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지하에서 죽음 맞이한 이들, 서울 침수 사고를 기억하나요?

[김성호의 씨네만세 1269] <허밍>

예술의 목적이 무엇일까. 다양한 답이 나올 수가 있겠다. 그러나 나는 누군가 하나쯤은 반드시 이렇게 말하리라 믿는다. '사라져가는 것들'을 기억하는 것, 그를 기록하는 것이라고. 세상 모든 건 변한다. 태어난 모든 것엔 죽음이 있다. 모든 만남 또한 이별이 있다. 그 끝, 마침내 무로 귀결되는 결말에도 불구하고 누군가는 그에 저항하려 한다. 기억하고, 기록하고, 추억하는 일이 그와 같다.

수많은 죽음들이 있다. 헤어짐들이 있다. 사라짐들이 있다. 존재가 사라지고, 관계가 사라지고, 마침내는 기억조차 사라지는 것들이 있다. 가끔은 그저 그렇게 사라져선 안 된다고 목놓아 부르짖고 싶어지는 것들을 떠올린다.

허밍 스틸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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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년 서울 침수사망사고를 기억하나요?

신작 <허밍>의 감독 이승재에게 지난 2022년 있었던 서울 침수 사망사고도 그러한 것이었을까.

그 해 8월 8일 쏟아진 폭우로 서울에서 모두 다섯 명이 숨졌다. 이중 네 명은 관악구와 동작구 반지하 주택 거주자였다. 반지하 특성상 물이 차기 쉬운 데다 지대가 낮은 지역이라 침수상태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사망으로 이어진 것이다.

적잖은 이들이 이들의 죽음을 사회적 타살이라 불렀다. 피해를 입은 두 가구엔 공통점이 있다. 우선 장애인이 포함된 가구였다는 것, 그리고 반지하 주택이었다는 점이다. 두 사례 모두에서 발달장애, 지적장애를 가진 이들이 포함됐고, 가난 가운데 놓여 있었음을 무시할 수 없다. 해당 지역에선 폭우 때마다 침수가 반복되며 인명피해 발생이 예고됐으나 정부나 시 차원의 대응이 미비했다는 점에서도 비판이 쏟아졌다.

누군가는 기억해야 한다는 믿음이었을까. <허밍> 속 신림동 침수사고가 언급되는 방식이 다감하다. 영화는 서울 관악구 신림동과 국사봉 사이에 사는 성현(김철윤 분)을 주인공으로 한다.

영화 녹음기사로 일하는 성현은 1년 전 <신림과 국사봉 사이>란 작품에 참여한 뒤 오래 휴식을 가지는 중이다. 그의 작업실은 국사봉 근처에 있는데, 아는 이는 알겠으나 신림에서 조금 올라가면 나오는 야트막한 봉우리 일대를 그 이름인 국사봉이라 묶어 부른다.

허밍 스틸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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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림과 국사봉, 그 사이 잠긴 사연

국사봉 인근에 사는 이들에겐 대체로 같은 이유가 있다. 이름에 붙은 '봉'자가 괜히 봉이겠는가. 멧부리 봉(峰)을 쓰는 곳이니 그리 높다고는 못해도 경사가 제법 되는 언덕지역이다. 서울에서도 저지대인 신림에 비해 높고 올라가기 어려우니 부동산 가격도 약간은 저렴하게 마련이다. 그 이유로 주머니 얄팍한 이들이 모여들게 마련이다. 성현이 국사봉에 터를 마련한 것도 그래서다. 신림 근처는 좋겠는데, 집값이며 작업실 임대료를 아끼다보니 점점 더 위로 오르게 됐다는 것.

영화는 성현에게 과거 일했던 작품 감독이 찾아와 일을 맡기며 시작된다. 감독의 요청은 좀 독특한데, 영화 속에 담긴 한 장면에서 주연배우의 음성이 담기지 않아 다른 배우를 통해 후시녹음으로 채워야 한다는 것이다. 이때 소리가 나지 않은 데다 배우가 애드립을 한 탓으로 그 대사가 정확히 무엇인지도 알 수가 없다고. 그래서 그 대사를 찾는 역할이 성현에게 주어졌다. 당시 그 배우와 그래도 가장 가까이 지내지 않았느냐는 말을 더하여. 결국 거절할 수 없게 된 성현이 그 대사를 찾아내려는 여정이 영화 <허밍>의 기본적 얼개가 된다.

영화는 알 수 없는 대사를 찾으려는 두 사람을 중심으로 흘러간다. 하나는 일을 맡은 성현이고, 다른 하나는 녹음을 위해 성현의 작업실로 온 목소리 연기 배우 민영(김예지 분)이다. 둘은 녹음되지 않은 대사를 입모양이며 당시 인물의 상황에 비추어 유추하려 하지만 그 작업이 만만치가 않다. 인근에 있는 촬영지를 걸어보고, 함께 대화를 나누며 알 수 없는 대사를 추적하는 과정이 영화 가운데 담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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닿을 일 없어뵈던 관계가 태어날 때

동시에 영화는 1년 전 작품을 촬영하던 때를 오간다. 녹음기사 성현과 주연배우 미정(박서윤 분)이 처음 말을 트고, 조금씩 친해지던 순간을 성현의 기억을 따라 비춘다. 미정은 꽤나 당돌한 여고생이다. 얼마 후면 곧 성인이 될 그녀는 촬영장에선 도통 정해진 대사를 따르지 않아 주변을 당혹케 하기 일쑤다. 그녀를 따라 촬영장을 오가는 엄마(이채경 분)는 그녀의 작업에 대단히 집착하는 모양인데, 애드립은 절대로 안 된다고 신신당부를 하지만 그럴수록 미정의 애드립엔 거침이 없다. 그 기묘하면서도 왠지 알 것 같은 갈등은 이채경 배우의 인상적 연기를 통해 짧은 비중에도 결코 짧지 않은 인상을 남긴다.

나이로 보나 역할로 보나 좀처럼 닿을 일 없어 보이는 성현과 미정의 관계가 조금씩 가까워지는 건 그 자체로 인상적인 드라마다. 없던 것이 생겨나는 일이란 대개 그렇지 않던가. 그러나 피어난 모든 것은 시들기 마련, 그 관계의 끝이 곧 영화의 시작이 되는 것이다. 미정이 비운 자리로 인하여 영화는 완성되지 못했고, 그 완성을 위해 성현은 도무지 짐작할 수 없는 대사를 찾아내야 하는 처지가 된다.

허밍 포스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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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호함을 동력삼아 전진하는

<허밍>을 이끄는 동력 가운데 하나는 모호함이다. 적어도 모호함을 영화적 긴장을 유지하고 극을 이끄는 동력원으로 사용하는 데서는 감독 이승재의 역량이 빼어나다. 처음부터 끝까지 풀어지고 드러나는 일은 얼마 되지 않는다. 주요한 인물인 성현과 미정의 관계부터, 미정의 행동과 그 사라짐의 이유, 또 감독이 어째서 성현에게 일을 맞기고 나타나지 않는지, 무엇보다 미정의 대사까지가 좀처럼 표면 위로 드러나지 않는다. 그 모호함들이 쌓이고 쌓여 영화 전체의 분위기가 되고, 관객들은 큰 일 벌어지지 않는 짧지 않은 영화 가운데 몰입하여 저 나름의 이유를 찾아 나선다. 설명되지 않은 것을 이해하려 드는 관객의 의지가 곧 영화의 동력이 된다. 적어도 이 영화에서 그는 꽤나 성공적으로 작동한다.

그 죽음들로부터 4년의 시간이 흘렀다. 크고 작은 사고들로부터 우리는 주변의 아까운 것들을 잃어간다. 때로는 호들갑을 떨기도 하고, 때로는 마땅한 작업을 하기도 하지만, 또 때로는 아무도, 누구도 기억하지 않는 이별도 있다. 그렇다면 누군가는 기억해야 하지 않을까. <허밍>이 기억돼야 한다면, 그 이유는 바로 여기에 있는 것이라고 나는 믿는다.
덧붙이는 글 김성호 평론가의 브런치(https://brunch.co.kr/@goldstarsky)에도 함께 실립니다. '김성호의 씨네만세'를 검색하면 더 많은 글을 만날 수 있습니다. goldstarsky@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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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영화평론가.서평가.기자.3급항해사 / '자주 부끄럽고 가끔 행복했습니다' 저자 / 진지한 글 써봐야 알아보는 이 없으니 영화와 책 얘기나 실컷 해보련다. / 인스타 @blly_kim / GV, 강의, 기고청탁은 goldstarsky@naver.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