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이의 겨울방학> 스틸
영화사 삼순
부모라는 보호막이 일시적으로 제 기능을 온전히 수행하지 못하는 상황에서 두 소녀가 겪는 허전함과 고독을 다른 국적과 배경을 가진 둘이 함께 반전의 계기로 일군다. 또래 소녀들이라면 응당 갖게 마련인 공통 관심사, 기호, 공감 능력이 빛을 발하는 순간에 어른들이 망친 배제와 차별, 혐오는 부정적 영향력을 미치지 못한다. 대화의 불편은 극복할 과제에 불과하다.
오히려 기성 사회와 어른들이 구분한 장벽을 내재한 언어 사용이 원활하지 않은 덕분에 '인간' 대 '인간', 10대 여성으로 서로를 편견 없이 바라볼 수 있게 된 것. 레이와 규리는 전혀 의식한 적 없겠지만, 그녀들의 만남과 우정은 요즘 세계에서 횡행하는 오로지 차별과 배제를 목적으로 그어지는 '다름'이 실제론 아무 실체가 없음을 어떤 전문가 해설보다 강력하게 증명한다. 그리고 '어른들의 사정'으로 포장된 혐오와 몰이해가 아이들의 무한한 잠재력과 가능성으로 극복 가능하다는 희망의 증거이기도 하다. 끼리끼리 웅크리고 틀어박혀 무지에 편견을 확대재생산만 한다면 불가능한 변화다.
모든 건 두 소녀가 울타리 바깥으로 이불을 떨치며 용감히 나왔고, 낯선 친구와 허물없이 부대끼는 도전을 감행한 결과다. 그녀들이 함께 떠나는 작은 여행은 원래라면 (영화 내내 자리를 비운) 엄마와 가려던 길이다. 이제 소녀들이 서툴게나마 친구와 떠나는 여정은 소리 없는 웅변으로 이상적인 '성장'을 구현한다. 별것 아닌 듯해도 상징하는 바가 작지 않은 대목이다. 그녀들의 '진화'를 잔소리 대신 흐뭇하게 지켜보던 카메라 너머 감독의 미소가 곧 관객에게 전이될 테다.
한국영화 위기의 시대, 대안적 실천의 작은 예시
여기까지만 보면 <레이의 겨울방학>은 치밀한 기획으로 자연스러움을 연출한 작업으로 오해되거나 혹은 유사 다큐멘터리 '혼종'으로 이해될 여지가 있다. 그러나 작가로서의 태도는 같은 듯 다르다. <들꽃> <스틸 플라워> <재꽃> '꽃' 3부작은 물론 <바람의 언덕>과 <샤인>으로 이어져 온 박석영 감독의 작업은 국내에서 보기 드문 작가주의 경향을 뚜렷하게 견지해 왔다. 상업자본 간섭과 정형화된 패턴에 얽매임을 줄이며 전하고픈 주제를 (감독이 제어 가능한 범위 내에서) 관장하는 '작은 영화' 형태로 감독은 연속성을 갖고 매진해 왔다.
신작은 감독의 일관된 경향에 익숙한 이들이 초반엔 고개를 갸웃하게 만들 수 있다. '작은 영화'란 점은 공유해도 기본 상황 설정만 배우와 공유한 다음 주어진 배경 안에서 소녀들에게 자유도를 부여해 관찰 기록으로 남기듯 촬영했다. 이전 작품과 차별화한 개성과 함께 '미니멀', 아니 '마이크로' 형태라 봐도 좋을 최소 제작 환경을 맘먹고 감행했다. 감독이 밝힌 바대로 '카메라 하나와 줌렌즈 하나, 빌린 삼각대, 녹음기'만 갖고 본인과 촬영감독만 대동한 작업으로 이룩한 과업이다.
영화는 세련될 만큼 우리가 일본 배경 영화를 볼 때 감탄하는 아기자기하고 아련한 특유의 색감과 감성이 '손대면 톡 터질' 듯 농축된 상태다. 군더더기 없는 설정과 이야기가 담백하게 그려진다. 말로 일일이 표현하긴 쉽지 않아도 누구나 자신의 삶 어느 한 조각과 맞춰볼 수 있는 교감을 창출한다. 규모는 소소해도 담긴 내용은 가볍지 않다. 예술영화라고 괜히 어깨에 힘 팍 주지 않고 고의적으로 경쾌하게 접근한 덕택에 가능한 작업이다.
어느새 기성 상업영화 시스템의 축소 모델화하는 길을 답습하던 한국 독립영화, 특히 극영화 경향이 덩달아 지속 가능성에 물음표를 받는 작금 상황에서, 10여 년 넘게 자신만의 길을 걸어온 작가가 마치 한국영화 위기 담론에 관한 대답처럼 내놓은 이 영화는 그저 '소품'으로 한정할 수 없는 함의를 갖췄다. 외부 환경을 탓하기에 앞서, 자신의 예술적 창작욕을 어떤 위기에도 꿋꿋하게 정진하는 창작자의 결단은 무엇보다 소중한 가치다.
21세기 작가주의 감독의 상징인 크리스토퍼 놀란의 대표작 <인터스텔라>를 상징하는 대사처럼, "우리는 답을 찾을 것이다. 늘 그랬듯이"를 박석영 감독은 모두가 한국영화에 불어닥친 엄동설한에 두려워할 때 과감히 카메라를 들고 거리로 나섰다. 그리고 희망을 찾는 시대에 꼭 필요한 이야기를 길고 고단한 여정에 맞게 가벼운 몸놀림으로 구현한 결실을 관객에게 간절한 마음으로 내민다. 영화 속 레이와 규리가 그랬듯이, 감독과 관객이 만날 장면이 두근두근 기다려진다.
<작품정보>
레이의 겨울방학
Rei's Winter Break
2025 한국 드라마
2026.02.25. 개봉 75분 전체관람가
감독/각본 박석영
출연 구로사키 키리카, 정주은, 쓰루타 고조, 오다 신이치로
제작 영화사삼순×교류필름
배급 영화사 삼순
2025 51회 서울독립영화제 장편 우수작품상, 넥스트링크상
▲<레이의 겨울방학> 포스터영화사 삼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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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사회복지영화제 프로그래머. 돈은 안되지만 즐거울 것 같거나 어쩌면 해야할 것 같은 일들을 이것저것 궁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