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편의 재개봉작에 대해 말해볼까 한다. 하나는 <이터널 선샤인>, 다른 하나는 <퐁네프의 연인들>. <이터널 선샤인>은 한국에서 유달리 큰 소구력을 발하는 영화다. '씨네만세'에서 이 작품을 다뤄달란 메일을 지금껏 못해도 십 수 차례는 받았을 정도. 그 같은 요구 때문일까. 한국서 이 영화만큼 많이 재개봉한 작품도 손에 꼽는다. 4만 명 가까운 관객이 든 <이터널 선샤인> 재개봉은 이번이 무려 4번째다. 이보다 많이 재개봉한 작품은 '한국인이 사랑하는'이란 표현을 꼭 붙여야 하는 작품군, <러브레터>와 <시네마 천국> 정도다.
그렇다면 <퐁네프의 연인들>은? 1991년 작으로 35년이나 된 이 영화는 당대 프랑스의 파격적이고 전위적인 예술풍토를 상징하는 전설적 작품이다. 이번이 2번째 재개봉으로, 지난 2014년 필름시대 작품의 리마스터링 재개봉이 유행할 때 한 차례 재개봉한 적이 있다. 지금까지 흥행 성적은 약 5000명가량, 한국 독립예술영화 신작의 평균관객수에 비추어 보자면 그리 나쁘지 않은 성과다.
다만 현재 한국 극장가에서 승승장구하는 여타 재개봉작들, 앞서 언급한 <이터널 선샤인>을 위시해 <화양연화> <천공의 성 라퓨타> <오늘 밤, 세계에서 이 사랑이 사라진다 해도> 등이 각 수만 관객을 동원하고 있는 데 비하면 조금 아쉬울 수는 있겠다. <이터널 선샤인>과 <퐁네프의 연인들>은 제법 많은 공통점과 차이점을 가졌는데, 두 작품의 차이가 이 같은 성적의 격차로 이어졌다 여긴다.
▲퐁네프의 연인들스틸컷
M&M 인터내셔널
재개봉 흥행작, 그 같고 다름에 대해
<이터널 선샤인>이 어떤 작품인지에 대해 긴 이야기를 할 필요는 없겠다. 감독 미셸 공드리의 독보적인 대표작으로, 다분히 이색적이고 창의적인 연출법이 감탄을 불러일으킨다는 사실 정도는 언급할 만하다. 더불어 코미디 전문 배우로 유명한 짐 캐리의 진지한 연기를 확인할 수 있는 그리 많지 않은 영화로 꼽힌다는 사실도. 주연한 짐 캐리와 케이트 윈슬렛 모두에게 배우 인생의 전환점이라 불렸을 만큼, 그들이 이제껏 보여온 연기와는 차별화된 면모가 여럿 엿보인단 점도 주목할 만한 지점이겠다.
<이터널 선샤인>은 사랑의 끝, 그러니까 이별과 그에 따른 상실에 집중한다. 영화 속 세상엔 기억을 지울 수 있는 기술이 있고, 사랑을 잃은 이들이 이 회사를 찾아 저의 지난 연애를 선택적으로 삭제하는 것이다. 영화는 주인공인 조엘(짐 캐리 분)의 기억이 실시간으로 지워지는 상황 가운데서 초토화되고 있는 그 머릿속 지난 연애의 기억들을 스크린 위에 띄운다. 그 안에서 펼쳐지는 행복한 연애의 기억들, 그리고 마침내 다가올 파멸적 현실 사이의 대립이 영화 <이터널 선샤인>을 지탱하는 기둥이라 해도 좋다.
다음은 <퐁네프의 연인들>이다. 파리 센 강에 놓인 아홉 번째 다리의 이름이 퐁네프다. 영화는 이 다리에서 처음 만난 어느 남녀를 그린다. 미셸(줄리엣 비노쉬 분)은 세상의 끝에 선 것 같은 여인이다. 그녀는 시력을 잃어가는 화가다. 그저 시력을 잃어간다는 사실만으로도 한없이 고통스러울 것인데, 그녀가 화가란 사실은 그 슬픔을 훨씬 더 지독한 것으로 만든다.
춤추지 못하는 발레리나, 웃기지 못하는 코미디언과 같은 비극, 생 그 자체가 절망으로 물들어가는 광경을 미셸은 매일 같이 마주한다. 뿐만이 아니다. 그녀는 최근 연인을 잃었다. 깊은 실연은 가뜩이나 고통스런 그녀의 삶을 거의 나락으로 떨어뜨린다. 그녀가 파리를 방황하는 것도 그래서다.
▲이터널 선샤인스틸컷
롯데컬처웍스
사랑, 그리고 절망
영화는 미셸과 알렉스(드니 라방 분)의 사랑이야기다. 세상의 막다른 곳까지 내몰린 두 사람이 서로에게 다가서 맺는 관계를 다룬다. 그러나 통상적인 멜로영화와는 다르다. 사랑이 서로를 더 나은 존재로 이끄는 그런 모범적 연애담이 이 안에는 없다. 내몰릴 만큼 내몰린 이들이 저 아닌 다른 존재를 부여잡고 저를 태울 만큼 열렬히 사랑하는 이야기, 애정을 넘어 집착하고 집착을 넘어 상대를 망치려 하는 욕망과 절망의 얽혀듦에 대한 영화이기도 한 것이다. 그러나 누가 있어 이 영화가 사랑이 아니라고 쉬이 재단할 수 있을까.
알렉스는 세상 가운데 제 존재를 둘 곳을 찾지 못한 이다. 곡예사였던 그는 교통사고로 큰 부상을 입고 부랑자로 전락한 이다. 더는 꿈을 향할 수 없게 된, 술과 마약에 의존하는 막장인생. 그런 그와 미셸의 만남은 세상 끝에서 마주한 마지막 열정이며 온기처럼 보인다. 서로로부터 그래도 고통스런 세상을 버틸 수 있는 빛을 발견하던 둘의 관계는, 미셸의 상황이 나아질 수 있는 가능성이 찾아오며 전과는 다른 것으로 화한다.
영화의 제목이기도 한 '퐁네프의 다리'는 이야기의 또 다른 주인공이라 할 만큼 주요한 존재다. 보수공사로 폐쇄돼 인적이 드문 이 다리가 오갈 곳 없는 두 사람의 안식처가 되는 것이다. 당장 무너져도 이상치 않을 만큼 낡은 다리가 도리어 번화한 세상으로부터 두 사람을 지켜주는 유일한 터전이 된다. 동시에 공중에 붕 뜬 다리는 현실에 발붙일 수 없는 이들의 불안정함을, 마침내 공사가 예정된 상황은 그 시한부적 성격을 내보인다. 마침내 파괴되고 말 관계, 그 일시적 아름다움이 퐁네프의 다리를 둘러싸고 빛나는 것이다.
▲퐁네프의 연인들스틸컷
M&M 인터내셔널
닮았으나 다른 두 작품의 의미
<이터널 선샤인>과 <퐁네프의 연인들>은 닮았으나 다른 영화다. 닮은 것은 둘 모두 남과 여의 뜨겁고 깊은 관계를 주요한 소재로 삼고 있다는 점이다. 그 사랑의 필연적 소멸에 저항하는 이의 분투를 인상적으로 담아냈다는 점 또한 그렇다.
그러나 차이 또한 명확하다. 앞의 영화는 사랑을 하고 그 사랑을 잃어본 세상 누구에게라도 공감을 살 만큼 보편적인 이야기를 담고 있다. 반면 <퐁네프의 연인들>은 세상 누구에게도 공감을 사기 어려운 이들, 마지막의 마지막까지 내몰려 폐쇄된 다리 가운데 선 이들의 이야기다. 그 사랑은 집착과 폭력으로, 또 예고된 파멸에 다가서니 안온하고 건강한 관계를 지향하는 이 시대 보편적 관객에겐 불쾌함을 남길 수 있는 일이다.
두 영화는 모두 2026년 한국 극장에서 관객들과 만났다. <이터널 선샤인>은 또 한 번의 흥행돌풍을 이어가고 있고, <퐁네프의 연인들>도 의외의 선전을 구가한다. 그렇다면 내용, 즉 사랑에 대한 자세만으로 이들 영화의 유효하고 못함을 판별할 수는 없는 일이다. 이 시대에 호소하는 두 작품의 특별함 또한 고려해보아야 한다는 뜻이다.
▲퐁네프의 연인들포스터M&M 인터내셔널
두 작품의 시대적 유효함에 대하여
분명한 것은 두 영화가 이 시대에는 다시금 제작되기 어려운 작품이라는 사실이겠다. <이터널 선샤인>에서 보여준 미셸 공드리의 연출법은 매우 유명하다. 특수효과를 배제하고 아날로그적 질감을 살리려는 그의 집요한 연출은 인물의 기억 속에서 실시간으로 기억이 사라지는 순간들을 특별하게 표현한다. 조명과 소품, 카메라 움직임의 기만적 활용은 물론이고, 미리 만든 집 등 세트를 실시간으로 아예 부숴버리는 시도까지가 그를 가능케 한다.
<퐁네프의 연인들>도 마찬가지다. 제작기간이 무려 5년여가 걸린 이 작품은 제작비 상당부분을 아예 다리를 만드는 데 썼다. 실제 퐁네프 다리에서 충분한 기간 동안 영화를 촬영할 수 없자 다른 대안을 선택하는 대신 아예 다리와 주변 공간을 직접 만들기로 선택한 것이다. 길이 100미터, 폭 15미터의 퐁네프 다리 세트를 만들었고, 이를 위해 건축가며 조각가 등 수많은 이들의 조력을 받아야 했다. 다리 아래엔 센 강과 마찬가지로 보이도록 땅을 파고 물을 채웠다. 심지어 수심까지 15미터 이상으로 맞췄다는 건 집요함이 보이는 대목이다. 이 과정에서 제작자 중 3명이 파산하기까지 했다는데, 예술혼에 불타는 당대 프랑스 영화계가 아니었다면 그 선택을 비합리적 광기라 이해했을 법하다.
2026년 한국은 이와 같은 풍토와 정 반대에 서 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디지털 기술의 정점에서 AI기술이 온 세상을 변혁하고 있고, 한국은 그에 뒤처질 세라 전 국민적 변화를 경주하고 있는 것이다. 적극적으로 뒤따르는 이들만 있는 것이 아니다. 쇼츠며 릴스로 대표되는 알고리즘 추천영상에 길들여진 사람들은 뇌를 자극하는 일방적이고 단편적인 정보만을 반복해 수용한다. 진짜와 가짜를 구별하는 일에 점점 더 둔감해지고, 아날로그가 표상하는 실재에 대한 집착을 무용하고 불필요한 일로 받아들인다. 예술, 또 영화가 선 토양이 이와 얼마 떨어져 있지 않다.
이 같은 흐름 가운데서 아날로그에 대한 집념, 단 한 장면을 위해 자본과 효율의 논리를 넘어선 이들 작품을 선보인 데는 특별한 의미가 있다. 진실의 재현은 진실과 마찬가지라는 것이 디지털의 철학적 해석이다. 그러나 아날로그는 달리 말한다. 그 자체로 진실을 증명하는 것이 아날로그다. 아날로그적 미학을 알아보는 이들이 아직 세상엔 남아 있다. AI와 알고리즘이 디지털적 재현을 무차별적으로 감행하며 문명의 미래가 흔들리는 상황에서, 아날로그를 향한 향수를 느끼는 관객들의 존재는 어쩌면 인류의 희망일지 모를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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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영화평론가.서평가.기자.3급항해사 / '자주 부끄럽고 가끔 행복했습니다' 저자 / 진지한 글 써봐야 알아보는 이 없으니 영화와 책 얘기나 실컷 해보련다. / 인스타 @blly_kim / GV, 강의, 기고청탁은 goldstarsky@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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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날로그의 집념으로 만들어진 영화, 재개봉의 의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