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균제작비 5%로 만든 영화의 품격... 유명 감독의 도전

[김성호의 씨네만세 1270] <프레젠스>

프레젠스 스틸컷
프레젠스스틸컷찬란

영화 <프레젠스>의 감독 스티븐 소더버그는 독립영화부터 블록버스터까지, 연출부터 기획 및 제작에 이르기까지, 미국 영화계 전반에 이해가 깊은 성실한 감독이다. 그가 1989년 <섹스, 거짓말 그리고 비디오테이프>로 칸영화제 황금종려상을 차지한 건 아직도 깨지지 않고 있는 최연소 수상자 기록이다. 작은 영화가 거둔 대단한 성공 이후 그는 안주하지 않았다. 매년 한두 작품씩 성실히 발표하며 독자적이고 실험적인, 대중적이고 규모 있는 작품활동을 이어왔다. 데뷔작과 <에린 브로코비치> <오션스 일레븐>을 비롯한 <오션스> 시리즈를 한 감독이 연출했다는 사실이 꽤나 놀랍지 않나.

소더버그의 신작은 제작비가 불과 200만 달러(약 29억 3000만 원)다. 한국이라면 마케팅 등 후반작업 비용을 다 더해도 손익분기점이 100만 명 정도다. 개봉영화 평균 제작비가 4000만 달러(585억 2400만 원)에 육박하는 미국에선 상업영화가 아니라 독립영화 중에서도 가장 작은 수준으로 꼽힌다. 말하자면 제작비를 충분히 당길 만큼 이름난 몇 안 되는 명감독이 자의적으로 허리띠를 졸라맸다는 뜻. 기획부터 강력한 의지가 없었다면 이룰 수 없을 만큼의 비용 절감이다.

제작비를 절감한 대부분의 영화가 그렇듯, <프레젠스>도 대부분의 촬영을 한 공간에서 진행했다. 집이다. 미국 교외의 전형적 주택, 규모 있는 2층 집이다. 영화의 첫 장면은 빈집을 보러 온 한 가족의 모습으로 채워진다. 허겁지겁 들어온 부동산중개인이 곧 들이닥친 이 가족에게 집을 소개한다. 그리고 계약이 체결된다.

프레젠스 스틸컷
프레젠스스틸컷찬란

유령의 시선을 따르는 카메라

몇 가지 의뭉스러운 부분이 있다. 부모가 제 자식들에게 말하지 않고 이 집에서 있었던 좋지 못한 사건에 대해 언급하는 대목이 그러하다. 또 빈 집을 단장하는 일꾼 중 하나가 어느 방에는 도저히 들어가지 못하겠다고 하는 부분도 그렇다. 이상한 점이 하나하나 쌓여가며 영화가 어떤 작품인지를 짐작하게 한다. 이 영화는 가족드라마가 아니다. 이 집에 이사 온 이들이 아니라 이 집에 들어 있는 어떤 존재, 그러니까 산 자가 아닌 존재의 이야기다.

존재를 뜻하는 'Presence'가 영화의 제목인 것도 그래서일 테다. 영화는 차츰, 그리고 확실하게 이 존재를 내보인다. 처음엔 집에 이사 온 가족들의 모습을 보여준다. 그런데 그 보여주는 방식부터 어딘지 낯설다. 통상적인 드라마에서 카메라가 인물들을 잡는 방식과는 다르다. 인물들보다 조금쯤 위쪽에서 그들을 내려다보듯이 찍는다. 가만히 보다 보면 그건 영화 카메라가 아니라 이 집에 든 존재가 새로 들어온 가족들을 지켜보는 것처럼 느껴진다.

심지어 이 존재는 물리적 힘까지 발휘할 수 있어 보인다. 이 집의 막내딸이 펼쳐놓은 책들이 공중에 떠서 움직이거나 하는 등의 일이 벌어지는데 극 중 부부와 남매가 자리에 없으므로 오로지 관객만이 그 장면을 지켜본다. 요컨대 영화는 관객들로 하여금 유령의 뒤를 따라 그가 보고 행하는 모든 것을 바라보도록 한다.

프레젠스 스틸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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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족의 문제를 가족만이 모른다

이 집은 유령이 아니더라도 문제가 가득하다. 기가 센 엄마(루시 리우 분)는 오로지 맏아들 타일러(에디 매데이 분)만 편애한다. 딸 클로에(칼리나 리앙 분)는 최근 단짝을 잃고 정신적으로 힘든 시기를 보내고 있는 듯 보인다. 아빠 크리스(크리스 설리번 분)는 그 사실을 알고 돕고자 하지만 좀처럼 그녀에게 다가서기가 쉽지 않다. 아내도, 아들도 그의 고민을 나눌 상대가 되지 못한다. 특히 아들 타일러는 거의 준 망나니다. 동생을 정신이상자라 함부로 대하고 오로지 저 말고는 관심이 없다. 크리스의 눈치도 보지 않는 그를 사실상 이 집안의 대장인 엄마가 감싸고도니 이 집안의 문제가 해결될 조짐이 없다.

그런 와중에 닥쳐오는 또 다른 위협이 있다. 불안정한 클로에의 심리 상태를 파고든 라이언(웨스트 멀홀랜드 분)이 그녀에게 좋지 못한 일들을 저지르려 한다. 타일러의 친구이기도 한 그는 타일러에겐 대수롭지 않은 상대처럼 보이지만, 그 실상은 주변에서 알고 있는 것과는 전혀 다르다. 오로지 관객들, 그러니까 유령의 시선으로 인간이 닿지 못하는 곳에 닿을 수 있는 관찰자만이 그의 위협을 느낀다.

알프레드 히치콕이 제시한 '테이블 밑의 폭탄' 비유가 이 경우에 꼭 들어맞는다. 그가 말한다.

네 명의 사람들이 포커를 하러 방에 들어갑니다. 갑자기 폭탄이 터져 네 사람 모두 뼈도 못 추리게 됩니다. 이럴 경우 관객은 단지 놀랄(surprise) 뿐이죠. 그러나 나는 네 사람이 포커를 하러 들어가기 전에 먼저 한 남자가 포커판이 벌어지는 탁자 밑에 폭탄을 장치하는 것을 보여줍니다. 네 사람은 의자에 앉아 포커를 하고 시한폭탄의 초침은 폭발 시간이 다 되어갑니다. 이런 상황에서는 똑같은 무의미한 대화도 관객의 주의를 끌 수 있는 것이죠. 관객은 '지금 사소한 얘기를 할 때가 아니야. 조금 있으면 폭탄이 터질 거란 말이야!' 라고 외치고 싶은 심정이 되니까요. 폭탄이 터지기 직전 게임이 끝나고 일어서려는데 그중 한 사람이 말하죠.

"차나 한잔하지."

바로 이 순간 관객의 조바심은 폭발 직전이 됩니다. 이때 느끼는 감정이 서스펜스라는 겁니다.

프레젠스 포스터
프레젠스포스터찬란

처음부터 끝까지 놓치지 않는 한 가지

영화 <프레젠스>를 지탱하는 건 서스펜스다. 관객 모두가 아는 위협을 극 중 누구도 알지 못하는 데서, 아니 오로지 인간이 아닌 정체를 알 수 없는 존재만이 아는 데서 오는 긴장감이다. 그 확실한 힘을 동력 삼아 영화는 전진한다. 처음부터 끝까지 이 힘만큼은 놓치지 않는다. 덕분에 영화는 무너지지 않는다. 관객들은 끝까지 영화를 지켜본다.

기본을 하지 못하면서도 화려하게 치장하기 바쁜 흔한 작품들 사이에서 <프레젠스>와 같은 작품이 매력적으로 느껴진다. 서스펜스는 효과적이면서도 기본적이지만 능란한 감독 소더버그는 이를 실험적 카메라로 극복하려 든다. 유령의 시선이라니, 다른 작품에선 쉬이 마주할 수 없는 것이 아닌가. 심지어 그 유령이 도대체 누구인지도 작품에 하나의 장치로 작용하니, <프레젠스>가 아주 단순하기만 한 작품인 것도 아니다.

적은 제작비에도 상당한 흥행을 이어가고 있는 <프레젠스>는 결국 규모가, 자본이 모든 것이 아니란 걸 증명한다. 더 중요한 것은 제가 하는 이야기가 무엇인지를, 또 어떤 영화가 좋은 영화인지를 아는 것이다. 그리고 그를 실제로 해낼 수 있는 실력이다. 이 영화는 바로 그 점에서 나름의 성취를 거둔다.
덧붙이는 글 김성호 평론가의 브런치(https://brunch.co.kr/@goldstarsky)에도 함께 실립니다. '김성호의 씨네만세'를 검색하면 더 많은 글을 만날 수 있습니다. goldstarsky@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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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영화평론가.서평가.기자.3급항해사 / '자주 부끄럽고 가끔 행복했습니다' 저자 / 진지한 글 써봐야 알아보는 이 없으니 영화와 책 얘기나 실컷 해보련다. / 인스타 @blly_kim / GV, 강의, 기고청탁은 goldstarsky@naver.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