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인디스페이스를 시작으로 전주 무명씨네, 광주독립영화관 GIFT, 부산 무사이극장, 대구 오오극장, 안동 중앙아트시네마, 대전 아트시네마 등 전국 독립영화관을 돌며 상영회를 이어가는 영화가 있다. 25일 개봉을 앞둔 <레이의 겨울방학>이다. 정식 개봉을 한 달여 앞둔 작품이 전국 극장을 돌며 일종의 투어를 벌이는 광경이 이색적이다. 정식 개봉 역시 전국 십수 개의 독립영화 상영관 위주로 이뤄질 예정이라고 한다.
거침없는 걸음에도 무언가 아쉬움이 남는 건 이 영화에 더 많은 관심이 닿기를 바라서다. 편리함과 익숙함, 또 규모에 개의치 않고 다양한 가능성을 모색하는 동시대 작가며 작품을 적극 찾아보는 소수의 영화팬만이 이 영화가 닿아야 할 관객이 아니라 여긴다. <레이의 겨울방학>이 단 한 명의 관객에게라도 더 닿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지난 18일 인터뷰를 진행했다.
영화 <레이의 겨울방학> 속 레이, 그러니까 이번 작품이 첫 영화인 일본 고등학생 구로사키 키리카 배우를 만났다. 현재 호주에서 유학 중이라는 구로사키 키리카 배우가 바쁜 와중에도 서면 인터뷰에 응해, 영화의 한국 개봉에 앞서 기사를 작성할 수 있었다.
▲구로사키 키리카사진
구로사키 키리카
"인간 대 인간, 두 사람의 마주섬이 있어요"
<레이의 겨울방학>은 두 소녀가 언어를 뛰어넘어 관계를 맺는 이야기다. 일본 도쿄에서 일하는 아빠를 만나러 겨울방학을 맞아 놀러 온 여고생 규리(정주은 분)가 그곳에 사는 여중생 레이(구로사키 키리카 분)와 만나며 겪는 일련의 사건을 영화는 가만히 관조하듯 지켜본다. 전작들에서도 아직 성년이 되지 않은 아이들을 지켜보았던 박석영 감독의 카메라가 여전히 아이들을 제 관심으로 두고 있다는 사실이 굳고 정하게 느껴진다.
"국적도 쓰는 언어도 다른 두 소녀가 만나 함께 시간을 보내고, 웃고, 대화를 나눠요. 짧은 기간이지만 중요한 변화들이 있습니다. 서로를 이해하고 한 인간과 인간으로 마주하는 모습이 담겼죠. 잔잔하기만 한 게 아니라 친해지는 과정에서 재미있는 표현들도 나오는 영화예요."
<레이의 겨울방학>이 어떤 작품이냐고 묻자 위와 같은 답이 돌아왔다. 두 사람의 만남, 이렇다 할 사건 없는 아이들의 며칠 가운데서 '인간과 인간으로 마주하는 모습', 그 사이에서 불거지는 '재미있는 표현'을 말한 것이다. 그러고 보면 과연 작품이 그러한 듯도 하다.
박석영 감독의 주된 특징 중 하나는 출연한 배우 본연의 모습이 곳곳에서 배어난다는 것이다. 다큐가 아닌 창작극 속 꾸며낸 인물임에도 배우가 가진 본연의 분위기, 또 특징들이 통상적인 극영화보다 다소 더 묻어나는 인상을 지울 수 없다. 촬영 과정에서부터 배우들에게 많은 여지를 허하는 그의 연출적 특징 때문일 수 있겠다. 구로사키 키리카 배우가 말한다.
▲레이의 겨울방학포스터
영화사 삼순
레이와 영화 바깥 나, 닮은 점과 다른 점
"연기를 하며 특별히 신경을 쓴 부분이요? 따로 없는 것 같습니다. 설정이 현실과 다른 건 맞지만 레이의 언행이라거나 보여지는 성격은 따로 꾸며낸 게 아니라 평소에 제 모습 그대로를 담아냈어요. 영화를 보면서도 저 자신과 거의 흡사하다고 느꼈을 정도예요. 하지만 굳이 다른 점 하나를 꼽아보자면, 저는 혼자 있는 게 딱히 심심하다거나 외롭다고 생각하지 않아요(웃음). 타인에게 간섭받지 않는 저만의 시간이 매우 소중하다고 생각하는 편이랍니다."
있는 그대로의 자연스러움. 어쩌면 연기활동을 활발히 한 적 없는 어린 배우들에게서 있는 그대로의 자연스러움을 이끌어내는 감독의 비결이 이것이 아닌가 한다. 평소 모습 그대로를 카메라 앞에서 해낼 수 있도록 함으로써 전 인생에 걸쳐 살아온 분위기를 영화 안 인물에게 입혀내는 것이다. 배우는 따로 고심하여 신경 쓴 부분이 없다고 했지만, 바로 그것이야말로 이 영화의 특별함 중 하나일 테다. 배우가 더 편히 자기 본연의 모습을 이끌어낼 수 있도록 하는 힘, 그 배려 말이다.
실제로 구로사키 키리카 배우가 영화를 촬영하며 가장 기억에 남는 순간으로 꼽은 것도 그런 순간이었다.
"레이와 규리가 놀이공원에서 빗속을 뚫고 달려 나오는 장면이 있는데요, 그 촬영 때 일이에요. 아무래도 놀이공원에서 영화를 찍는 게 눈에 띄는 촬영이잖아요? 그래서 제가 기가 죽어 있었어요. 그게 눈에 보였는지 감독님과 스태프분들이 '무리하지 않아도 된다'고 거듭 말씀해 주셨죠. 중요한 촬영이라 마음이 급할 수도 있었을 텐데도 정말 신경을 많이 써 주셨어요. 그때의 따뜻함이 지금도 기억에 남아요."
▲레이의 겨울방학주연한 구로사키 키리카(왼쪽)와 정주은 배우가 포즈를 취하고 있다.
구로사키 키리카
언어를 넘어 오가는 마음이 닿을 때
언어를 넘어 오가는 마음이 배우에게도 닿았다는 이야기다. 카메라 앞, 주어진 일정 속에서 여러 스태프가 저를 주목하는 상황이 압박이 되는 건 자연스러운 일이다. 하물며 통제되지 않은 촬영 공간에서 다른 이들의 주목까지 끄는 상황은 더욱 그러하다. 더구나 십대 중반의 초보 배우다. 그 마음에 오래도록 온기를 남긴 배려가 영화 속 레이의 자연스러움으로 이어졌다.
영화 안에서도 기억에 남는 장면이 있었을 터다. 특별히 좋아하는 장면이 있느냐 묻자 다음과 같은 답이 돌아왔다.
"역시 해변에서 레이와 규리가 함께 보내는 시간, 바다를 바라보며 장래에 대해 이야기하는 장면이려나요. 아름다운 바다 앞에 있기에 아무런 꾸밈없이 지금의 자신과 정면으로 마주할 수 있었던 게 아닐까. 그렇게 생각합니다. 원래도 저는 바다를 좋아해요. 촬영 후 2년이 지난 지금도 당시 촬영했던 그 바다에 자주 가곤 해요."
▲레이의 겨울방학스틸컷영화사 삼순
"이 영화, 누구에게 추천하냐면요..."
일본을 떠나 호주라는 낯선 나라, 기존과는 전혀 다른 언어를 쓰며 살고 있는 현재 상황이 구로사키 키리카에게 더욱 특별한 감흥을 일으킨 듯하다. 그녀는 이 영화가 저 자신에게 큰 자극이 됐다며 비슷한 환경에 놓인 이들이 더 흥미롭게 볼 수 있을 거라고 추천했다.
"남녀노소 모든 분에게 추천할 수 있는 영화지만요. 특히 국제 교류나 유학에 관심이 있는 분들에게 추천하고 싶어요. 저 스스로가 영화를 찍으며 '언어의 장벽'이란 게 없다는 걸 깨달았어요. 태어나고 자란 환경, 국적, 사용하는 언어, 문화 모두 중요하죠. 하지만 이게 모두 다르더라도 우리는 얼마든지 관계를 맺을 수 있어요. 비단 한국과 일본만이 아니에요. 전 세계 어느 나라 사람들과도 우리는 서로를 이해하고 교류할 수 있어요. 정말이지 무엇이든 될 수 있다는 얘기죠."
이제 막 넓은 세상으로 나아간 꿈 많은 십 대 소녀의 이야기다. 배우 구로사키 키리카는 저 자신에게 추천하고 싶은 영화 안에서 저의 오늘을 살아낸다. 낯선 이와 마음을 열고 마주하여 관계를 진전시키고 자신의 세계를 확장한다. <레이의 겨울방학>은 온기를 품고 그를 가만히 응시한다. 응원이 깃든 마음으로. 이 영화에 각별한 애정을 가진 평자로서 나는 그와 같은 응원이 더 많은 이에게 닿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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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영화평론가.서평가.기자.3급항해사 / '자주 부끄럽고 가끔 행복했습니다' 저자 / 진지한 글 써봐야 알아보는 이 없으니 영화와 책 얘기나 실컷 해보련다. / 인스타 @blly_kim / GV, 강의, 기고청탁은 goldstarsky@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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