. 그래서 이 영화는 스스로 희망이 없음을 말한다.

영화는 가진 자의 번듯함과 신사적 태도와 갖지 못한 자의 투박하고 무례한 모습 또한 곳곳에서 비춘다. <판결>의 주된 악당은 극단적 범죄 사례를 일으키는 문제 많은 이들이지만, 정작 두려워해야 할 것은 불공정하게 구축된 성채다. 이미 공고한 불공정한 체계가 눈앞의 악당보다도 더 큰 상대다. 그리고 이는 비단 인도네시아의 이야기가 아니다. 한국과 인도네시아, 두 나라 영화인의 협력 작업인 <판결>은 그렇게 국경을 건너 모두의 이야기가 된다.

판결 포스터
판결포스터제이앤씨미디어그룹



덧붙이는 글 김성호 평론가의 브런치(https://brunch.co.kr/@goldstarsky)에도 함께 실립니다. '김성호의 씨네만세'를 검색하면 더 많은 글을 만날 수 있습니다. goldstarsky@naver.com
판결 제이앤씨미디어그룹 이창희 리오드완토 김성호의씨네만세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작가.영화평론가.서평가.기자.3급항해사 / '자주 부끄럽고 가끔 행복했습니다' 저자 / 진지한 글 써봐야 알아보는 이 없으니 영화와 책 얘기나 실컷 해보련다. / 인스타 @blly_kim / GV, 강의, 기고청탁은 goldstarsky@naver.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