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파가 몰아닥친 1월의 어느 날, 서울 홍대입구 독립예술영화상영관 인디스페이스에서 보기 드문 작품 상영회가 있었다. 지난 씨네만세 1262편에서 소개한 '2026 한국독립영화 회원작 상영회'다. 이틀 간 진행된 이 상영회 첫 상영작은 박석영 감독의 <레이의 겨울방학> 차지가 됐다.
나는 행사를 주최한 한국독립영화협회로부터 이 작품 상영 뒤 이어지는 GV 행사 진행을 맡아달란 청탁을 받았다. 박석영 감독과 30여 분 동안 대화를 나누며 참석한 이들이 작품세계에 보다 깊이 다가설 수 있도록 도우란 주문이다. 나 스스로도 박석영 감독의 지난 행보를 흥미롭게 보고 있었던 터라 기꺼이 받아들일 밖에 없었다. 갈수록 좁아드는 한국 독립영화의 척박한 토양 위에서 박석영과 같은 존재는 기꺼이 관심을 담아 돌아볼 만하다고 여기는 때문이다.
제안을 수락한 뒤 주최 측으로부터 영화를 감상할 수 있는 링크를 전달받았다. 그리고 며칠이나 흘렀을까. 다시 도착한 메일엔 먼저 보낸 작품이 아니라 새로 보낸 작품으로 감상하고 평해달란 요구가 담겨 있었다. 사연인즉, 먼저 것은 영화제에서 튼 상영본이고 뒤의 것이 이후 있을 극장 개봉본인데 박석영 감독이 극작용 버전으로 상영과 대화를 진행해 달라 요청했다는 이야기다. 메일을 받고 새로 온 작품을 살펴보니 영화의 시작과 끝에 음향효과가 추가됐단 걸 확인할 수 있었다. 기차 소리, 기차가 내는 기적소리였다.
두 소녀의 만남이 영화가 되기까지
▲레이의 겨울방학스틸컷
한국독립영화협회
내달 개봉을 앞둔 <레이의 겨울방학>이 단 한 명의 관객이라도 더 만날 수 있기를 바라는 마음에 나는 이 글을 쓴다. 한국 독립영화의 흔한 현실, 그러니까 천 명, 이천 명의 관객을 모으는 데도 힘겨워하는 상황을 벗어나기를 바란다. 개봉하는 독립영화를 거의 다 찾아본다는 소수의 열성 팬층을 넘어 대중 일반에 가 닿기를 원한다. 이 영화가 그들에게 더욱 큰 가치가 있으리라 여기는 때문이다.
<레이의 겨울방학>은 두 소녀의 이야기다. 도쿄의 중학생 레이(구로사키 키리카 분)와 한국 여고생 규리(정주은 분)가 레이의 겨울방학이 막 시작된 어느 날 도쿄에서 만나 함께 보내는 며칠을 다룬다. 영화는 두 소녀가 함께 공놀이를 하고, 간단한 영어와 눈치코치, 손짓 발짓을 섞어 서로를 알아가고, 함께 놀이공원에 가고, 바다에도 다녀오는 소소하지만 결코 소소하지만은 않은 이야기로 이어진다. 여느 관계며 알아감과 다르지 않은 두 소녀의 며칠이 어딘지 안온하면서도 가슴 한 곳이 뿌듯해지는 감상을 불러일으킨다.
개봉까지 근 한 달이 남은 만큼, 영화를 보는 맛을 더할 수 있는 몇 가지 정보를 얹고자 한다. 하나는 촬영이다. 이날 박석영 감독에게 내가 물은 질문 중 하나는 촬영에 대한 것이었다. 벌써 활동이 10년을 넘긴 박석영 감독이다. 그 초기작 세 작품을 일러 꽃 3부작이라 부를 수 있을 텐데, 2015년 작 <들꽃>부터 2016년 <스틸플라워>, 2017년 <재꽃>이 그 영화들이다. 정하담 배우가 주연한 이들 작품을 건너 박석영 감독은 2024년 상당히 다른 분위기의 영화 <샤인>을 찍었고, 올해 <레이의 겨울방학>을 발표하기에 이르렀다.
이들 작품의 공통점이라면 아직 성인이 되지 못한 아이들이 주요하게 등장하는 것이랄까. 꽃 삼부작에서 이 사회 어디에도 기댈 곳 없이 들꽃처럼 흔들리는 아이들의 모습을 그린 그의 영화가 <샤인>에선 여전히 척박하나마 아이들을 외면하지 않는 존재를 내보인다. 그리고 이 영화 <레이의 겨울방학>에 이르러선 각자의 이유로 부모의 품을 잠시 벗어난 두 아이의 관계맺음으로부터 그 뒤에 굳건하게 역할을 해내고 있는 가정의 건실함을 확인하게 되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들 작품군을 관통하는 작가의 관심이며 주제의식이, 또한 은근하지만 분명하게 변화하고 있는 영화적 세계가 존재하는 것이 아닐까.
촬영감독이 환호했다는 한 순간
▲레이의 겨울방학스틸컷
한국독립영화협회
촬영은 그 변화를 가장 선명히 드러내는 부분이다. 첫 영화 <들꽃>의 가장 특징적인 부분이라면 역시 거세게 흔들리는 촬영이 아닐까 한다. 멀미 나게 흔들리는 카메라로 기댈 곳 없이 떠도는 아이들의 고단한 현실을 잡아냈다.
그런 그의 시선이 <레이의 겨울방학>에선 완전히 달라졌다. 극 초반 방학을 맞아 따로 계획이 없는 레이가 홀로 농구를 하러 나오는 길, 카메라는 땅에 굳건히 뿌리를 내린 채로 오래, 아주 오래 그녀의 걸음을 찍는다. 건물은 안정된 대칭으로 잡아내고, 공을 튀기며 홀로 농구를 하는 레이의 모습을 그렇게 정적으로 포착할 수가 없다.
그러다 패닝, 카메라를 회전하는 그 순간 촬영감독이 기쁨에 젖어 환호하는 소리를 내었다는 일화를 박석영 감독이 전했다. 그 안온하고 평화로운 전환이 있기까지 거의 10년이 넘는 시간이 들었다면 지나친 과장일까. 나는 부디 더 많은 관객이 그 기쁨 젖은 순간을 함께 지켜볼 수 있기를 바란다.
우아한 여중생을 카메라 앞에 세운다면
▲2026 한국독립영화협회 회원작 상영회포스터한국독립영화협회
한 가지 사실 더. 본래 꽉꽉 채운 각본에 배우를 끼워 맞추는 방식을 선호하지 않는 박석영 감독의 연출이 <레이의 겨울방학>에서도 그대로 확인된다. 레이를 연기한 구로사키 키리카와 그 부모를 감독은 오래 알고 지낸 사이라고. 이는 규리를 연기한 정주은 배우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인 듯한데, 영화는 이들을 영화에서 마주하게 하면 어떤 일이 생길까 하는 단순한 관심으로부터 출발했다는 이야기다. 출연한 배우들이 그대로 그 가족을 연기하는 상황에서, 극과 극 너머에 있는 삶의 기묘하면서도 자연스러운 마주 닿음이 관객에게 특별한 감상을 일으킬 수 있으리라 확신한다.
특히 아직 중학생인 구로사키 키리카에 대하여 감독은 '우아하다'거나 '멋진 사람' 같은 분위기를 풍긴다는 식의 표현을 아끼지 않았는데, 영화를 두어 번 본 나조차 그 말이 무슨 뜻인지 어렴풋이 알 듯 한 기분이 되었다. 전문 배우가 아닌 이들에게서 숙련된 명배우 못지않은 매력을 발굴해내는 감독의 역량 또한 인상적이다.
2월 25일 개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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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영화평론가.서평가.기자.3급항해사 / '자주 부끄럽고 가끔 행복했습니다' 저자 / 진지한 글 써봐야 알아보는 이 없으니 영화와 책 얘기나 실컷 해보련다. / 인스타 @blly_kim / GV, 강의, 기고청탁은 goldstarsky@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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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울방학'이 이 정도는 돼야지! 촬영감독도 환호했다는 순간