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받이 타고 피신" 40여년 만에 공개된 대학영화서클 비화

한국영상자료원에서 열린 '영화서클' 기획전, 각 대학 영화동아리 작품 선보여

 지난 1월 31일 한국영상자료원 '영화서클' 기획전에서 연세대 '연세영화패' 출신 인사들이 <부활하는 산하>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
지난 1월 31일 한국영상자료원 '영화서클' 기획전에서 연세대 '연세영화패' 출신 인사들이 <부활하는 산하>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성하훈

숨겨져 있던 40여년 전 영화의 제작 스태프 상당수가 공개됐다. 그간 철저히 함구해 일부만 알려졌던 제작 과정 역시 하나둘 드러났다. 20대 대학생 시절의 열정을 떠올리는 60대 중년들의 회고담은 시간 가는 줄 모를 정도로 흥미진진했다.

지난 1월 31일 서울 상암동 한국영상자료원(김홍준 원장)에서 시작된 '영화서클' 기획전은 80년대 대학영화운동의 출발이었던 각 대학 영화동아리의 작품을 공개하는 자리였다. 1980년대 후반까지는 '영화서클'이라 불렸던 대학 영화동아리의 활동을 조명하는 특별한 시간이었다.

1979년 태동한 서울대 '얄라셩'을 시작으로 1983년 고려대 '돌빛', 1985년 연세대 '연세영화패', 이화여대 '누에', 경희대 '그림자놀이', 한양대 '소나기' 등의 영화서클이 대거 생겨났다. 이들은 당시 대학생으로는 쉽지 않았던 장·단편영화들을 만들어 내기도 했는데, 한국영상자료원은 이들 작품을 한데 모아 '영화서클' 기획전을 마련했다.

'영화서클' 기획전의 첫 테이프를 끊은 것은 연세대 '연세영화패'와 고려대 '돌빛'이었다. 지금은 '프로메테우스'라고 이름이 바뀌었지만 1985년 '연세영화패'라는 이름으로 시작된 연세대 영화동아리는 40년의 역사를 이어오고 있다. 마찬가지로 1983년 시작된 고려대 '돌빛' 역시 대표적인 대학 영화동아리로 활동을 이어가고 있는 중이다.

'부활하는 산하' 제작 비화

이날 기획전에서는 1980년대 연세대와 고려대 영화서클에서 제작된 영화들이 선보였다. 제작된지 40년 정도 지난 작품이 공개된다는 점에서 관객들의 관심도 상당했다. 특히 연세대 '연세영화패' 작품 중 지난해 서울독립영화제에서 공개돼 큰 화제를 모았던 <부활하는 산하>가 상영되면서 80%에 달하는 좌석이 찰 만큼 열기가 뜨거웠다. 연세대 '연세영화패 가 당시 신입회원을 모집하기 위해 만들었던 단편 <광장>도 함께 상영됐다.

영화 상영 후 이어진 시네토크에는 지난해 서울독립영화제에 30년만에 모습을 드러냈던 이정하 감독과 제작에 참여했던 변재란 서울국제여성영화제 이사장, 이수정 감독, 안훈찬 피디 외에 실질적인 제작자였던 강원호 선생(당시 총학생회에서 <부활하는 산하>를 기획했다)이 참석해 그간 알려지지 않았던 숨겨진 뒷이야기들을 공개했다(관련기사 : 39년 만에 공개된, 공안 당국이 찾아 헤맸던 그 영화 https://omn.kr/2g90t).

기획과 프로듀서 역할을 맡았던 강원호 선생은 "당시 총학생회가 구성되자마자 다수가 수배되고 구속된 상황에서 단과대 학생회장들이 운영위원회를 진행했다"며 "1986년 10월 고연제 기간 중 학술제를 하게 됐고, 학술제만 할 것이 아니라 다큐멘터리를 만들자는 제안을 하게 되면서 영화 제작을 진행했다"고 밝혔다.

이어 그는 "한국 현대사를 쓴 일본 역사학자가 있다. 그 자료를 역하면서 같이 심포지엄 자료를 만들었다"라며 "이를 바탕으로 콘티를 짜고 시나리오를 만들어 영화패 이정하 감독에게 전달해 이렇게 찍으면 좋을 것 같다. 무조건 이대로 하라고 하고 제작비도 줬다"고 증언했다.

 지난 1월 31일 한국영상자료원 '영화서클' 기획전에서 연세대 '연세영화패' 출신 인사들이 <부활하는 산하>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
지난 1월 31일 한국영상자료원 '영화서클' 기획전에서 연세대 '연세영화패' 출신 인사들이 <부활하는 산하>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성하훈

<부활하는 산하> 제작 당시는 전두환 군사 독재의 통치가 정점에 이르던 시절. 민족해방론 관점에서 만들어진 영화였기에, 공안 당국은 필름을 확보하기 위해 혈안이 됐다. 연세대 상영 후 필름을 압수하기 위해 경찰을 학내에 진입시켰으나 학생들이 저항했다.

강원호 선생은 당시 필름을 갖고 3층에서 물받이를 타고 피신해 필름 탈취를 피할 수 있었다. 그 이후 불심검문과 안훈찬 피디의 연행 등으로 3차례 정도 필름이 압수될 위기에 처했으나 영화같은 반전이 이어지면서 필름은 끝내 공안당국의 손에 들어가지 않았다.

하지만 애꿎게 제작 주체로 지목된 서울영상집단의 홍기선·이효인·변재란 3인이 1986년 10월 26일 연행돼 고초를 겪어야 했다. 이후 영화와의 관련성이 드러나지 않으면서 홍기선·이효인만 농민영화 <파랑새>를 허가없이 상영했다는 이유로 구속·기소되고 변재란은 훈방됐다. 이것이 1980년대 이후 한국영화운동에서 영화인들이 처음 구속됐던 일명 '파랑새 사건'이었다.

이날 시네토크 과정에서 당시 미방영된 공중파 뉴스 영상도 일부 공개됐는데, 공안 사건으로 엮기 위해 그려놓은 조직도에는 홍기선이 총책으로, 변재란과 이효인 등이 조직원으로 등장하고 있었다.

이정하 감독은 <부활하는 산하>에 대해 "민족자주운동(일명 NL)을 하는 학생운동 세력이 정치 사상적인 우리 사회의 금기를 다 허물어 버렸고 문제를 제기한 것"이라며 "이 영화로 인해서 국가보안법으로 실형을 살고 고문당한 분들을 생각하면..."이라고 말하며 눈시울을 붉혔다. 자신의 영화로 인해 고생했던 이들에게 미안함을 전한 것이다.

고려대 '돌빛' 활동 당시 회고

 지난 1월 31일 한국영상자료원 '영화서클' 기획전에서 고려대 '돌빛' 출신 영화인들이 당시 활동과 단편영화 제작 등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
지난 1월 31일 한국영상자료원 '영화서클' 기획전에서 고려대 '돌빛' 출신 영화인들이 당시 활동과 단편영화 제작 등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성하훈

연세대 '연세영화패' 영화 상영에 이어 진행된 고려대 '돌빛' 영화 상영에는 창립회원인 정병각 감독과 이규석 한국예술종합학교 영상원 교수, 김시천 서울영상위원회 독립영화공공배급망센터 소장 등이 참석해 학생 시절 당시를 회고했다.

이날 이규석 감독이 1984년 만든 단편 <목격자>와 김시천 소장이 촬영했던 <1987년 애국학생 고 이한열 열사 민주국민장 촬영 원본>, 그리고 홍익대학교 영화서클 '빛의 소리'에서 제작한 단편영화 <배추흰나비>가 함께 상영됐다.

정병각 감독은 학생운동이 치열했던 시절 초기 빈 강의실 등에서 모임을 갖고, 서울대 '알랴셩'의 도움을 받아 워크숍을 진행하고 배창호 감독 <적도의 꽃> 촬영장 등을 갔던 기억 등을 전하면서 치열했던 학생운동과의 연관성에 대해서도 언급했다. 정 감독은 "용기 있는 학우들은 죽음을 무릅쓰고 시위를 하거나, 강제징집으로 끌려가 죽기도 하던 시대였기에 힘들었다"라며 "저는 그렇게는 못 하고 영화로 비슷한 이야기를 할 수 있는 시대가 오면 발언하면 좋겠다고 생각했다"고 말했다. 정병각 감독은 대학졸업 후 충무로 연출부로 들어와 1980년대 후반 영화인시국선언과 미국영화 직배저지 투쟁 등에 나섰고 1995년 명필름 창립작인 <코르셋>으로 데뷔했다.

이규석 교수도 '돌빛' 활동과 함께 대학 때 만들었던 <목격자>에 대해 설명했다. <목격자>는 수도에서 빨간 물이 나오는 것을 발견하고 수도관리소에 연락하지만 해결되지 않자 이리저리 움직여보다가 현실에 순응하는 청년에 대한 이야기다. 당시 대학서클에서 단편영화는 드물게 만들어졌기에 작품의 가치가 크다. 이 교수는 "권력에 대한 저항과 좌절 등의 구조를 갖고 있다"며 "3세계 영화에서 유행했던 구조 등을 참고했다"고 밝혔다.

김시천 소장은 1985년 대학에 입학해 암암리에 돌고 있던 광주민중항쟁 비디오를 보고 충격을 받았다면서 "'돌빛' 활동을 하면서 1987년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이 발생한 이후 시위가 격화될 때 동기와 함께 카메라를 들고 거리에 나가 기록을 했었다"고 말했다. 그가 직접 촬영한 <1987년 애국학생 고 이한열 열사 민주국민장 촬영 원본>은 이한열 열사 장례식 때 서울시청 앞에서 조기 게양을 요구하던 시민들이 실행에 옮기는 모습을 담고 있다.

김시천 소장은 또한 최근 학생 동아리방의 캐비닛에서 오래된 8mm 영화 3편을 찾은 사실도 공개했다. 영상자료원의 도움을 받아 확인해 보니 1985년과 1986년 대동제를 촬영한 것과 1988년에 워크숍을 통해 제작했던 작품이었다고 한다. 김 소장은 "이외에도 제작했던 작품들이 여럿 있는데, 남아 있지 않은 게 아쉽다"고 덧붙였다.

독립영화사 공백 재조명

 한국영상자료원 영화서클 기획전. 1월 31일~2월 12일까지 서울대 얄라셩, 연세대 영화패, 고려대 돌빛, 한양대 소나기, 경희대 그림자놀이, 이화여대 누에 등의 초기 작품 공개와 함께 시네토크, 강연 등으로 진행된다.
한국영상자료원 영화서클 기획전. 1월 31일~2월 12일까지 서울대 얄라셩, 연세대 영화패, 고려대 돌빛, 한양대 소나기, 경희대 그림자놀이, 이화여대 누에 등의 초기 작품 공개와 함께 시네토크, 강연 등으로 진행된다.한국영상자료원

이번 영화서클 기획전은 지난 2022년 이후 한국영화운동을 재조명하고 있는 한국영상자료원의 정성이 담겨 있는 행사다. 80년대 대학영화운동의 주역들이 한자리에 모일 수 있는 기회이면서 대학영화동아리 동문회도 자연스럽게 진행되는 모습이다.

2월 6일에는 연세대 '연세영화패' <광장>과 <부활하는 산하>가 한번 더 상영되고, 연세대 영화동아리 '프레메테우스' 지도교수인 백문임 교수의 강연도 진행된다. 한양대 '소나기'의 전설적인 작품 <인재를 위하여>도 상영되고 장윤현 감독과 공수창 감독의 시네토크도 준비돼 있다.

2월 7일에는 경희대 '그림자놀이'와 이화여대 '누에' 작품 상영과 함께 곽재용 감독 ·변주현 감독, 이화여대 누에 창립회원들과 변영주 감독 등이 나서는 행사도 있다. 12일에는 서울대 '얄라셩'의 작품 상영과 박광수 감독, 김홍준 감독의 시네토크와 강연이 진행된다.

한국영상자료원은 '영화서클' 기획전에 대해 "한국독립영화사의 공백을 재조명하는 자리면서, 당대 현실을 어떻게 재현하고 회피했으며, 이후 영화운동에 끼진 영향과 한계가 무엇인지를 함께 되묻고자 한다"고 기획 의도를 밝혔다.
영화서클 한국영상자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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